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행 5:29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 119:24, 49-50
우리가 젊을 때 아직 건강할 때에는 모른다. 사람은 참 그 있을 때는 있는 것에 감사할 줄 모르다 잃고 난 뒤에야 귀한 것을 안다. ‘청년의 때’ 곧 아직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때에 대한 교훈이 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 11:9).” 그때를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원하는 길로, 그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고 한다. 다만 그 모든 일에 심판이 따를 것을 알린다.
<아굴의 기도>에서 저는 두 가지를 구한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잠 30:7).” 먼저는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8).” 오늘 우리가 살면서 그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아는 게 얼마나 큰 복이고 위안인지 모른다. 어디가 아프고 힘들 때 이 정도여서, 여기까지여서 감사할 때가 있다. 이에 헛된 것을 멀리하게 된다. 우린 결코 스스로를 자신해서는 안 되는 것이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9).”
남에 대하여는 말이 쉽지 정작 자신의 일로는 속수무책인 게 사람이다. 그리하여 지혜는 이르길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전 11:10).” 정말이지 금세였다. 어느덧 중년이 되어 아직은 늙지도 그렇다고 젊지도 않은 나이에 보니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었다. 그땐 그처럼 꿈꾸며 추구하였던 이상도 많았었던 것 같은데 지내놓고 보니 부질없는 것을 붙들려고 그리도 애써 달려갔었다. 그러므로 시인은 깨달았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시 119:9).
이제 와 생각하니 그때 주가 부르실 때 순순히 따랐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 아굴은 교훈하고 있다. 이게 다 욕심 때문이었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잠 30:15-16).” 거머리와 스올은 끝이 없어서 한 번쯤 괜찮겠지… 하고 스스로 허용했던 것이 영영 그리로 이끌기 십상이다. 욕심이란 그런 것이어서, 자신은 손해 보지 않으려 자신보다 없는 이의 것을 취한다.
하여 아굴은 생이 참 기이함을 알았다.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 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의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잠 30:18-20).” 분명 그러한데 아닌 듯 흔적도 없으니, 뱀의 자취와 하늘을 날아간 독수리의 길이 그러하고, 남녀의 자취 또한 그러해서 시치미 떼고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알 길이 없어서 사람의 마음이란 한 길 속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불가해한 것에 대하여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잠 30:21-23).” 사람의 앞뒤가 그렇게 다르다. 그러할 때에 우리에게는 지혜가 필요하여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26-28).” 작은 것이라도 그것이 큰 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은 ‘그럴 수 있는 일’이었으나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흔히 우리가 살면서 ‘그럴 수 있지’ 하고 스스로 관대한 경우가 있다. 살다보면 그럴 수 있는 일이 어디 한둘이겠나?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을 테고, 그렇듯 가벼이 흘려보내다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 된다.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는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친다. 그런데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다. 그럼 그렇다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4).”
흔히 우리가 스스로를 자신할 때 ‘그럴 수 있지!’ 하고 자신을 자신한다. 같이 말씀을 나누다 친구는 그런 데서 답답증을 느낀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자기 의지로 행하고 선택할 수 있다고 여긴다. 성경은 그럴 수 없는 자신을 알고 사투를 벌이는데,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 저는 스스로 자신이 허용하고, 수용하는 정도에서 말씀을 순종하길 원한다. 앞서 예민해지기 싫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아나니아가 엎드러져 혼이 떠났다. 고작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 삽비라도 와서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하고 물을 때 “예 이것뿐이라.” 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거짓을 고한다(8). 우리가 좀 그런 게 하나가 그러면 하나는 좀 아니라! 하고 정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질병은 전염돼도 건강은 전염되지 않는 것처럼 죄의 속성이란 누룩과 같아서 별 것 아닌 줄 알았던 ‘그럴 수 있지!’ 하였던 게 어느새 ‘그래도 되는 것’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리 굳어진 영혼은 어찌나 흔적도 없이 시치미를 떼는지 스스로도 깜빡, 속을 정도이다. 단단하기는 아무리 깨려 해도 소용이 없다.
우리 스스로 얼마나 불완전하고 어리석은지, 내가 얼마나 죄인이고 항상 죄의 속성으로 살고 있는지 통회하고 자복하는 것과 비례하여 은총을 갈망하는 법이다. 그러다 일순간에 잃는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요 12:50).” 하여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아니면 순간,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90:9-10).
더욱이 아직 젊을 때, 힘이 있을 때는 이와 같은 말씀이 그리 절박하게 다가올 리 없다. 아프다가도 조금 살만해지면 언제 또 해이한 게 사람 마음이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그래서 있는 것들이 더 무섭다고 자기 것도 많은데 거지 똥구멍에서 콩나물을 빼먹으려 든다. 어느 시대에나 가진 자들이 더 가지려고 악랄하게 역사를 비틀어왔다.
더욱이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종교적 위선이 더해져서 겁이 없다. 저들은 스스로를 결코 잘못이라 인정할 수 없이 죽었다. 죽으면서도 무슨 잘못인가, 하고 반감이 더 컸을 것이다. 이에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불순종보다 더 무서운 게 자기 신념으로 믿음이라 하는 것이다. 친구의 ‘자기 의지, 자신의 선택’이 나는 두려웠다. 그리 생각하는 이상 스스로를 죄인이라 절규하지 않는다. 그저 그럴 수 있는 정도로 자신을 허용할 뿐이어서 말이다. 차라리 안 믿는 이만 못한 게 스스로 믿는다고 하는 신념이다.
외람되지만 나는 선생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어서다. 스스로 모든 종교를 아우르며 ‘나도 안다’ 하고 스스로는 하나님도 믿는다고 하니, 마호메트나 부처나 하나님이나 모두가 하나라는 것이어서, 성경은 외면하면서도 그 지식은 풍부하여서 뭐라 이르면 해석이 남다르고 그럴 듯하여 더는 어려워서 어쩔 수 없었다. 안 받아도 될 일이지만 자꾸 시험이 들어 나의 소극적인 대응은 차단뿐이었다. 물론 다른 번호로 전화를 하면 속수무책이나 그렇듯 신념은 믿음 같아서 자신이 옳다 여기는 것으로 거저 주시는 이의 믿음을 한사코 거절한다. 이를 우린 경계해야 한다.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1:14).”
이를 알려줘도 싸우려고 드는 게 신념이다. 나는 사랑한다고 하나 저는 욕으로 듣는다. 그러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 3:8-9).” 이를 말하다 싸우자고 들기 십상이어서 헌금 문제는 예민하다. 결코 자기 것을 내어주는 법이 없다. 저들은 십일조를 거부한다. 하나님의 것으로 자신을 내어드릴 이유가 없다. 그런 하나님이면 허용하지 않겠다는 소리도 한다. 스스로를 동등한 자리에 놓고 하나님과 맞선다. 그렇게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5).”
너도 못 주지? 하고 ‘친구니까’ 대놓고 물었다. 창고에 썩어가도 없다고 한다. 여기저기 투자한 게 많은데 남을 위해 쓸 돈은 없다. 자신을 위해 쓸 시간은 있어도 누구에게 내어줄 시간은 없다. 참 신기하지? 보면 늘 죽는 소리다. 돈돈거리며 궁색한 소리뿐이지만 가진 것은 나보다도 백 배는 많다. 몇 개씩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를 빼앗으려 한다. 차라리 드리지를 말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남의 시선 때문이었을까? 자신들의 종교적 위신, 신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정직하게 가용할 수 있는 정도만 하던가? 나름은 다 바친 것처럼 그게 그래도 되는 것인 줄 알았다. 누가 알겠나?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있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낙타 같다고 하신 모양이다. 가진 게 오히려 저를 망친다. 없었으면 오히려 나았을 것을, 그러면서도 아들과 소주 한 잔 할 시간은 있고 고급차를 몰고 다닐 정도의 여유는 된다. 결국 하는 소리가 ‘누굴 네가 몰라서 그래’ 하는 소리로, 연습용 기타 하나 선물하고, 같이 잠시 시간을 좀 내어 마음을 쓰라는 말을 그리 흘겨듣고 말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하고 더는 말을 삼켰다. 어쩜 그 내용이 다 똑같을까? ‘목사님이 우리 아이를 몰라서 그래요!’ 하고 결국 누구는 기어이 홈스쿨링을 하기로 했다. 어쩌겠나? 백날 말로 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젊을 때’ 아직 그럴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될 때는 자신의 거짓도 거짓이라 인정하지 못한다. 죄는 크고 작은 게 따로 있지 않다. 그럴 수 있지, 하고 스스로 허용하는 자기 암시가 모든 걸 망쳐놓는다. 감옥에 갇힌 늙은 바울은 그가 이룬 업적과 기독교에 끼친 영향이 엄청난데도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하질 않나,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9:27).” 어찌 이처럼 기를 쓰고 자신을 복종시키려 한 것일까? 왜 우린 그러지 못할까? 너무 많이 가졌다. 가진 것을 지키려하고만 하지 손해볼까하여 남이 망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자신이 자신을 허용하는 순간 하나님의 영이 거하실 곳을 축소하거나 없애서 그 마음이 완악하게 된다. 누군 누구보다 교회에 열심이면서 절대 십일조를 못 낸다. 헌금은 그때마다 다르다. 저는 늘 주목 받는 생이기를 바란다. 그런 이를 알고 지내는 일은 죽을 맛이다. 뭐라 한들 듣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이런저런 입바른 소린 저가 옳아 훈장 같은 말만 한다. 그는 결국 자기 말로 자신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여 나는 주께 구한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19:10-11).
다른 수 없다!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23-24).
그러므로,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25, 27).
이는,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28).
그리하여,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주를 경외하게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37-38).
하여,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49-5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