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행 18:9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시 130:5-6
‘말씀에 붙잡혀’ 산다는 일,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행 18:5).” 그리 아니할 수 없는 데 따른 보호와 인도하심은 놀랍다. 그것이 더러는 실패하고 망한 것 같을 때, 복음을 전하다 해외에서 돌아와 지하 단칸방을 세 얻어 사는 동안 말씀 연구에 골몰하게 한다. 그때에 아버지는 창세기 1장에서 11장으로 <가라사대>를 썼다. 이어 <아가서>와 <로마서>를 썼다. 마치 1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천로역정> 외 수십 권의 영적인 책을 썼던 존 번연과 같이, 말씀에 붙잡혔다는 것은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3).”
이 놀라운 은총을 어찌 사람의 말로 이 땅에 있는 동안 설명이 가능할까? 오늘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같이 천막 짓는 일을 하며 복음을 전한다. 저들이 고린도로 내려오기까지 자의적으로 그리한 게 아니었다. 가장 종교적인 도시 아덴에서 참담한 실패를 보고 쫓기듯 왔다. 아굴라 부부도 로마에 거하던 유대사람들이었다. 당시 글라우디오(41-54년)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을 추방했다.
주의 사역은 때로 쫓겨나고 버려지고 실패하고 어쩔 수 없이 흘러가는 것 같다. 이처럼 말씀을 읽다보면 어릴 때 아버지가 목회지를 옮길 때마다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밀렸던 게 생각난다. 한두 해도 못 되어 무슨 일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고, 어느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로 추대하였다가 3년이 조금 넘었을 때 무슨 일로 내쫓겨서 그때 인천으로까지 왔다. ‘무슨 일’에 대해서는 내가 어려서 잘 모르기도 하고, 들어서 아는 이야기라 뭐라 옮길 내용은 아니다. 그렇듯 세상눈으로 볼 때 일시적으로는 실패하고, 틀어져 쫓겨나는 듯하나,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시 118:22-23).
주가 행하시는 일이 더러는 그리 업신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논리로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
더러는 사람을 대하는 일에서도, 말씀을 전하고 그 열매를 바라는 때에도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실망과 낙심일 때가 있다. 그럼에도 다시 또 그 일에 있는 것, 말씀에 붙잡혀 사는 일에 대하여… 동기 여전도사 아무개는 가끔 통화할 때면 교회 사역에 이런저런 일로 낙심하고 어려워하는 마음을 토로한다. 그럴 거면 굳이 그 일을 왜 하고 있나? 하다못해 뭘 해도 그 일 만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데도 보면 또 다른 교회에서 어떤 형태로든 주의 일을 한다. 우리의 실패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당연히 안 믿는 자들이나 세상의 눈으로는 쯧쯧, 하고 혀를 찰 일이다. 그래서 난 교회를 안 가, 예수를 안 믿어, 하는 사람들을 보란 듯이 우리는 다시 또 그 자리에 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이런 일을 두고 저들을 설득하고 이해를 구할 이유가 없다. 오늘 바울은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행 18:6).” 받아들이지 않는 데에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6-27).”
오히려 그럴 때면 자신을 다잡아 주 앞에 세우는 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에 대하여는 누구라도 말로 설명하여 그 말을 듣고 동조할 리 없다. 믿음으로 달려가는 데 있어 때로는 넘어진다. 오히려 더 안 좋은 일로 힘이 든 것 같다. 그럼에도 ‘말씀에 붙잡혀’ 다시 또 이 길을 가는 것,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6-27).”
그러한 마음으로 친구를 권면하고 나 자신을 주 앞에 세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제일 목적은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더러 저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니!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행 26:29).”
이는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붙들려 본 사람은 안다. 밖에서 보기에 또는 곁에서 볼 때도 이해할 수 없는 지경이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러할 때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곧 오늘 우리가 가진 이 평안은 세상의 그 어떤 성과나 형통함으로 느끼는 단회적인 만족함이 아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 7:22).” 종은 종인데 자유하다 함은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9:2-3).” 이 어려운, 아이러니하고 설명될 길 없는 사명감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람이면 안다.
우리의 확신은 내 것이 아니어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이를 알면 알수록 내가 더러 이해할 수 없을 때도 ‘말씀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로 안심이 된다. 마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러므로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나는 누가 어떤 어려움으로 이리 몰리고 저리 결정할 수밖에 없을 때 주가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기대하게 한다. 그러한 말을 당사자에게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다시 또 주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흐뭇하다. 어떤 기쁨이 내 안에서 저를 응원하고 축복한다. 이는 나를 향한 마음이기도 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말씀이 하시는 일이어서 더는 내가 개의치 않을 수 있다. 어찌 고통 중에 또는 낙심 가운데, 나는 마치 초월한 사람처럼 그런다는 게 아니라 나 역시 누구보다 징징거리고 투덜거리고 주께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이 길을 걷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 내가 한다 할 수 있겠나? 그런 가운데 서로가 용납하고 합력하는 것을 보면 그것 또한 신기하다. 친구는 마치 당장이라도 교회를 그만 다닐 것처럼 툴툴거리다가도 여전히 새벽예배를 지키고 주일을 성수한다. 그것이 또 내게는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된다. 이 모든 게 희한한 일이어서 이게 어찌 서로가 좋아하거나 권할 일이 되겠나? 누가 그랬다는데, 널 보면 교회 다닐 마음이 없어! 그리 말한 것은 세상적으로 잘 풀리지 않는 듯하여 그러느니 왜 교횔 다니냐 하는 소린데, 그러는 저가 모르는 게 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1-2).”
그러므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결국 열지 않는 저의 문에 대하여는 뭐라 할 말이 없다. 저가 억만금을 벌고 무병장수한다 해도 그것을 복이라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저의 어느 가까운 날에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눅 16:24).”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우리로서는 저를 다급히 부르는 것일 뿐인데.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잠 24:6).”
주가 더하시는 것으로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2).” 그리 행하면서도 그러는 나 자신이 더러는 이해가 안 된다. 그럴 때에도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행 18:9).” 하시는 일이었으니,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10).” 이에,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130:1).
우리로 주를 부르게 하심은,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2-4).
이를 인정하는 것이 주를 찬송함이었으니, 어려울 때 우린 주를 바란다. 힘들고 고단하여 간절하여진다. 안 하면 그만이고, 다른 일로 이 정도 먹고 살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면 오히려 오늘 주의 일로 당하는 어떤 어려움으로 감사하게 된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이는 알고부터는 억만금을 준다 해도 다른 길로 갈 수 없고, 무병장수하며 이 땅의 모든 영화를 누린다 해도 말씀을 버릴 수 없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3-4).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여,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130: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