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전봉석 2024. 3. 4. 03:41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4-5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시 144:2

 

 

믿음은 이론인가? 실제인가?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는 정작 어떤 일을 두고 현실적인 고려를 아니 할 수 없다. 누구는 더욱 공격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하고, 누구는 요령껏 남들처럼 따라가야 한다고 한다. 마치 욥의 친구들과 같이 저마다의 생각이 다 옳은 소리라, 그게 아닌데… 하고 말하는 자의 믿음은 공중에 붕 뜬 것 같다. 이에 성경은 우리 손을 이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0-13).”

 

이와 같이 우리가 믿음으로 주를 바라려 할 때, 어떤 어려움은 기다렸다는 듯 우릴 위험에 빠뜨린다. 그때에 주의 음성이 들린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14).” 위축되고 주눅 들어, 마음은 억눌리고 생활은 피폐해져 바위 틈 낭떠러지 같이 은밀한 곳으로 숨게 된다. 이는 현실이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이 배에 타고 계심을 알면서도,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마 8:24).” 우린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25).” 아, 우리가 죽겠나이다! 이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26).”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작고 나약한지를 새삼 알게 된다. 이에 오늘 말씀은,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곧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 2:15).” 믿음에 꽃이 피고 곧 열매가 싹을 띄울 때에 오늘의 시련은 우리 안에 작은 여우처럼 의심과 회의와 갈등을 심는다. 이게 뭔가? 싶은 자괴감은 마치 모든 일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바람과 같다. 원망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마음은 저 혼자 들썽거린다.

 

아,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 실제 우리가 이를 인정할 때 억울함을 호소하기에 앞서 자신의 죄를 돌아본다. 그러므로 성경은 일러,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애 3:39-40).”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함께 가자. 말씀은 오늘 나의 손을 이끌며 앞장선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시 144:3-4).

 

마치 현실은 선택을 강요하는 것 같다. 이제 어떻게 할래? 저마다 건네는 말들도 현실적인 것을 운운하며 우리 안의 믿음과 동떨어진 충고 일색이다. 이에 오늘 말씀은 믿음의 본을 보인다. 아브라함을 예로 든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3).” 다만 저는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4).” 그렇다면 오늘 나는 어떠한가?

 

우리 신앙의 기본인 이신득의는 창세전에 이루어진 구원의 공식이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그와 같이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4-5).”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을 두고 동생을 생각한다. 당장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도를 부탁한 이들을 생각한다. 내 자신의 연약함을 생각한다. 말씀으로 붙들리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이론이 아니다. 실제이다.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우리는 자꾸 적당한 타협점을 찾는다. 말씀은 말씀이고 현실은 현실로 놓는다. 누구라도 그리 권면하고 말을 거든다. 나는 입을 다물고 말씀을 되새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곧 오늘 우리가 어떤 일을 겪는 동안 ‘내가 한 일’을 생각하면 서러움과 원망이 마음에 깃들면서 작은 여우처럼 마음의 포도원을 들쑤시고 파헤친다. 그렇듯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이때껏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주의 은혜를 앞세울 때,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6-8).”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승복할 때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리하여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말씀으로밖에는 답이 없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나로 이끄시는 결론이다.

 

세상은 정의롭지 않다. 불의하고 악하다. 이는 당연하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주를 신뢰함은 부당하게 당하는 어려움 속에서 더욱 주를 바라게 하는 것이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그러므로 나는 더욱 일찍이 주 앞에 나와 엎드린다. 말씀을 되뇌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의 연약함은 죄가 아니다. 내가 어찌 하려고 하는 스스로의 요령과 판단이 죄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주께 맡긴다는 것은 처한 상황을 받아들임으로 주의 선하심을 잃지 않는 것으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저들만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늘 우리로도 그럴 수 있음을 성경은 일깨우신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우리가 사는 이 모든 날은 곧 다 지나간다. 가까운 훗날 우리는 주 앞에서 오늘을 이야기하며 서로의 속량과 그 은혜를 찬송할 것이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그러므로 우린 할 수 있다. 믿음으로 능치 못함이 없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행 15:9).” 세상은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4-15).” 돌이켜 나의 죄를 살필 때,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롬 4:9-10).”

 

주를 멀리하고 함부로 살 때에 이미 주는 나의 하나님이셨으니,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13).” 돌이켜 주를 믿음으로 더는 나의 그 어떤 죄도 더는 나를 정죄하지 못한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8).”

 

더는 아무런 희망도 없고 어떤 대책을 세울 수도 없는 때에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19-22).” 오늘을 살며 사랑하며 견딜 수 있는 힘은 믿음뿐이다. 이와 같은 말씀은 결국 오늘 우리를 위한 것이니,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23-24).”

 

이에 오늘도 주께 바라는 것은 ‘내가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할 수 없어서’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 오늘 이 모든 상황과 사건과 사실을 주가 아시나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믿음은 실제다. 현실이고 당면한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하며 내 안을 휘젓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아 2:16-17).” 하고 말씀을 전하면서 나는 주를 더욱 바라였고, 부디 동생이 처한 상황 속에서 그러하기를 위해 기도하였다. 오늘도 내 곁에 두신 한 영혼 한 영혼의 어떤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우리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하면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주가 이루실 것이다. 설령 그것이 이 땅에서 억울한 일로 끝나고, 실패한 것과 같이 허무하다 해도,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40).”

 

이에,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144:2, 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