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전봉석 2024. 3. 9. 04:38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5-16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시 149:4

 

 

우리의 수고나 노력으로가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붙들린다. 자칫 우리의 수고가 걸림돌이 된다. 우리 안의 기쁨은 세상을 향한 탄식을 지나서다. 아이는 자기 때문에 부모가 헤어져 산다는 데서 어려워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스스로를 그리 여기며 모든 게 그리 돌아간다. 나는 우리 손에 등불을 하나 주신 거라고 말했다. 역경을 겪은 사람은 환난을 지나는 데 필요한 소망의 빛을 들고 산다. 탄식은 기쁨을 소중히 여길 줄 알게 한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후 11:29).”

 

자꾸 시선이 그리 간다. 아픈 데 손이 간다. 다음 주부터 초등학교 4학년의 아이가 와서 글쓰기를 하기로 했다. 사모는 홈스쿨링을 실시하였고 그 일환으로 나도 글쓰기를 가담하기로 한 셈이다. 그러려니 하고 외면하려 들 때 마음은 저 혼자 어려웠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9-10).” 내가 애써 고개를 돌려도 그곳에 두시는 이에 대하여는 어찌 외면할 수가 없다.

 

아이엄마에게도 같이 글을 쓸 것을 권하였다. 자신은 혼자 보는 글을 쓴다고 하여, 글의 특성에 대해 말하였다. 말은 듣는 이의 것이고 글은 보는 이의 것이다. 누군가 본다, 하는 데서 글은 시작하고 앞에 두고 누구에게 들려준다 할 때 말은 힘을 갖는다.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8).”

 

우리가 상함은 상한 영혼들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안 믿는 자들과 다를 바 없는 사고를 하며 산다면 우리의 믿음은 허상일 뿐이다. 신앙은 이론도 주장도 아니다. 성경은 우리의 생각을 묻는 게 아니다. 선포하심이고 계시하심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삶이란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16-17).”

 

글쓰기에 대한 나의 생각은 심판을 대비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주 앞에 서야 한다. 자신도 잊고 살았던 일까지 주 앞에 낱낱이 고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우리가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 고한 내용으로 다른 말이 없을 때이다. 그러므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말하기는 덕을 세우고 글쓰기는 자신을 세운다. 글은 말보다 한 단계 다른 필터가 있다. 스스로의 완충작용을 한다. 실제 많은 이가 이 글을 보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글로 쓰는 것은 내 안에 새기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3-14).” 귀한 것을 알아야 지킬 줄도 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아이가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면서부터 스스로를 귀히 여기게 되었다. 이를 하나님이 특별히 맡기신 것이란 말에 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말을 하면서 나는 듣는 이가 된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매일 일정하게 말씀을 나누면서 나는 내가 말하는 자인 줄 알았으나 내가 듣는 자이었다.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전 12:10-11).”

 

묵상글을 쓰길 권하는 것은 묵상의 특성 때문이다. 단지 말씀을 깨닫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산다는 일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 150:6).

 

곧 우리가 살았다 하는 일은 주를 찬송하는 일이다.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때 이를 지으신 이를 찬송할 수는 없다. ‘나는 조현병이 있다.’ 하고 시작한 문장 앞에서 나는 저의 저력을 느꼈다. 마치 알코올중독자가 이를 끊는 데 있어 ‘나는 알코올중독자이다.’ 하는 전제로 시작할 때 이겨내는 원리와 같다. 우리가 죄인이란 것을 고백하는 순간 죄의 문제에서 놓여나듯이 말이다. 주 앞에 정직하다는 것,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애 3:48-50).”

 

울 수 있을 때 기쁨이 온다. 나는 저에게 글쓰기를 권하고 저는 혼자만 보는 글을 쓴다고 하였을 때, 그 의미 없음을 알려는 주는 데 있어, 스스로를 숨기고 훌륭하다는 사람보다 자신을 드러내어 당당한 사람이 복되다. 주님은 가감 없이 드러내셨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1-42).”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오늘 바울은 통회하는 심정으로 밝힌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 9:4-5).”

 

그런 그들이 어쩌자고 주를 외면하고 불신하게 된 것일까?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8).” 결국은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3-5).”

 

슬퍼해야 기쁨을 구한다. 애통할 때 위로를 얻는다. 아픈 자가 의원을 찾고 목마를 자가 우물을 판다. 늘 우리의 허점은 스스로 괜찮다, 하고 만족하는 데서 일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누구와 어떤 일로 대화할 때 듣는 이가 있고 자기 말만 하는 이가 있다. 듣지 못하는 자의 말은 자기 오류에 빠져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늪에 빠졌다. 하여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하다보면 실제 남의 사연을 듣는 일은 말하기보다 두 배는 더 기진할 일이다. 그러나 이를 동시에 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할 수 있는 것이 글쓰기이다. 누구에게 읽히고자 하여 글을 쓰라고 권하는 게 아니다. 쓰면서 저는 자기 일에서 객관적인 사고를 한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성경을 주신 것은 해석이 분분하나 글이란 그 세계가 무궁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식을 주고 정답을 욕구하시는 게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답을 구하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다. 마치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요 6:36).” 우리 주님이 답답해하셨던 것,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며 숱하게 이르시지만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요 6:35, 36).” 그러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0:29).”

 

말씀의 세계는 이와 같다. 글의 유용함은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세상을 넓혀준다. 하여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귀한 것을 알면 알수록 이를 지키려 목숨을 다하고, 이를 차지하려 모든 것을 건다.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롬 9:9).” 말도 안 되는 사실을 말로써 믿는 일, 이는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11, 13).”

 

이와 같은 예정과 선택을 우린 우리의 이해로 감당할 수 없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받는 자체가 기적이다. 내 안의 믿음이란 그와 같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14).” 바울은 스스로 묻고 답한다. 이는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15-16).”

 

성경의 세계는 이와 같이 일방적이나 온당하다. 우린 이를 받을 능력도 살아갈 힘도 없다. 하여 묵상은 알지도 못하면서 이를 되새기는 일이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7-18).” 이 놀라운, 기이하고 신비한 일이 내 안에 일어났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그 증거다.

 

굳이 더는 상관하지 말자, 하고는 다음 주부터 아이 수업을 한다. 글을 쓰면 글 밑에 나의 의견을 더한다. 읽는다는 일, 그 마음을 헤아려 안다는 일은 주의 권능으로밖에는 할 수가 없다. 헛된 생각과 망상에 사로잡힌 자의 세계를 내가 따라 들어갈 수는 없다. 설령 들어갔다 해도 저는 인정하지 않을 테고, 그러므로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잠 12:14).” 하여 기도한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 141:3).

 

나의 말하기와 듣기는 일치하여서 주의 은혜로 주께 기도한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5).

 

듣기는 지혜를 더하시는 이의 손길로써 가능하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이를 조심하느라 말하기를 회피할 때 내 안에서 말들이 요동친다. 속이 볶여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곧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6-7).”

 

나는 듣거나 말하는 자가 되었다. 말씀구절을 들고 다니며 적절할 때 이를 적용하는 능력을 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시 92:15, 145:17).

 

나는 못하나 주는 하신다. 이를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하고 역설하는 바울의 증언과 같이(롬 9:21), 오늘 내가 주의 사랑이 된 것도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25).” 하심이 이루어진 까닭이다. 오늘 이 모든 상황을 놓고 주를 바랄 때,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30, 33).”

 

이 모든 것은 말씀대로 이루심이다. 나는 그저 그 앞에 서서,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149:1, 4).

 

주가 행하심을, 다만 나는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이에,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