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 12:3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 2:11
내가 어떻게 해보려는 그 이상의 일을 금하신다. 주신 상황 속에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하신다. 말씀 앞에서 가만히 내 안에 이는 여러 성급한 마음과 그 이상의 생각을 점검한다. 가령 아이가 아무리 지적으로 저하됐다 해도 감정이나 느낌도 없는 게 아니다. 모두가 자신을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한다고 아이는 말했다. 나는 그 의미를 안다. 특별반으로 갈 때, 갔다 왔을 때, 평소 다정한 것 같으나 무심하고, 무심한 듯 무시하는 시선이 어떤 것인지 안다. 현재 아이는 모든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온통 다 스트레스다. 다그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아이의 무기력은 일종의 방어기제다.
그런저런 내용을 들을 때 나는 자꾸 화가 난다. 어른이란 이유로 한 마디씩 거드는 말들이 아이에게는 폭력이 된다. 그런 가운데 나더러 좀 전화를 하고 뭐라 일러달라는데, 종일 마음이 어려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엄마와 통화를 할까 하다가도 늘 하나마나 한 소리에 먼저 지치는 것 같아서 망설였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 한 사람을 곁에 둔다는 것은 저의 모든 어려움만큼 내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이때 오늘 말씀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하라 하신다. 이에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것은 섣불리 내가 나서서 될 일이 아니라는 데서 주의하게 한다(롬 12: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하여 오늘 말씀은 이를 영적예배로 승화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는 내가 더는 내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목요일에 오기로 한 아이의 근황을 들었다. 저들은 어떤 생각으로 홈스쿨링을 한다고 자처한 것일까? 이런저런 일을 보면서 부모들의 생각이나 결정이 너무 함부로 이뤄지는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있어서 맡기시는 일일 텐데, 모처럼 저학년 아이라 나는 벌써부터 마음이 답답하다. 또한 어느 정도까지 아이와 깊이 있는 시간을 쌓아갈 수 있을지 마음이 앞서 어렵기도 하다. 먼저 우리 안에 주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한 사람을 마주한다는 일은 온 천하를 상대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일이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그런 가운데서 친구 내외가 앞서 저 모녀를 돌보는 일에 수고하였다. 더욱이 친구는 말씀을 더욱 바로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성경공부를 한 번 더 한다면서 교회에서 하는 일에 새로이 신청을 한 것 같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는 일은 주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고로 주를 사랑하는 일은 한 영혼을 사랑하는 데서 증거가 된다. 이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주의 뜻을 분별하려 하는 마음으로 집중하게 되는 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4-5).” 곧 내가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이리저리 생각이 어지러운 것은 그 때문이다.
그저 그러려니 할 수 없는 상대를 놓고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6-8).” 이에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가능해진다. 누구에게 전화를 좀 하라며 누가 부탁을 할 때 나는 저가 앞서 행하고 있는 것들을 듣고 주의 뜻을 살핀다.
보면 모두가 다 아프다. 어디가 어렵다. 이를 인정하는 사람이 있고 이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는데, 한사코 자신은 괜찮다고 하는 사람으로는 아무 것도 행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린 제사장적인 사명을 가지고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사 61:6).” 이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직분이다. 주의 영광을 위해 아이를 맡아서 가르친다. 아이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며 권면한다. 그런데 저들은 ‘아프다.’ 우린 모두 ‘상한 심령’으로 주의 긍휼하심을 바란다.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신 상황 속에서 주의 마음으로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일이겠다. 그렇게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오늘 이와 같은 씨름이 제사장적인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때에 우리의 일은 성령으로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이는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 곧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10-11).” 서로를 사랑함은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여서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2-13).”
나는 친구 내외가 행하고 있는 일을 두고 그리 생각하였다. 내 일처럼 나서서 돌아보고 달려가고 같이 하는 저들의 수고가 있어서 오늘 이 모든 일을 사명감으로 할 수 있다. 이때 우리의 일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담대하여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 속으로 화가 또 원망이 일어나는데도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5).” 이것으로 우리의 가는 길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하여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16).”
주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17-18).” 곧 우리의 실천 반경이 그려지는 것 같다. 행할 수 있는 범위가 무궁해진다. 주가 함께 하실 때는 가능하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2-14).”
이 모든 여정이 주의 길을 가는 것이겠으니, 나는 어제 망설이던 일을 오늘은 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다. 아이엄마와 통화를 좀 해야 하고 아이를 있는 그대로 좀 놓아두는 일과 자기 일에서 열심을 다하기를 권해야 한다. 그러할 때 무슨 말을 어찌할 수 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한 영혼을 사랑한다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다. 내가 하려고 하는 여러 생각을 멈추는 것, 그리고 주가 인도하시는데로 따르는 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나는 말씀 앞서 선다. 조현이나 ADHD를 상대하는 일은 두렵고도 피곤한 일이다.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인 아이를 마주하거나 지나치게 의기소침하고 무기력한 이의 침울한 영혼을 상대하는 일은 벽을 보고 말하는 것 같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 세상을 사랑하고 주의 사랑을 거절하는 데서 오는 일이었으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가끔은 내가 뭐라고 마음을 다친 이를 돌볼 수 있겠나? 하는 의문을 가지고 주 앞에 선다. 마치 일부러 그런 일을 자처하는 것도 아닌데 보면 늘 ‘그런’ 사람만 붙이시는 의미를 모르겠다. 이 일은 좋은 결과가 없다. 대부분이 중간에 흐지부지하다 만다. 내가 여태 뭐한 것인가 싶다. 그런데 또 다시 새로운 사람을 곁에 두심은 그 남은 일에 대하여는 주가 행하실 것임을 믿는다. 곧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어쩌면 나는 끊임없이 주께 맡기는 훈련 중이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오늘도 시편으로 주께 기도하는 일은,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시 2:7-8).
‘내게 구하라’ 하신 말씀만을 붙들고, ‘너는 내 아들이라’ 하심을 의지하며,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그저 행할 뿐이다. 내게는 성공도 실패도 중요하지 않다. 다만 지금은 내 곁에 두셨으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요일 3:18-20).” 이에,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