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전봉석 2024. 5. 4. 04:38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골 4:2-4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2

 

 

기도는 무형의 것으로 신뢰하고 인내함으로 무던할 수 있다. 응답은 주의 것이고 구함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기도에 항상 힘쓰는 것’은 ‘흔들림 없이 끈기 있게 지속적이고 열심으로’ 주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다. 기도는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다. 우리가 주를 생각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시간과 비례한다. 이는 호흡과 같아서 아뢰고 또 구할 때 주의 뜻을 알기 원한다.

 

기도는 하나님이 주실 가장 좋은 의의 선물을 알게 하고,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세상은 알지 못하는 성령을 받게 한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기도는 하늘의 능력의 통로가 되고,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어려운 순간에 시험에 들지 않게 한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기도는 위기를 막아낸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눅 6:12, 22:40).”

 

나는 늘 나의 필요를 구하는 것 같으나 기도하면서 주의 뜻을 바란다. 누구를 생각하다 저를 더는 어쩔 수 없어 주께 아뢰며 맡긴다. 내가 제일 어려워서 나를 어쩌지 못하다 주께 나를 내려놓는다. 고로 기도는 정신과 영혼을 전심으로 하나가 되게 한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이때 주의 간절함은 두려움이었는데 그것은 죽음의 순간, 곧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있을 단절 때문이셨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하지 못하심으로 죽음의 순간 성령과의 분리를 성자는 알고 계셨다.

 

기도는 이생과 내생의 연결고리이고 신령한 은혜의 자리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딤전 4:7-9).” 누구보다 나는 이 기도에 빚진 자인 것을 인정한다. 나의 어머니와 누이와 또한 누군가의 기도로 오늘의 나로 주 앞에 설 수 있었다는 것을 안다.

 

자주 회상하듯이 어느 날 우연처럼 하나님은 여수 애양원교회의 소경 장로님들의 새벽기도회 자리에서 내 이름 석 자가 불려지는 그 순간에… 고작 중3 아이가 그 시간에 혼자 예배당 뒷자리에 누워 밤새 달려온 열차의 피로로 잠들려하다 듣게 하셨던 순간은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거짓말 같은 아니 믿기지 않는, 온 우주의 모든 시간과 우연과 사소한 마음들이 한데 모여 그 시간 그 자리에서 내 이름이 불리고 또렷하게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증명하셨던 하나님의 역사가 내게는 있다.

 

또한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다 몇날 며칠을 설득하고 찾아오고 만나고 다시 또 했던 말 또 하고 하면서 급기야 자기 돈을 들여 학비를 내고 신학교 학부를 편입하여 공부하게 하였던 일도… 또한 전혀 엉뚱하게, 어떤 이는 친정엄마 환갑 후 남은 돈으로 외국여행이나 갔다 올까 하던 돈을 털어서 나의 신대원 한 학기 등록금으로 보내오고, 또 누군가는 어느 날 말씀에 감동하여 어찌하여 모아두었던 것을 한꺼번에 헌금으로 드린 것을 돌고 돌아서 나의 또 학기 등록금이 되게도 하시고, 또 하나의 경우는 우연히 어디서 소식을 듣고는 뒤늦게 목사가 되려 신대원을 한다는 소식에 축하하다 자신이 한 학기 등록금을 내면 안 되겠나? 하고 부탁하듯 전하여준 것도 그렇고….

 

모두가 기도의 한 대목으로 오늘의 나를 만드는 데 있어 내가 빚진 자들이다. 실질적으로 나는 늘 주의 이와 같은 신비와 능력을 경험하면서도 완고하여, 신학교 학부를 마치고 신대원 한 학기를 하다 이 길을 뛰쳐나가 10년의 세월을 훌쩍 허비하고, 다시 또 붙들려와 이렇듯 6학기 내내 심지어는 누군지도 모르는 이의 손길을 통해 전하지는 등록금으로 한 번도 주저하거나 그만둘 핑계를 대지 못하게 하셨다. 부끄럽지만 그렇게도 주가 여러 사랑의 손길로 붙드시고 세우셨는데도 나는 신대원 3년 내내 그만둘 궁리만 하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신기하지? 일 년이 지나고 3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글방에서 예배가 드려졌고, 글방이 교회가 되었다. 이를 두고 내가 기도하며 준비하고 작정한 것이라면 나도 뭐라 할 말이 있을 텐데… 그야말로 어쩌다 우연처럼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었다. 내친걸음으로 그해에 교회로 등록하고 목사가 되기 전에 개척을 한 셈이었고, 졸업과 동시에 비록 두 번의 낙방이 있기는 했으나 지체 없이 목사고시와 안수를 받아 동기들 가운데 가장 먼저 목사가 되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영광도 누렸다. 하나님은 나로 자랑할 게 없게 하셨다. 우연은 하나님이 가장한 완벽한 온 우주의 섭리다. 모든 게 다 우연처럼, 어쩌다, 나를 오늘에 세우시기까지 계속되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나는 정말 하는 게 없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어쩌면 나로서는 이제서 안다. 기도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열여덟 어린 소녀가 지적장애와 조현초기를 겪으며 우울을 건너고 있을 때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말을 걸어도 눈을 마주친 적이 없고 시원하게 어떤 대답을 들은 적이 없다. 그저 어르고 달래다 내 속이 터져 전화를 끊고 나면 주여, 하고 긴 한숨만 나올 뿐이고… 또 우리 아이는 같이 점심을 먹고 회사의 누구 때문에 예민해져 횡설수설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 나는 저의 예민함에 대처할 능력이 없어 주의 이름을 부를 뿐이다.

 

기도는 나의 쉼터이면서 아무도 몰래 숨는 공간이다. 오늘 바울은 공개적으로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3-4).” 곧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는 데 있어, 오늘 우리의 역할이 만세로부터 만세 전에 감추어졌던 비밀로 이 말씀을 설명하고 증거 하는 데 있어 우리의 이해와 상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군 늘 기껏 설명을 듣다 왜 성경을 이렇게 어렵게 썼냐는 둥, 해석에 문제가 있다는 둥 엉뚱한 소리로 정작 듣고 깨달아야 할 것은 뒷전이다.

 

또 나름은 마음을 쓰고 애타는 심정으로 위하여 권면하고 또 설명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대로 좋아요!’ 하는 데서 나는 좌절한다. 솔직히 말하면 욕이 틔어 나올 지경이다. 그러든가 말든가 하고 외면하면 그만일 것을 손톱 끝 거스러미가 아프게 파고 든 것처럼 거슬리고 신경 쓰여 기도 말고는 할 게 없다. 그리하여,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2-13).”

 

하여,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그렇듯 나는 다만 구할 뿐, 정작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면서 나의 기도는 쉼이고 내 편에게 하염없이 풀어놓는 고백이다. 주님, 하고 이어지는 나의 기도는 때로 유치하고 한심할 정도로 별의 별 걸 다 이르고 고하고 심통부리고 칭얼거리는 것이어서, 그럼에도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그러므로 내가 좀 살 것 같다. 숨통이 트인다. 설령 주가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다 해도 주가 가장 선히 이루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 아들이 세무사 시험을 치르는데 나는 일체 모르는 척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가만히 주께 고할 뿐, 기도란 숨겨둔 무기 같아서 아무도 내 품에 엄청난 폭탄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 화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내가 고꾸라지고 결국 두 손 들어봐서 안다. 기도는 그 힘으로 주께 나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나의 기도는 버르장머리도 없어서 누웠다가 또는 길을 가다가 혼자 궁싯거리듯 또는 생각으로 똥 싸면서 아무 때나… 주님, 하고 늘어놓기 시작하면 할 말 못할 말이 없다. 가만히 머리를 짚고 쓰라린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은 그래도 양반이다. 아무런 격식도 거리낌도 없이, 마치 아이가 엄마에게 안겨 가장 평안을 느끼듯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 131:1-2).

 

누가 이런 걸 기도라 하겠나 싶게, 어쩔 땐 무슨 일을 떠올리다 주께 죄송하고 부끄러워서… 또는 어떤 이의 어떤 일로 뭐라 할 말은 없고 속은 상하여 흐느껴 울면서 아무 말도 없이. 주님은 그래도 된다 하셨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잠들기 전 돌아누워 주님, 하고 뭐라 아뢰다 늘 잠이 든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내게 가장 쉬운 게 기도라고 하면 이상한 것일까? 수다 같고, 넋두리 같고, 가장 편하고 아무렇지 않게… 언제 무얼 구하였는지도 모르면서 했던 말 또 하고 주께 아뢸 때,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나는 욥의 이 표현이 가장 무거우면서도 든든하다. 마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말씀이 가장 든든하고 신나고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과 같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내가 뭘 더? 주가 나를 죽여 희망이 없는데도 아뢰겠다는데?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들어주시거나 말거나, 분명한 사실은 주는 선하시다는 사실은 요지부동 변함이 없는 것이어서,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86:5, 119:68).

 

하여,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대상 16:34).”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25:6, 100:5).

 

그럼 뭐!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55:1-2, 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