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살전 2:11-12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57:7-8
서로의 기쁨이 되어,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이와 같은 자랑이 되고 주의 영광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복되다.
이를 위하여 고난을 무릅쓰고 주의 복음을 전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여 사랑과 희생으로 복음이 알려지기만을 구한다. 서로를 하나님 앞에 세워가는 데 힘쓴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말씀은 결코 헛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가령 자식의 일에 대해서도 때론 답답하고 마음을 졸이나 말씀으로 전하여 성령으로 저의 마음과 생각을 주관하시기를 구한다. 교회 안에서 믿음으로 양육하는 일에서도 여러 행사나 직간접적인 어떤 조언이 필요할 때도 나는 가급적 가만히 지켜만 볼 뿐 말씀으로만 전하려고 한다. 어떤 일에 대하여 마음이 앞설 때 이를 맞추어 무얼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더 어렵다. 뭐라 말 한 마디라도 참견하는 게 쉽지 속은 끓는데 말을 않고 가만히 두고보는 일은 전적으로 주께 맡기고 또 맡김으로 나로 하여금 인내하게 한다. 그때에 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하여,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그러할 때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가까이는 친구와의 성경공부에서도 어떤 일상의 이런저런 일을 성경의 관점으로 신앙 안에서 대화하기를 유도한다. 예전처럼 객쩍은 소리로나 나의 사소한 이야기로는 삼가 주의 일을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 주의한다. 가령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형교회 가운데 하나를 다니는 친구라, 물론 본 교회에서 분교 같이 친구 사는 지역에 학교를 가지고 있고 그 학교에서 모이는 교회이기는 하나, 종종 큰 교회의 일면을 의아해하며 묻고는 한다.
그때마다 나는 주의하는 것이 그에 따른 옳고 그름이 나의 말로 정의될까하여, 거기까지는 나도 모른다는 말로 실제 답을 피하기도 한다. 다만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5).” 말씀으로 말씀에 더욱 갈망하기를 권한다. 한데 이번에도 어디 선교여행을 가는 데 있어 아내와 아이까지 해서 세 사람이 자비로 참여하는 것이라 얼추 몇 백 이상의 돈이 드는 일이었다. 이런저런 행사나 그러한 일을 추진하고 성도들의 참여로 여러 프로그램이 진행될 수 있는 게 큰 교회의 다양한 저력이긴 하겠으나… 나는 갈 수 있으면 가고, 할 수 있으면 다 하고, 참여할 수 있는 데서 모두 섬기는 마음으로 그리하라고 말해주었다.
어떻게 할까? 하고 그에 따른 이런저런 사정을 말할 때 나의 대답은 늘 한결 같아서 교회가 하는 일에 그 중심에 서고 뒤로 물러나지 않도록 권한다. 이는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그리 주관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19-20).”
이에 우리는 서로가 하나가 된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1-12).” 더러는 큰 교회라 이런저런 우려나 어떤 행사위주의 일을 경계하지 않을 수는 없고, 사람과 사람 사이로 그 틈을 노려 일부러 더 큰 교회로만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가령 이번에 근처 모 교회에서 수십 명의 성도들이 그 교회의 내분으로 인해 우르르 몰려온 것 같다. 그 일로 덩달아 교회가 출렁거리는 모양이었다.
말씀을 사모하는 데 있어 그 순수함이 우선하기를, 그렇지 않을 때 “깨달은즉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느 6:12).” 교회 안을 어지럽히는 무리가 있어 자칫 서로의 신앙을 앗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성도가 그만큼 늘었으니 좋기도 한데 미묘한 갈등도 생기는 모양이라, 이런저런 일을 두고 친구가 물을 때 나는 보이는 그 현상으로가 아니라 말씀으로 중심을 잡고 분명한 기준을 삼을 것을 당부하였다. 곧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저들은 교회 밖에 아니라 안에 있다.
점점 현실 교회가 대형교회로, 저마다 큰 교회로 몰려드는 성도들(?)로 수평이동이 잦은데, 문제는 그리 우르르 왔던 이들이 어떤 분파를 일으키다 또한 우르르 몰려간다는 데 있다. 혹은 이리 피하고 저리 하듯 신앙의 뿌리내릴 곳을 찾아오는, 다른 교회에서 상처 입은 성도가 있는데 저들이 안타까운 것은 자꾸만 그렇게 사람에게 상처를 입거나 위로를 받기 원한다는 것이다. 또는 상대적으로 말씀이 좋아서(?) 말씀만 듣고자 왔다는 이들도 섞이지 못하여 서로에게 거치는 일이 잦아진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오늘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의 일면을 우려하는 데 있어,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3-4).” 이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서로가 하나되어야 하는데 이를 훼방하듯 사람을 찾아 사람을 따라 오는 무리들이 많은 법이어서, 하긴 큰 교회들이 구비하고 있는 여러 시설이나 혜택이 또한 감사한 일이기는 하나 목표가 되기도 하다.
누구는 말하길 현대의 모든 장사가 그렇듯 주차문제와 문화적 교류가 우선하는 일처럼 교회에서도 이를 찾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하고, 그래서들 적은 교회나 개척교회를 등지고 큰 교회를 선호하는 이유 중 그 접근의 편리성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이유를 전제로 교회를 찾거나 옮기거나 한다면 이는 곧 말썽이 생길 것은 당연하다. 당장 친구네 교회만 해도 본교회가 재단인 학교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행사라 교회가 끝나고 그 뒤처리가 매주일 되풀이 되는 모양이다. 그럴 때 남아서 하는 사람만 하고 그저 편리함과 유용함만을 추구하다 가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사소한 일 같으나 중요한 이유가 되어 교회를 더 다니네 마네 하는 것으로까지 일어질 때 환멸이 든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 9:17-18).”
오늘 바울은 교회 안에서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살전 2:5-6).” 하는 부분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8).” 어떤 마음과 중심으로 그 사역을 감당하는지를 알게 한다. 심지어는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9).”
실제 저는 천막 짓는 일도 하면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이 부담이 될까 주의하였다. 교회가 더는 교회로의 말씀 전하는 일로만은 생존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원하는 어떤 문화시설도 필요하고, 어떤 영적허기를 달랠 수 있는 다양한 구성도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물색하여 유명인이면서 간증이 유용할 것 같은 이들을 섭외하거나 어디 선교지를 후원하면서 때가 되면 마치 그곳으로의 선교여행을 알선하기도 한다. 실제 사역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행사나 일의 진행을 맡은 간사로 일하는 동기들의 말을 들으면 이게 일종에 사업 같다. 물론 주의 일을 위한 교회 일이라는 명분으로 여러 문화사업도 같이 병행하는 것이어서 교회 일이기보다 어디 재단의 문화행사 같아서 회의를 느끼는 경우도 더러 있는가 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뭐라 말하거나 거들지 않으려 듣기만 한다. 잘 모르면서 누구의 말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일로 뭐라 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해서다. 다만 오늘 바울의 증언과 같이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10).” 하여 경계함은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11-12).”
어쨌든 사람들의 모임이라, 여럿이 되고 다양한 분야로 나뉘면 이런저런 별의 별 사람이 다 자기 의견을 말하는 법이어서,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19-20).” 이에 더욱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13).” 이를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다.
어쨌든 큰 교회가 더 커지고, 사람들이 많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으나… 예수님 때에도 그런 가운데 제자가 있었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있었고, 무리 지어 따르는 자들도 있었다. 나는 친구와의 성경공부 중에 마치 실전의 이런저런 일에 대하여 조심스러우나 그때의 모습도 그러했음을 상기시키며 말씀 곁으로, 예수 곁에서 교회를 섬기며 주의 일에 참여하기를. 그러할 때 주의하고 또는 관심의 정도가 엉뚱한 데 있지 않기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말마따나 어디 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한 무리의 성도들(?)은 그 교단의 특성상 성령체험을 강조하며 말씀으로 정적인 면을 들쑤시며 이런저런 행사나 어떤 역사를 요구하면서 서로가 부대끼고는 하는 것 같은데… 어쩌겠는가?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왕상 8:39).” 나는 그런 일이나 어떤 말들에 대해 주로 듣기만 하고 옳고 그름을 물을 때 대답하기를 주의할 뿐이다. 다만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단 2:22).” 하여 빛 가운데 거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 2:7-8).”
이에,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 57:1).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7-8).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