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전봉석 2024. 6. 1. 04:5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히 6:1-2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시 83:18

 

 

은혜와 죄가 비례하고, 죄와 기도가 비례한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면 알수록 기도는 간절하여지고, 이에 따른 간절한 기도는 절실히 은혜를 바란다. 누가 말하길 기도할 게 없어서 새벽예배를 그만할까, 생각한다고 하였다. 저의 큰 미궁은 기도가 안 되고 할 게 없다는 거였다. 저의 말은 가볍지 않았고 가볍지 않은 말에서는 눅눅하게 자기애가 묻어났다. 자신을 자신의 것이라 느낄 때 기도는 깊이 또한 멀리 나아가지 못한다. 구덩이에 빠졌을 때 그 깊이로 더 큰 소리를 친다.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한 크게 외칠 게 없다.

 

나는 저에게 간절한 것을 물었다. 그리고 저의 적당함이 저로 주를 찾기에 간절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했다. 가령 두 아들 가운데 하나가 암에 걸려 죽게 생겼다. 그렇다면 얼마가 들든지, 뭐라도 해보지 않겠나? 그저 그러려니 하고 자신이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놓아두겠나? 하고 저에게 물었다. 안 믿는 아들의 영혼을 위해 어찌 간절하지 못한 것인지, 그저 적당하다고 느끼는 한 우리의 심령은 가난함을 모른다. 가난하지 않은 영혼으로는 애통해하지 않는다. 이때 미가 선지자의 증언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발을 저는 자는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들이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다스리리라 하셨나니(미 4:6-7).”

 

곧 저들은 남은 자들로 그 실제의 삶이 삐꺽거리는 불구다. 저는 다리로 쫓겨났다. 환난 가운데 놓였다. 그러므로 저들로서는 도움이 절박하다. 아프면 악, 소리 나는 법이고 체면이고 뭐고 살려주세요, 하는 소리가 갈라진 목구멍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미가는 이어서 말하길,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가운데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 야곱의 남은 자는 여러 나라 가운데와 많은 백성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들 중의 사자 같고 양 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그가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5:7-8).”

 

살면서 자신의 삶에서 겪는 어려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복이다. 나는 이를 설명하는 데 공들였고 결국은 자신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한 이 말은 공허할 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 6:1-2).” 나는 오늘 본문을 그리 다시 읽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버려야 할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는 무엇일까? 믿음으로 구원 받고 필요에 따라 소비 형태로 주를 찾는 고객의 위치에서 하는 신앙생활이다. 교회는 점점 더 많은 성도들을 유치하기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편의시설로 가득하고, 그런 곳으로 사람들은 몰린다. 마치 넓은 주차장의 유무에 따라 교인들의 수가 갈린다는 말처럼 그저 단순히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리스도의 도를 찾는, 어린아이와 같은 유아적 요구를 따라 교회를 다니고 신앙을 유지하려 한다. 이와 같은 초등학문으로 전학하여,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갈 4:9).”

 

곧,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골 2:20).”

 

그저 형식적으로 사교적인 친절한 타인의 관계에서는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직업적인 의사는 지나간 환자의 병명을 붙들고 울지 않는다. 또 다른 환자가 밀려 있을 뿐이고, 저들은 수입원일 따름이다. 한 영혼을 두고 씨름한다는 것, 이에 저의 절박함이 나의 간절함이 되어 서로가 하나가 되는 일은 또 다른 관계 설정의 친밀함이 필요하다. 이는 자신을 자신의 것으로 두고 보는 일에서도 갈린다. 내가 내 것일 때 주는 단지 도우시면 된다. 주가 주인이실 때는 나로서 감당할 수 없어 주께 아뢰고 또 고할 게 너무 많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이에 우리의 절박함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더는 내가 내 것이 아닐 때, 나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할 때 결판이 난다. 이 또한 요즘은 자기 스스로가 결정할 일이 되어서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나름의 낭만으로 이를 삼킨다. 그러나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곧 우리의 믿음이란 그저 그러려니 하는 정도의 감정이 아니라, 그것 외에 다른 길이 없는 막다른 길, 막장에서의 길 내기와 같다. 막장은 끝이 아니라 비로 길을 내야 하는 시작이다. 하여,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 3:3-4).”

 

단순히 기도할 게 없다는 누구의 말이 그저 가벼운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 저의 무거운 마음 때문이었다. 정작 저는 이미 기도 중이고, 그것이 기도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새벽예배를 나갔다가 직장으로 가고, 직장을 다녀와서도 성경공부를 위해 숙제(?)를 하다 자는 저의 삶이 그 자체로 주를 바람이었고, 그의 간절함이었다. 이를 저는 모를 뿐이어서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0-12).”

 

이에 우리의 영적 진보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성관 없는 허공을 채워가는 일이고, 길이 끝난 막장에서 길을 내고 나아가는 일이다. 이에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히 6:3).” 하고 이 또한 주의 은혜 가운데서만 그리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곧 나의 설명과 강조로 이뤄질 게 아니다. 다만 나는 저의 입에서 ‘그래서 새벽기도를 그만 다닐까?’ 한다는 말에 잠시 웃음을 잃고 신중하였다. 왜냐하면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4-6).”

 

신기할 정도로 완강하고 완고한 이들은 대체로 예전에 다녔었다. 나름 자신도 믿었다고 한다. 교회를 다녔었다는 것을 마치 새로운 길을 찾았다는 듯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는 데 덧붙인다. 하여 저들은 누구보다 돌이키기 어렵고 스스로 아는 자신의 경험에 발목을 잡힌다. 아, 그 삶이란…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7-8).” 이에 우리의 선택은 곧이곧대로 자유의지로 자신의 몫이다. 부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9).”

 

확신이 없이 가는 길은 오락가락 하게 되고, 갈팡질팡 하는 사이 세월은 흘러 어느 덧 노년이 되고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11-12).”

 

오늘 이 말씀으로 나는 어제 누구의 일로 같이 대화하다 저의 안타까움을 잠결에도, 새벽에 일어나 운전하고 나오면서도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우리가 복이 있는 것은 주의 약속이 변개가 없으심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13-15).”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일 수 있는 것은 저의 행위나 그 삶의 결실로서가 아니라 먼저 찾으시고 참으시고 그리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였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 4:6).” 그러므로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 4:2).”

 

하여,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곧,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19-20).”

 

이와 같은 말씀으로 오늘 내 안에 나로 하여금 주 없이 살 수 없는 나의 간절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 하여 나는 나의 약한 육신으로, 또는 마음으로 주 앞에 엎드린다. 나의 간절함은 나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 이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와 같이 나의 약한 데서 나온다는 말씀으로 나는 은혜 받은 자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시 83:1).

 

나를 둘러싼 여러 원수들 가운데서,

 

그들이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

(5).

 

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이여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

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불길 같이

주의 광풍으로 그들을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소서

(13-15).

 

이에,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