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전봉석 2024. 6. 14. 04:40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 1:23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시 96:9

 

 

부족하고 연약하여 쓸모없는 자라도 들어 사용하시는 주께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하고 자신을 밝힌다. 앞에 덧붙일 말이 없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1, 2).” 하고 베드로는 서신을 쓴다.

 

자신의 신분을 안다. 그에 따른 소속을 분명히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외에 다른 말이 필요치 않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았다는 의미로 자신을 보낸 자가 누구신지 바로 밝힌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열심이었으나 흠도 많고 탈도 많던 인물이다. 그만큼 또 예수를 가까이서 섬기었다. 그런 저를 먼저 부르신 이도 예수시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18-20).”

 

오늘 우리로 이와 같이 주를 따르며 섬기게 하신 이도, 먼저 나를 찾아오셨고 부르셨고 이내 붙드셨다. 이를 저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전하기 위해 편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1-2).” 그럼 ‘흩어진 나그네’는 누구인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성경은 모든 인생을 향한 글이 아니다. 그 수신은 한정되었다. 흔히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 하지만 우리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신’ 사람들을 지칭한다. 곧 우리가 사는 인생에서 우린 다만 나그네로 지나가는 것뿐이다. 나그네란 거기에 있으나 거기에 속한 자들은 아니다. 현재는 여기에 머무나 실은 곧 지나가는 사람들이다. 이 땅에 뿌리 내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과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나그네이다. 여곱은 그리 자신을 소개하였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창 47:9-10).”

 

시인은 고백한다.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시 119:19).

 

우리의 신앙고백은 한결 같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엄연히 우린 본향을 찾아가는 자들이다. 그와 같이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5-16).”

 

우리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늘에 우리를 위한 성을 예비하셨다. 이와 같은 본향 의식이 없다면 우리가 성도로서 어찌 이 세상을 다 마칠 수 있을까? 예전에 즐기던 것들을 멀리하면서 그때에 같이하던 친구와 좋아하던 것들을 털어버리고 천성을 향해 나아가면서, 더러는 외롭고 지친다. 이를 베드로도 잘 알고 있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우린 베드로와 같이 예수를 직접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이 더 크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때론 한 날의 길이가 너무 길다. 사느라 드는 부대비용이 너무 과하다. 물가가 오른 것을 체감하듯 영혼의 가는 길이 너무 팍팍하다. 더러는 즐거운 일을 찾고 좋은 자리를 구한다. ‘같은 값이면’ 괜찮은 교회에서 즐거운 사람들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재미있게 신앙생활을 하기 원한다. 그러느라 저마다의 선택으로 여러 곳을 기웃거리듯 찾아다니기도 한다. 어느 유명인을 찾듯이 목사를 수소문하기도 한다. 이를 뭐라 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 2:13).”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부르심에 대하여 우린 간혹 이해하기 어렵다. 자신이 그리 결정하고 선택하여 어렵게, 누구는 이를 위해 이사를 했고 아이를 그 교회가 운영하는 대안학교로 보내기까지 하면서 감수하였다. 그러니 저들에게 있어 부르심은 실제 자신들이 주를 부른 것 같이 마음은 삐꺽거린다. 자원하여 누군 교사가 되었고 누구는 어느 부서에서 부장이 되었다. 내가 봐도 저들의 열심은 귀하다. 그런데 간혹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하는 마음이 고개를 든다. 무슨 일로 누구와 의견이 다를 때 저들은 서운함을 드러내고 급기야 교회를 옮길 생각도 한다.

 

단편적인 이야기로만 뭐라 하긴 어렵지만 일련의 상황을 들으면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하신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기도 하였다. 뭐라 조언할 수 없다. 들어주기만 하고 나는 입을 다문다. 뭐라 한들, 저러는 경우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내게 묻는 게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소린데 거기에 내가 옳고 그름을 논하며 뭐라 이른들… 스스로의 판단으로 길을 떠나는 나그네는 스스로의 결정으로 우회하거나 돌이킨다. 우리의 결정은 택함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저들은 알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훗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의외로 그 날에 그런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2-23).”

 

나는 가끔 이 말씀을 접할 때면 두렵다. 내 안에 내 스스로 자신하고 자부하는 것들이 훗날에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실까 하여서 말이다. 저마다의 사명과 그 수고와 노력으로 자부하는 이들을 상대할 때 나는 더러 내가 두렵다. 어떤 상황을 설명하고 상대의 부당함을 말하고, 자신들이 겪은 일로 격앙되어 심지어는 교회를 싸잡아 뭐라 할 때면 듣는 일도 어렵다. 말을 바꾸려하나 저는 그런 말이 하고 싶었다. 조심스레 어쩌면 좋은가? 하고 묻고자 전화한 것도 아니다. 그런 느낌이라 뭐라 나무라거나 교회를 두둔했다가 총구가 졸지에 내게로 향할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말을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하지만 공통적으로 저들은 말할 입은 있어도 들을 귀가 없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이를 오늘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이에,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7).”

 

유추해보면 나그네의 삶이란 그리 즐겁고 녹록한 게 아니다. 고달프고 때론 힘에 겨워 포기하고 싶은 길 위에 산다. 이에 우리는 시편을 묵상하며 시편으로 산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5).

 

하여,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63:3).

 

정녕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중요한가? 지금 죽는다 해도 주의 인자하심으로 마땅한가? 그런 시편의 길에서 교회의 어떤 일로 누구와의 무슨 관계로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했는데…’ 하는 따위로 누구를 탓하거나 서운해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그러할 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비록 우리의 가는 길이 힘에 겹고 더디고 서럽고 외롭다 해도,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흐름을 좇는 게 아니다. 우린 묵묵히 길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나그네이다. ‘흐름을 읽으면 교회가 살아난다’는 기치를 내걸고 쓴 책장을 나는 아직도 책상 위에 두고 표지를 넘기지 못하고 있다. 현대에 맞는 트렌드, 생존전략과 같은 단어들이 너무 무가치하게 다가온다. 어떤 의미로 그런 표현을 썼는지, 책장을 넘겨야 알 텐데… 나는 누가 준 책을 여전히 책상 위에 놓고는 어제그제 겉표지만 보고 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내 안의 여러 생각들이 잠잠하여지는 것처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6).” 그런데 너무 앞서서 예방주사에 보험에 어떤 살 궁리가 돼 있어, 누구 말마따나 이런 말씀이 와 닿지가 않는다면!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13).” 하시는 말씀 앞에서와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16).” 하실 때에 두려움이 인다.

 

이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이는,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23).”

 

그러므로 오늘 시편으로 이를 듣는다면,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96:9).

 

곧,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6).

 

이에,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