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출 24:12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 53:2-3
하나님과의 언약이 체결되는 과정이다. 모세를 부르시고 율례를 반포하게 하신다. 이에 백성들이 맹세하고, 낭독하여 서약하고, 이를 기념한다. 여기서 언약을 위해 뿌린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예표한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성찬예식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오늘 우리가 주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은혜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 함부로 나아갈 수 없었고, 그 또한 엄격하게 제한되어 아론과 그 두 아들과 70인의 장로가 모세와 함께 올랐으나 누구도 허락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다. 이는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은 그러하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이러한 장벽을 허셨으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5-18).”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오늘 우리의 은혜는 참으로 경이롭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이 놀라운 은혜에 얼마나 우리는 감격하며 살고 있는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더욱이 오늘 본문을 읽을 때면 이와 같이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신앙의 깊이는 은혜의 정도이고, 이 은혜를 누리는 차이는 찬양과 경배의 자리로도 다르다.
오늘 본문에서도 저 수많은 백성들 가운데 산에 오른 자는 모세를 위시하여 아론과 두 아들과 70인으로 국한되고, 저들이 가까이 갈 수 있는 자리 역시 각기 달랐다. 이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기도하실 때도 가장 가까이 세 제자가 동행하였고, 나머지 여덟은 산 아래에 있었던 것을 연상하게 한다(마 26:36-46). 그러므로 신앙의 깊이가 다른 것은 경배의 차이에서 나타난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시 95:6-7).
그러므로 우리는 저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하는 말씀으로도 각각 서로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죄가 깊은 곳에 은혜도 깊다고 자신의 죄로 몸부림치는 만큼 주의 은혜는 사무치고 그의 은총은 넘쳐난다. 이는 다시 말해 순종을 통해서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143:10).
이는 이사야서 18장을 준비하면서, 도움을 청하러 온 구스 사람들을 권면하는 대목에서도 느껴졌다.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이르기를 민첩한 사절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로 가라 하는도다(사 18:1-2).” 여기서 ‘슬프다’하는 표현으로 연민의 심정을 내포하고 있는데, 구스가 곤경에 빠졌음을 알게 한다. 이럴 때 성경은 늘 손짓하시며,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하고 부르신다.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슥 2:10).” 곧 우리가 주 앞에 올 때 주는 반드시 그리하신다. 이사야는 그러할 때 두려워하지 말고 와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도록 외친다. 구스인은 ‘장대하고 준수하며 구리 빛 피부를 가졌다.’ 그러한 그들의 염려에 대해 더는 앗수르에 대항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선언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는 세상의 어떤 세력 앞에서도 두려워할 게 없다.
세상 권세 잡은 세력으로 대표되는 앗수르의 파멸은 예견되었다. 저들을 상대하려 동맹군을 결성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앗수르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계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거민, 지상에 사는 너희여 산들 위에 기치를 세우거든 너희는 보고 나팔을 불거든 너희는 들을지니라(사 18:3).” 하시는데, 이는 “추수하기 전에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맺혀 익어갈 때에 내가 낫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며 퍼진 가지를 찍어 버려서 산의 독수리들과 땅의 들짐승들에게 던져 주리니 산의 독수리들이 그것으로 여름을 지내며 땅의 들짐승들이 다 그것으로 겨울을 지내리라 하셨음이라(5-6).”
곧 앗수르는 세력을 확장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침공할 것이다(3). 이를 하나님은 침묵하시며 감찰하신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4).” 하나님의 침묵은 역사를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한 과정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파멸시키신다(6). 곧 ‘앗수르의 세력’이 넓어져 아무도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으나 그만큼 멸망도 심각하고 철저할 것이다. 마치 ‘산의 독수리와 들짐승들이 겨우 내내 먹을 만큼 앗수르 군대의 수가 많다’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유다를 찾아온 구스 사절단에게 하나님이 앗수르를 멸망시킬 것이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준다.
결국 여호와의 앞에 굴복하게 될 구스의 미래를 알려주신다. “그 때에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이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사 18:7).” 앗수르가 멸망함으로 구스인들이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 것이다. 구스인의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앗수르 왕 산헤립이 이끄는 18만 5천의 군사를 몰살시키심으로 앗수르의 위험에서 다윗의 집과 남쪽 나라들을 건져내셨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사 37:36).”
이는 히스기야 시절의 일로 “이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왕의 진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지휘관들을 멸하신지라 앗수르 왕이 낯이 뜨거워 그의 고국으로 돌아갔더니 그의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의 몸에서 난 자들이 거기서 칼로 죽였더라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주민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손과 모든 적국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사 사면으로 보호하시매 여러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와께 드리고 또 보물을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드린지라 이 후부터 히스기야가 모든 나라의 눈에 존귀하게 되었더라(대하 32:20-23).”
이상의 내용을 살피고, 이른 시간에 올라와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새삼스럽다. 나 자신이 주의 자녀인 것과 은혜의 시대를 사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감사는 받은 은혜에 따른 것이고, 은혜는 나의 허물과 죄로 주 앞에 애통해하는 정도이다. 이로써 말씀을 가슴에 새긴다는 말씀과 같이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 3:3).”
곧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6-9).”
그런 점에서 나의 일과가 복되다. 무엇을 하든지, 주의 말씀으로 나를 이끌어오는 것이 은혜라는 생각을 한다. 이번 주간은 공휴일이 많아서 아이는 3일 오전 조금 늦은 시간에 성경공부를 했으면 하고 성경을 보내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여기서 ‘실상을 말하노니’ 하실 때, 사실 자체만을 언급하심을 알게 하신다. 이는 바울의 서술에서도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 9:1).” 하였던 것과 같이 유대인들은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그 말씀을 믿지 않았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8:45).”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실상을 말씀하시는데, ‘보혜사’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을 얻기 전에는 오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은 예수의 구속 사역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며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며 그것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 오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의 실체,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게 하신다. 더불어 성령이 오셨을 때,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16:8).”
가령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이 마음에 찔려 죄에 대해 깨닫고,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이와 같은 마음이 성령이 주시는 마음이다. 나 자신이 죄인인 것과 내가 받은 은혜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임을 아는 것이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2).”
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사역이 아버지의 이름에 의존되었음을 고백하고, 이후에도 아버지께서 보전하실 것을 간구하신다. 보전은 보호다. 이를 위하여 예수께서 오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을 성령이 오셨다. 여기서 멸망의 자식은 결국 가룟인 유다와 같이 ‘엄연히 자신의 주관적 결정’에 따라 ‘멸망의 길을 걸어갔다.’ 유다는 자신의 독자적 의사에 따라 행동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시켰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 13:18).”
이는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41:9).
하는 시편을 인용하심으로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말미암아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하지 아니함은 내가 오랫동안 잠잠했기 때문이 아니냐 네 공의를 내가 보이리라 네가 행한 일이 네게 무익하니라(사 57:11-12).” 결국 말씀이 오셨고,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도 이를 듣지 않고 의지적으로 거부할 때는 어쩔 수 없다.
나의 묵상과 설교원고와 아이의 성경구절을 받아 이를 준비하고, 전하여야 할 말씀을 되새길 때 성령께서 내 안에 지혜를 더하심을 확신한다. 이것으로도 나의 은혜가 경이로울 따름이라,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53:1).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심으로 말씀을 말씀으로 내 안에 모시고 살 수 있는 것이 복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 7:3).” 하심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