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네가 여호와를 위하여 만들 향은 거룩한 것이니 너희를 위하여는 그 방법대로 만들지 말라
출 30:37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시 59:16
뿔과 분향단을 가까이 두라고 하신다. 곧 한 덩어리로 만들게 하신다. “너는 분향할 제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길이가 한 규빗, 너비가 한 규빗으로 네모가 반듯하게 하고 높이는 두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이어지게 하고(1-2).” 여기서 뿔은 하나님의 힘과 능력과 보호하심을 상징한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2).
이에,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112:9).
이때에 분향단은 향을 태우는 곳으로 성도의 기도를 의미하고 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와 하나님의 능력은 가까이 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부으신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할 수 없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하실 때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11).”
하시는데, 여기서 좋은 것이란 성령을 일컬으심이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오늘도 성령으로 나를 인도하심으로 이처럼 주 앞에 올라오게 하셨음을 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행 15:8).” 그리하여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2).” 이것을 나로 믿게 하심도 성령으로였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갈 3:5).” 그러므로 말씀 가운데 산다는 일은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살전 4:8).”
이렇듯 성령으로 사는 데 따른 일심(一心)은 기도로 사는 것이다. 뿔과 분향단 같이 성령과 기도는 하나이다. 그렇듯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하여 나는 언제부턴가 단조롭고 지루한 나의 하루 일과를 사랑한다. 같은 동선을 따라 주어진 한 날의 수고로 족한 줄 아는 것에 감사한다.
이로써 기도하게 되고 기도로 주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간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55:1).
비록 나는 부족하기 그지없으나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단 9:17).” 하여 이렇듯 주의 전을 지키는 자로 족하였다. 내 곁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심도 그때이다.
어제도 병원에 들렀다가 집에 들어갔는데, ‘똥싸개 아이’가 울고 있었다. 덩치는 이제 6학년이라, 키도 훌쩍 자라서 몰라볼 정도인데 여전히 칭얼거리고 자기고집대로 하지 못해 눈물 콧물 얼굴이 아주 범벅이었다. 여전하다 싶었는데 얼마 전에도 새로 옮긴 태권도에서도 쫓겨날 뻔한 모양이었다. 덩치만 컸지, 같은 또래 여자아이의 무엇을 뺏어 먹었다나, 어쩌다 그런 일인지 여자아이 쪽 부모가 고소를 하네, 마네, 한바탕 소동이 있었고 학원에서는 채 한 달도 안 돼 아이를 또 그만두게 하려 했던 모양이다. 그런 일로 나이든 모친은 눈물로 하소연하고, 아내는 그런 가운데서도 아이와 씨름하면서 어느덧 6년이 훌쩍 넘었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이상한 사람들만 곁에 두시는 것은 저들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게 하심이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18).” 그러니 나로서는 기도할 수밖에…!
그런 이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러한데, 누가 요즘 누구 말을 들으려하나? 각자 다들 자기 생각이 강한 법이어서 우리로서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두시는 마음으로 아이에 대해 혹은 어떤 일에 대해 기도하는 수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리하여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그러할 때 기도하는 자가 행동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묵묵히 나의 주어진 시간과 상황을 사랑하는 것도 이를 통하여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일에 있어 주를 바라게 하심일 텐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 2:18).” 그러므로 믿음은 떠드는 게 아니라 행함이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
그러므로 내가 구할 때, 구하고 이미 받은 줄로 여기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1-22).”
이처럼 나의 삶이 단조롭고 일정하여 더러는 재미없고 심심하게 여겨질 때도 그러므로 주를 바랄 수 있어서 감사하다. 건강도 돈도 앞날에 대한 여러 생각도 모두 주 앞에 자꾸 내려놓는 것도 그리할 수 있게 하시는 이의 능력으로였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고로 오늘 나의 구함이 나의 문제를 두고 씨름하였다가 주의 뜻을 바람으로 끝나는 것이 되어서, 기도는 아뢰는 데 있어 점점 더 주의 뜻을 바라게 한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하실 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기도하게 될 때가 보면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인데, 절박함으로 간절하여서 나의 약함이 강함이었다. 치과 의자에 누워, 주사실 앞에서 대기인원들 사이에 앉아서, 막히는 길 위에서 나는 더러 공포에 질려서 주의 이름을 하염없이 되뇐다. 그때의 기도는 군더더기가 없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더해주소서.’
결국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간다. 내가 아무리 구하여도 나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 같을 때도, 심지어는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그러하나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라’ 하시는 오늘 말씀이 저 의미를 더한다.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출 30:9).”
예수님도 결국은 자신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시길 구하였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기도는 나의 소원을 빌다 어느 순간에 이르러는 주의 뜻을 이루시기를 구하게 된다. 이에,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어떤 어려움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는 나의 간절함이 주를 바람이고, 주께 바라는 한 가지는 주의 긍휼하심으로 주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이는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이와 같은 기도의 원리를 알고부터 내가 하는 말은 줄어들었다. 성화나 간섭도 그럴 거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누군들 말로 내가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나는 주께 아뢴다. 나의 일들도 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뿐이라, 주께 아뢰고 또 바랄 때 주의 긍휼하심뿐이어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나는 이제 이와 같은 말씀이 참 좋다. 늘 힘을 얻는다. 내가 믿은 게 아니라 나로 믿게 하셨고, 내가 사랑한 게 아니라 나로 사랑하게 하심이었다. 항상 나를 먼저 부르셨고, 찾아오셨고, 주가 곁에 계셨다. 심지어는 내가 등을 돌려 주를 멀리하고 있을 때도 주는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더해주셨다. 나의 날들이 그러했음을 인정하면서,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16:23).”
하여 나는 오늘도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다. 주 앞에 고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날 위하여, 나 때문에…. 이를 인정하면서부터 나의 유년을 사랑한다. 혹자는 콤플렉스가 어떻고 트라우마가 어떻고 하면서 나의 날들을 분석하기 좋아하지만 나는 나의 다채로웠던 유년시절을 이제는 복이라 여긴다. 남들은 경험할 수 없었던 날들을 사랑한다. 오늘에 이르러도 그것으로 감사가 일어난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사 5:16-17).”
하여 나는 이제 여기서 산다. 하루씩 오늘만 산다. 그리하여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막 12:42-43).” 나의 보잘것없는 전부이나 주께 바칠 수 있기를. 하는 일도 없는 자로 이런 소리라 송구할 정도이지만, 그런 마음으로 눈을 뜨면 주 앞으로 온다.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59:9).
이때에,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
(10).
오늘도 나를 어렵게 하는 것을 주 앞에 두는 것은,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1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