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네가 정한 값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
레 27:8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시 96:8-9
오늘 말씀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사람을 여호와께 바치기로 서원한 경우에 관한 말씀이다. 이때 서원자는 사람 대신 돈 곧 속전을 바쳐, 헌신하기로 서원한 자의 노동력에 근거로 결정하였다. 그 속전은 성전 유지비나 수리비로 쓰였다. “그 은을 일하는 자에게 주어 그것으로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게 하였으며 또 그 은을 받아 일꾼에게 주는 사람들과 회계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성실히 일을 하였음이라(왕하 12:14-15).”
하여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레 27:2).” 하여 서원은 히브리어 ‘네데르’ 곧 ‘맹세하다’, ‘다짐하다’, ‘헌신하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의도에서 자발적으로 무엇을 바치거나 자신을 헌신할 것을 약속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그러나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신 23:21-23).”
곧 우리가 받은 은혜에 감복하여 주 앞에 자신을 드리고자 할 때,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전 5:4-6).” 이에 서원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단지 충동적인 감정의 표현이 아니다. 서원으로는 자신을 헌신으로 드리거나 가축, 가옥, 토지 등으로 하였다.
가령 나는 부족하나 주 앞에 드려져 ‘교회를 지키는 자’ 혹은 ‘교회에서 섬기는 자’로 목사를 감당할 때 말씀을 대하거나 어떤 교리에 대하여 성심으로 연구한다. 뿐만 아니라 누가 어떤 일로 기도를 부탁할 때 혹은 어떤 어려움을 호소할 때 주께 아뢰거나 주의 뜻을 전하는 데에 성심을 다하여 한다.
어제는 이런저런 이유로 주인이 냉난방기를 설치해주었다. 하루 종일 걸리는 공사라 저들에게 맡겨두고 일찍 들어갔다. 그래서 그런지 저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내 뒤척거리다 교회로 왔다. 아니나 다를까 천장형으로 설치를 했을 뿐 바닥이며 싱크대며 난장판이었다. 창문을 열고 먼지를 털고 쓸고 닦고 하는데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고, 평소 나오던 시간이 되었다. 주께 서원은 우리의 의지로 즉흥적인 감정의 표현이 아니다. 어찌 표현하기 어려운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진다.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신 23:23).”
어릴 때, 그때가 중1 때였나? 나는 세례를 받으며 희한한 경험을 했다. 당시 또래 친구들 네댓 명이 같이 학습과 세례를 받았는데 우리는 그때 설교원고를 받아쓰고 이를 돌려보며 우리들끼리 성경공부도 했다. 당시 여전도사님이 주말에 와서 주일을 지키고 갔는데, 저이는 학습과 교리문답을 가르치고 거리가 멀어서 일주일간 우리끼리 하게 하였다. 그게 희한했던 게 어린것들이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사뭇 진심이었고, 학교 끝나고 같이 모여 기도회를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회개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서로 그렇게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세례 받을 때는 우리가 너무 울어서 교인들 전체가 숙연했던 모습도 기억이 난다.
그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목사가 되겠네, 사모가 되겠네, 선교사가 되겠네 하며 서로는 그게 서원인 것도 모르고 그렇게 주 앞에 자신들을 드렸다. 그 가운데 선교사가 하나, 목사가 둘, 사모가 하나… 그때 같이 했던 친구들 대부분이 헌신자로 산다고 들었다. 물론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목사가 되겠다고 하다 어느 순간 곁길로 흘러 방황하다 뒤늦게야 붙들려서 온 것이지만….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시 15:4).
다들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오늘이 나는 항상 송구한 것이 너무 늦게 그것도 마지못해 끌려온 것 같아 송구할 따름이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자원하는 심령을 원하신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집을 성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하면 제사장이 그 우열간에 값을 정할지니 그 값은 제사장이 정한 대로 될 것이며(레 27:14).” 곧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면’, ‘드리려면’ 하는 표현이 2, 14, 16절에 연거푸 나타난다. 이렇듯
“백성들은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기뻐하였으니 곧 그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다윗 왕도 심히 기뻐하니라(대상 29:9).”
하여,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 8:11-12).”
할 마음을 주가 주신다. 그리 하게끔 주가 이끄신다. 그것이 자신을 드려 헌신하는 일이든지 물질이나 기도나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는 것이어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가 더하시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받으신다.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신 16:17).”
이를 바로 알지 못할 때는 남과 견주거나 저의 시선을 의식했던 게 사실이다. 혹은 나 자신이 요구하는 당위성에 따라 하려는 마음도 나를 힘들게 하였다. 그러나 말씀은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하여 나는 가르칠 뿐 강요하지는 않는다. 권하기는 하나 강제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이쪽으로 서고부터 이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를 안다. 그래서도 권하기는 하나 그런다고 할 것도 아니고, 해야 할 사람이 안 할 것도 아니어서….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
우리가 주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일이어서, 안다는 것은 주를 믿는 것으로 오늘의 형편과 사정을 뒤로 하고 주가 주시는 마음을 행할 뿐이다. 하여,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행여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앞에 두고서도 주를 바람이라,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시 76:11).
오늘도 이렇게 마음이 그리 쓰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교회로 올라와 쓸고 닦고 한 뒤 허리가 지끈거려 힘들기는 하나… 혹은 세를 얻어 열 평 남짓한 작은 공간으로 보잘것없는 곳이라 해도 나는 이를 주가 맡기신 교회라 여겨 쓸고 닦고 그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일이 성스럽다. 그리 여기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하찮고 보잘것없다고 해도 그것으로 또한 주를 섬기는 일이어서, 한 영혼! 우리가 서로 같이 하는 ‘그 한 영혼’으로 우리는 서로 씨름한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7-8).”
오늘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한 뼘도 안 되는 사소한 일이라 해도 나는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그 자리를 지킨다.’ 노아가 마치 매일 또 똑같이 무던하게 방주를 지었을 그 무수한 날들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주가 가라 하신 약속의 땅을 향해 갔을 아브라함과 같이… 그저 그 일이 사사롭고 헛된 듯 보일 때도,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신 26:10-11).”
그러므로 나의 하루, 나의 사역은 그저 내놓을 게 아무 것도 없다 해도… 누가 ‘공공신학’에 대해 누구의 책을 주고 언제 같이 설명을 듣기를 원해 나 역시 그 책을 읽고 있다. 여러 주장과 그 기원을 살피며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과 무엇이 다르거나 주의해야 할 것인지를 성심껏 살핀다. 누가 ‘그 아들’ 이야기로 이를 어찌해야 할지, 마음을 어려워하다 토로한 뒤 나는 주께 아뢰며 늘 때마다 마땅한 말로 위로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며 준비한다. 그러다 말 일이라 해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나는 나의 유별난 경험과 남다른 어려움으로 주의 은총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몸부림칠 때도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9-10).” 그러므로 내가 하려 하지 않고, 다만 그리 두시는 이의 뜻을 따라 행하기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시 96:1-2).
우린 모두 각자의 개별적인 노래로 그의 이름을 송축한다. 누구나 남다른 상처나 어떤 어려움으로 힘들어하지만 또한 그리하여 더욱 그 향기가 짙어서,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5-17).”
각각,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8-9).
그리하여,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