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전봉석 2025. 1. 27. 05:34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수 3:8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 14:2-3

 

 

인생은 매순간이 요단을 건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요단을 건너가라 하시는데, 하필 그 시기가 물이 가장 범람할 때이다. 곧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그런 때에 하나님은 언약궤를 앞세우고 요단으로 들어가라 하신다(15). 하나님이 먼저 물을 거두시고 땅이 드러나게 하신 후에 건너가라 하시면 그래도 수월할 것 같은데, 물이 언덕까지 차있는데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8).” 하고 명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우린 먼저 요단이 마르기를 바라고, 하나님은 우리가 저 넘실거리는 요단으로 들어서라고 하신다. 이와 같은 갈등은 때로 참 잔인하다. 이때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15-16).” 이러한 하나님의 공략을 우리는 순종하기 전까지는 경험할 수가 없다.

 

그러니 나의 이해나 지식이 아니라 순종이 우선이다. 일흔다섯 해를 살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길’을 가야 했던 아브라함도 그러했겠다. 우리는 그럴 때 어디로 가야 하는지, 거기가 어딘지, 뭐라도 알고 싶은데… 순종이란 우선하고 행함이다. 다음은 그리 하라 하신 이가 행하실 것으로 믿고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그리 따르는 것일 텐데… 이러한 결정이 참 쉽지가 않다.

 

오늘 본문의 이 시기는 밀과 보리를 수확하는 때로 아열대 기후에 속하는 여리고 지역은 태양력으로 4, 5월 경이라 한다. 그때에 요단이 언덕에 넘칠 정도인데, 언덕은 강의 양쪽 자연제방을 가리킨다. 그러니 이 때는 물이 많아 범람하는 시기였다. 이때는 북쪽의 헬몬 산에서 눈이 녹고, 봄비가 내리는 때여서 갈릴리 호수는 최고 수위에 오르고 요단강은 크게 불어 그 깊이가 3-4미터, 넓이는 30미터 이상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 하필 이럴 때… 가뜩이나 형편이 좋지 않고 심지어 내 코가 석 자인 마당에 하나님은 이렇듯 ‘들어가라’ 하고 요구하시는 것을 자주 느낀다. 요단은 만수가 되어 사해로 흘러가는 이때에는 요단의 가장 좁은 나루터라 해도 일반적으로 도강은 불가능하다. 거기에 처자식과 여러 가축까지 거느리고, 이 많은 숫자들을 어찌 이끌고 이 강을 선뜻 건널 수 있을까?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에서도 하필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이를 훈련시켜야 할 때에, 또는 장가들고, 밭을 사서 가장 바쁘고 정신없을 때, 하필 꼭 그럴 때…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눅 14:16-17).” 그럴 때 누가 선뜻 그 초대에 응할 수 있겠나?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18-20).”

 

우리가 말씀으로 순종한다는 게 이렇듯 어렵다. 멋지게 우리도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순종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순종이란 이처럼 낭만적이거나 관념적인 철학과 몽상의 범주가 아니다. 도저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때에 일부러 그러시는 것 같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우리가 순종으로 따를 때 하나님은 기적을 보이신다. 우리가 말씀으로 눈 딱 감고 순종함으로, “발이 물가에 잠기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일어났다.

 

나를 부르실 때도 그랬다. 첫 번째와 두 번째를 회피하고 더 먼 길을 돌다가 세 번째 다시 부르실 때, 나의 심정은 에스더와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거였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 4:16).” 그렇게 주의 부르심에 더는 거부할 수 없어 순종하였을 때 내 곁의 가까운 선생과 친구는 현실을 도피한다며 뭐라 나무랐다. 나 역시 한 동안 그와 같은 괴로움에 시달렸다. 뭔가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렇듯 오늘 본문을 연상하면, 강둑을 넘칠 듯 거센 물결이 저만치 30여 미터 이상 펼쳐져 있을 때, 누구라도 공포를 느끼지 않았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따라 언약궤를 메고 물속으로 발을 담글 때 거세게 넘실거리던 물이 마르고 땅이 드러났다. 앞서 들어가는 제사장들의 용기가 크다. 이러한 용기는 오로지 가나안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홍해를 건널 때는 모세가 지팡이를 들 때에 물길을 냈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출 14:16).”

 

하실 때 이와 같은 말씀으로만 그 일을 행하기는 쉽지 않다. 혼자가 아니다. 그의 뒤로 60만 대군의 백성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 뒤로 애굽의 마병들이 쫓아오고 있다. 그렇듯 비현실적인 행함이 과연 옳은 것일까? 하는 갈등이 없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21).” 그때도 믿음으로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고, 오늘 여호수아 역시 그야말로 미친 짓 같은 이 일을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제사장들을 앞세웠다.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요단에 들어서라.” 하심을 따랐다. ‘들어서다’는 ‘서다’, ‘머무르다’란 의미를 가졌다. 요단강에 들어가 그 속에 머물 생각으로 발을 물에 담갔다. 그러자 순간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바닥을 드러냈다. 이러한 역사는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강물에 잠기자 곧 요단 강물은 그 흐름을 멈추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의 섭리는 사람의 말로 이해시키고 설명할 수 없다.

 

나에게도 이와 같은 간증이 있는데, 현실적으로 그때 내가 신학을 다시 또 한다고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모든 게 다 앞서 두 번의 기회보다 더 어렵고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나를 이끄시고 새벽예배를 나가게 하시고, 뜬금없이 저녁마다 가정예배를 드리게 하시더니 점점 더 거센 물살이 몰아치듯 형편이 어려워지는데 덜컥 신대원에 합격을 한 것이다. 당장 등록금은커녕 매학기마다 학비도 감당할 수 없었다. 수업을 들을 현실적인 여건도 아니었다. 오죽하니 나는 울면서 운전을 하고 다녔다. 꼭 나까지 해야 하나? 싶은 심정으로 눈물을 자주 흘렸다. 그때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손길로 매학기 등록금이 채워졌고, 그 와중에 글방에 아이들이 적당하여 수입이 오히려 늘었다. 파산에, 공황에, 쫓겨나 이사를 가야 할 판에도 그때마다 하나님이 해결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길로 일을 여신다. 우리가 이 비현실적인 일을 초자연적인 현상이라 한다. 우리의 삶은 날마다가 기적이다. 일찍이 우리의 ‘애굽’에서 우리를 이끌어내실 때 내린 ‘10대의 재앙’이 우리 삶에도 있다.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은 물론 태양과 달이 멈추는 사건이나 해의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나는 일 등…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데는 도저히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오늘 본문에서 실제 이 지역은 지진 등으로 인해 바위가 무너져 내려 순간 요단 강물을 정지하게 한다고 한다. 실제로 주후 1267년 12월에도 16시간 동안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1927년 7월에도 21시간 30분 동안 지진으로 인해 요단강물이 막혔다는 기록도 있다. 그렇듯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일을 동원하여서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 실제 이와 같이 아담 지역의 지진으로 이처럼 요단이 순간 막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믿음으로 순종할 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전우주적인 일들을 우리는 자주 경험한다.

 

누구는 우연이라 할지 모르겠으나 분명히 흐르던 물이 그치고, 쌓이는 바람에 의한 역류현상으로 요단강이 순간 마르고 바닥을 드러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하게 되는 것이 “여호와의 언약궤”을 멘 제사장들이 앞장 섰다는 것이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단지 강가에 서있었다는 말이 아니라, 넘실거리는 요단강에 발을 담그고 바닥에 발이 닿기까지 들어설 때, “마른 땅에 굳게 섰”다.

 

마른 땅은 물기 없는 땅이다. 굳은 땅으로 그 위에 섰다. 섰다는 것은 ‘확정짓다’, ‘고정시키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저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어깨에 메고 자신을 불가능한 가운데 고정시켰다. 그렇듯 확정하고 고정하지 않으면 어디로 쓸려갈지 모른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 57:7).

 

남들은 나더러 현실도피라고 만류했고, 가까운 선생은 심지어 ‘나 같은 처지’의 자기 친구에게 연락해서 나를 어떻게든 만류하려 했다. 나는 선생의 친구와 통화만 하고 직접 만나자는 것은 거절했는데, 저이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었다. 부친이 목사였고,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자라고 자신도 목사가 되겠다고 했다. 철학을 전공하면서 명리학을 공부하다 목사가 되긴 했다. 10여 년 목회를 하다 강원도 어디에 암자를 짓고 혼자 도를 닦는지 어쩌는지, 한 번 보자고 하는 것을 끝까지 사양했다. 저이들 뿐 아니라 주변의 여러 경로에서 이런저런 반대가 있었다. 심지어 가까이 지내던 아무개는 나에게 사이비교주가 될 거라고도 했다.

 

빠져드는 물을 믿고 서는 일이란 참으로 무모한 일이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자기가 딛고 선 자리에서 확고부동하게 지켰다. 그렇게 해서 저들을 따르는 수많은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니라.” 그러는 동안 어찌 두려움이 없었겠나? 이 무모하고 미친 짓을 스스로인들 회의하지 않았겠나? 멈추었던 물이 언제 다시 흐르게 될지 모른다. 마음은 조급하고 두려움은 가중된다. 현실적으로 어려움이란 이리저리 흔드는 바람 같다. 이래도 계속 할래? 하고 묻는 것 같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의 수는 도합 200만으로 추산된다. “이스라엘 자손의 계수된 자가 육십만 천칠백삼십 명이었더라(민 26:51).” 성인 남성으로 수를 계산하였으니, 여자와 노인과 아이들을 합하면 족히 그러할 것이다. 그들이 행군하는 길이도 얼추 1-2킬로미터 이상 줄지어 뒤따랐을 것이고, 그렇게 요단을 건너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아무리 못 잡아도 반나절은 걸렸을 것이다.

 

아, 이 비현실적이고 무모한 행군을 굳이 해야 할까? 굳이 그렇게까지 믿어야 하나? 싶을 때, 신앙이 그렇듯 유난스러울 게 또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저절로 들 때도 있다. 저런 몸으로, 그런 상태에서도 굳이… 누구는 목회를 하고, 누구는 기독교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누구는 또 회사를 옮기면서(주일성수가 어려워서)… 그런 가운데 적당히 타협하고 안주하면서도 잘만 믿고 교회에 충실한 사람들도 여럿인데…. 묵묵히 발을 담그고, 굳게 서서, 그 마음을 확정하는 삶도 있다.

 

하루씩 그 한 걸음씩 오늘도 주 앞에 나아오는 삶으로, ‘여호수아는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수 3:1).” 아침을 깨우는 일은 상징적으로,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5:3, 88:13).

 

하고 주 앞에 시선을 고정하여 사는 삶은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하심과 같이 어렵고 힘들어서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땅의 모든 끝’에서 주를 바라는 것이라,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호 12:5).” 하여 나는 오늘도 주의 이름으로만 서서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그러므로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나는 지금 이 순간으로 족하여서,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63:2).

 

이에 오늘도 시편으로 기도한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사회도 교회도 뒤죽박죽인 듯 여러 생각과 신념이 뒤엉켰다 해도 세상은 본래 그러하나,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14:5).

 

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