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1장 / 나 만군의 여호와가 보호할 것이라
250209 주일
이사야 31장
나 만군의 여호와가 보호할 것이라
사 31:1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
사 31:4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
사 31:5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
들어가는 말
모든 생명은 회귀본능이 있다. 북극곰은 500km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서식지를 찾아간다. 연어는 바다로 나갔다가 무려 3,200km를 헤엄쳐서 다시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간다. 남극의 제비는 북극에서 남극까지 35,000km를 비행하여 돌아간다. 동물원에 갇힌 알레스카 산새는 자신들의 고향인 북쪽으로 돌아앉는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고향을 그리워하며 죽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선지자 열여섯 명을 보내며 돌아오라고 하는데 듣지 않았다. 오늘 이사야는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사 31:6).” 하고 외치지만 듣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증거는 돌아갈 본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전인자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하는 속성이 있다. 그럼에도 동시에 세상에 더 살고자 하는 욕구도 있다.
우리는 가야할 길이 남았다. 육을 입고 사는 동안 우리는 육의 소욕을 따라간다. 이에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하신다. 이를 같이 들은 누가는 좀 더 세밀하게 진술하였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곧 우리들로 하여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결국 ‘좁은 길’과 ‘넓은 길’로 나뉘는데, 이를 문맥적으로만 읽으면 고행하며 수도원 생활을 하거나, 극도의 청빈으로 끼니를 굶거나, 심지어는 장대 위에 앉아 수십 년을 고행하다 죽은 사람도 있다. 세상과 동떨어져 독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우리가 육체의 소욕대로 살면 그 길은 넓어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한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 19:24).” 이에 우리는 ‘성령의 소욕’으로 살아야 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이는 곧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간곡하게 선포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사 31:6).”
본문이해
이스라엘은 ‘애굽’을 의지하였고 하나님은 이에 징계하실 것을 알리신다. 전반부(1~10장)에서 아하스 왕 때, 아람의 잦은 공격으로 ‘앗수르’를 의지하였다. 이어 중반부(29~31장)에는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의 위협 때문에 ‘애굽’을 의지하였다. 오늘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누어서 애굽을 의지할 때 ‘화 있을진저’ 하는 경고와 그러므로 ‘돌아오라’ 하는 말씀을 살펴보겠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1-5)]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1).”
앗수르의 위협으로 이스라엘은 애굽의 군사력을 의지한다. ‘말과 병거’는 당시 고대 근동에서 군사력과 비례했다. 이때 전차부대나 기병대는 기동력을 향상시켜서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출애굽 당시 애굽의 바로는 600대의 병거를 끌고 이스라엘을 추격했다.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출 14:7).”
애굽왕 시삭 때는 병거 1200대와 6만의 마병을 거느리고 유다를 침공했다. “그에게 병거가 천이백 대요 마병이 육만 명이며 애굽에서 그와 함께 온 백성 곧 리비아와 숙과 구스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더라(대하 12:3).” 심지어 애굽은 인접한 국가에 병거를 수출했다. “애굽에서 들여온 병거는 한 대에 은 육백 세겔이요 말은 한 필에 백오십 세겔이라 이와 같이 헷 사람의 모든 왕과 아람 왕들에게 그것들을 되팔기도 하였더라(왕상 10:29).”
오늘 날도 미국을 위시하여 각국은 자국주의 원칙에 따라 군사력을 갖춘다. 이번에 정권이 바뀌면서 미국은 이민자들을 추방하고 관세를 올리면서 자신들이 강국임을 나타내며 폭압적인 정책을 내놓고 있다. 유럽과 강국들은 저마다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군사력을 갖춘다. 저마다 미국의 눈치를 본다.
이에 “화가 있을진저” 하는 경고의 음성이 높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세계정세에 기웃거리며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 두리번거린다. 오늘도 믿는 자들이 각각의 ‘애굽’과 ‘앗수르’를 의지하려 하나님이 돌아오라 하시는 소리를 무시한다.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믿음이 있다고 자부한다. 이에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고 반문하셨다(눅 18:8). 스스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저마다의 애굽에 도움을 청하기 때문이다.
이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하고 성경은 정의한다. 우리의 믿음은 신념이 아니다. 추상적인 관념도 아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4-25).” 오늘 우린 ‘화 있을진저’ 하는 경고를 듣는다.
[화 있을진저(2-3)]
1. 어떻게?
1)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
2) 그의 말씀을 변하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3)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실 것이다.
4)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실 것이다.
2. 왜?
1)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3) 돕는 자도 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4)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결기(4-5)]
1) 여호와께서 놓지 않으실 것이다.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4).”
2) 여호와께서 보호하실 것이다.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5).”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6-9)]
1. 우리 손의 ‘우상’을 버리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6).” 곧 스스로 어찌 이룬 것으로 자축하는 것이나 그렇지 못해 자책하는 모든 것은 ‘자기 손으로 만든 범죄’이다. “너희가 자기 손으로 만들어 범죄한 은 우상, 금 우상을 그 날에는 각 사람이 던져 버릴 것이며(7).”
2. 우리 각자의 ‘애굽’과 ‘앗수르’에게 보복하실 것이다.
“앗수르는 칼에 엎드러질 것이나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니겠고 칼에 삼켜질 것이나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닐 것이며 그는 칼 앞에서 도망할 것이요 그의 장정들은 복역하는 자가 될 것이라(8).”
3. 여호와의 영광이 있는 곳이 복되다.
“그의 반석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겠고 그의 고관들은 기치로 말미암아 놀라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9).”
나오는 말
이사야는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젊은 사자의 강력함’과 ‘어미새의 자상한 보호’와 같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을 알린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으려 돌아오라 한다. 돌아오지 아니하면 심판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회개하는 자는 산다.
진정한 회개는 돌이키는 것이다. 버리지 않고 여전히 쥐고 있는 회개는 없다. 우리가 버려야 하는 것은 ‘우상’이다. 우상은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모든 것이다. 이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1~2).”
여전히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우상이다. 그것으로 ‘앗수르와 애굽’을 삼아 의지하는 것이 죄다. 우리의 의지의 대상이 우리의 손을 찌를 것이다. 우리 발의 올무가 될 것이다. “그의 반석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겠고 그의 고관들은 기치로 말미암아 놀라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사 31:9).”
이 말씀을 <우리말성경>으로 읽으면,
“바위처럼 믿었던 그들의 지휘관이 겁에 질려 달아나고 그들의 사령관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깃발을 버리고 도망칠 것이다. 이것은 시온에 불을 가져다 놓으시고 예루살렘에 용광로를 장만하신 여호와의 말씀이다(우리말성경, 사 31:9).”
즉 풀무의 심판이 예비 되어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실패하는 신앙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심히 거역하던 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패역하여 이미 죽은 자였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그러므로 목이 곧고, 거역하며, 하나님을 속히 떠나려는 우리의 삶을 돌이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