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수 15:63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시 26:2
유다 지파가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않고 예루살렘에 거주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이는 ‘가나안 족속과 어떤 언약도 맺지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며, 모두 진멸하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2-4).”
한데 유다 지파가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나태한 마음으로 가나안 정복 때의 신앙과 순종의 모습과는 대조된다. 과거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은 다른 네 왕들과 합세하여 이스라엘에게 대적하였으나 결국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었다(10:22-27). 그때 예루살렘이 정복당했다는 언급은 없다. 그 이후 유다 지파도 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후에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 성을 불살랐으며(삿 1:8).” 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부분적으로 점령한 것을 뜻할 뿐 완전히 점령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속은 주전 1000년 경 다윗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하게 되었다(삼하 5:1-6). 그때까지 이들은 유다 자손들 곁에서 계속 거주하였다.
한편 이들을 베냐민 지파가 쫓아내지 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삿 1:21).” 왜냐하면 이 예루살렘 성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모두 이 여부스 족속을 경계로 그들을 쫓아내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이다.
어쨌든 결국 가나안 서편 땅이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분배되었다. 그 아홉 지파 반 중에 유다 지파가 처음 제비뽑아 기업을 얻은 데 대한 기록이 이어진다. 유다 지파가 분배받은 기업의 동서남북 경계에 대해 기록하고 있고, 갈렙이 그와 같이 유다 지경 안에 위치한 헤브론을 점령하는 데 얽힌 내용이 소개된다(수 15:13-19). 그런 가운데 예루살렘 성읍만이 여전히 미정복지로 남아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63절).”
여기서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 지파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제일 먼저 분배받지 못하고 유다 지파가 처음으로 분배받았다. 이는 야곱을 통하여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 가운데 나타난 의의를 알게 한다. 즉 르우벤은 저의 계모를 범하였다. 이에 야곱은 장자 르우벤을 대신하여 유다지파를 앞세우고 축복하였다(창 49:1-4). 유다를 통해 이스라엘의 장자권이 계승될 것을 약속하셨다(8-12). 이제 유다 지파가 르우벤 지파를 대신하여 최초로 가나안 땅을 분배받았다.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이어지는 것을 본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신 7:9-10).” 말씀 속 여러 이야기 가운데, 우리 삶 아주 사소한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대로 드러나고 이행된다.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왕들이 보고 일어서며 고관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신실하신 여호와 그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사 49:7).” 이렇듯 오늘 나의 여러 사정과 그에 따른 과정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거룩하심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호 11:12).”
곧 하나님의 약속은 실제이다. 우리가 그 약속을 근거로 산다는 일에서,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2-3).” 하여 우리가 주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근거로 정직할 수 있다. 이에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하심과 같이 날마다 그에 따른 여정을 산다. 어제는 늙으신 장모가 목소리가 잠겨 말을 거의 못하는 것이다. 표현에 의하면 돌멩이가 목에 걸린 것 같다고 해서 겁이 덜컥 났다. 서둘러 길 건너 이비인후과로 모시고 갔는데, 다행히 감기도 아니었고 미열도 없다고 하여 오후께는 따로 영양제를 맞고 돌아왔다. 나는 병적으로 겁이 털컥, 나고 행여 무슨 일이 있을까 하여 가슴을 졸였다. 하필이면 아들이 독감A형에 걸려 나름은 격리 중일 때 그런 일이어서 더욱이 마음이 쓰였다. 그런 거 보면 나는 아흔이 넘은 장모와 사는 매순간이 가슴 졸인다. 거동이 불편해서 위태롭기 짝이 없는 가운데 행여 기침이라도 하면 가슴이 철렁한다.
사는 데 따른 우리의 염려와 근심은 실질적이다. 어떤 어려움은 마음의 일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로 당장의 선택을 요구한다. 추운 날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에서부터 일정하게 해야 할 일을 감수하며 사는 데 따른 고단함을 두고, 우리에게 말씀의 약속이 없다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은 이에 따라 약속을 이루신다.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어그러지지 하나님은 결코 근심을 겸하여 주신 바 없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 10:22).”
우리가 장수하는 일에서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또한 우리가 사는 동안에 건강할 것도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걸리게 하실 것이라(신 7:15).”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우린 다만 주를 바랄 것이다.
늘 직접적으로 장모를 건사하고 돌보는 일은 아내의 일이라, 더러는 짜증과 화가 올라와 함부로 대할 때면… 어제도 같이 산책을 하고 커피 한 잔을 하면서 아내를 어르고 달래 그 심정을 이해하고 풀어주었다. 보면 우리 장모는 태생이 순한 사람이다. 그러나 완고함과 고집은 순한 것과 다르다. 또한 늙으면서 오는 했던 말 또 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거기에 약한 치매증상도 있어서 예전의 일은 뚜렷한데 가까운 어제오늘 일이 가물거리는 것이다. 실은 어제 그 사달도 전날부터 먼지가 켜켜이 쌓인 사진들을 정리하느라, 종일 앉아 먼지 쌓인 사진을 들추었다. 그러니 아내는 속이 터지고, 어머니는 일이 터지고, 나는 저 두 사람 사이에서 애간장이 탄다.
한 사람의 역사와 사연도 이처럼 복잡다단한데 하물며 한 지파의 여러 자식들과 그 자식의 사연들이 뒤엉켜 지지고 볶는 일에 대해서는 오죽할까? 그런 가운데 말씀이 우리에게 있어 이 말씀이 우리 삶에 실제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실행되는 과정은 실로 기이하기만하다. 이를 두고 사도들은 증언하길,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곧 우리의 구원은 그와 같이 말씀을 이루심이고 나로 이 말씀을 깨달아 알면 알수록 주 앞에 더욱 온전하여지기를 사모하게 한다.
이를 알면서는 다 큰 자식들의 일에서 한 발짝 물러난다. 내 곁의 여러 일상들을 존중하고 개입하지 않는다. 되어지는 상황 가운데서 무리하지 않고 주의 뜻을 구한다. 할 수 있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서 나의 일과는 점점 단조로워지고 일정하여서, 나는 오히려 어떤 변수를 두려움으로 경계한다. 이에 다시 사도들의 증언에 따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행 13:23).”
하나님은 말씀대로 일하셨고, 말씀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일정에 따라 기록되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둘이 아니고 하나여서 오늘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고 이에 말씀을 붙들고 사는 일에는 오늘 나의 하루 중에서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함이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오늘 가나안의 사면 경계와 같이 우리 삶의 경계를 두어 그에 따른 축복을 약속하신다. 가령 유다지파의 경계와 다른 지파에 비해 더하시는 기업을 볼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경계는 있다. 곧 우리의 축복은 경계에 따른다.
모세는 그렇게 해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신 3:26).” 이를 바울의 고백으로 재해석하면 우리의 축복을 위한 가시, 곧 우리 현실의 경계를 두신 것을 알게 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물론 우리는 이에 답답하거나 고통스러워서 주께 구하지만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8).”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만하면 족하다’ 하신 것과 같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그러므로 오늘의 나로, 나의 이 모든 형편과 사정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게 실력이었다.
주신 바 이 한 날의 수고로 충성하는 게 복이었다. 비록 어찌 보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나의 단순하고 더러는 별 볼 일 없는 듯한 삶으로 최선을 다한다. 이처럼 묵상글쓰기를 나의 한 날의 우선을 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일은 지극히 사소한 일이나 나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다. 한 손으로 자판을 치고, 앉았으면 눌리는 허벅지의 고통과 허리의 통증은 차치하고 그것으로 어디가 아프고, 오늘은 너무 춥고 졸리고… 등등 내 안에 이는 여러 변명과 사정을 뒤로 하고 주 앞에 나를 꿇리는 일이다.
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8).”
말씀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약속에 따른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배필을 주심으로 우리는 같이 한다. 하여 우리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안주하여 나태하지 않기를. 이를 위하여도 예루살렘을 여전히 가나안 족속의 터로 두심은 경각심을 잃지 않고 그 경계를 늦추지 않기를 바라심이었다. 실제 예루살렘은 지형적으로도 천혜의 요소였다고 한다. 작정하고 전투를 벌인다 해도 꽤 많은 피해는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유다와 베냐민 반 지파는 서로의 경계에 있는 이 성을 놓아둔 것이 아닐까?
오늘 우리 곁에 꼭 그런 가족이나 사연이나 어쩔 수 없는 형편이 있다. 이것으로 고단하고 어려운데 그것으로 또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는 오늘도 간절하다. 이에 예수님은 이르시길,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때를 따라 우린 다만 주의 신실하심을 붙들고 산다. 아직은 안식할 때가 아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9).”
우리의 남은 안식을 위하여서도 오늘을 산다. 주어진 한 날의 수고를 감당한다. 이때의 중심은 교만하지 않는 것이다. 선 줄로 여기면 넘어진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하여 나는 늘 되새기듯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하신 말씀은 두렵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롯의 처’가 소금 기둥이 되어 서 있는 것을 본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았고, 행해야 할 일은 남았다. 오늘 본문도 이를 일깨운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들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들의 성읍들을 진멸하여 바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더라(수 11:21-22).” 그렇게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15:63).” 하여 내 곁의 저들, 나의 병적인 염려와 불안으로 경계한다. 나의 연약한 육신을 돌봄으로 주를 더욱 바라고 사모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이를 오늘 말씀의 축으로 놓고 시편으로 오늘도 마음을 다잡는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시 26:1-2).
나를 단련하심은 나로 하여금 소망을 잃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오늘의 인내와 연단이 나의 양심을 단련하면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하여,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3-4).
오직 말씀으로, 말씀 곁에서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7-9).
하여,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