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요셉 자손이 제비 뽑은 것은 여리고 샘 동쪽 곧 여리고 곁 요단으로부터 광야로 들어가 여리고로부터 벧엘 산지로 올라가고 벧엘에서부터 루스로 나아가 아렉 족속의 경계를 지나 아다롯에 이르고 서쪽으로 내려가서 야블렛 족속의 경계와 아래 벧호론과 게셀에까지 이르고 그 끝은 바다라
수 16:1-3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요셉 자손은 다른 지파와는 달리 두 개의 지파로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다. 특히 에브라임 지파가 차지한 땅에 관해 오늘 본문은 중심적으로 설명되어 있다(5-10). 그 대신 므낫세 지파가 차지한 땅에 대해서는 17장에 이어 설명되고 있다. 요셉 자손이 두 지파로 취급된 것은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각각 요셉의 다른 형제들과 같이 야곱의 아들로 취급한 데 있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창 48:5).” 하고 야곱은 천명하였다. 하여 그들은 기업을 차지하기 위해 제비를 뽑는데, 하나의 제비만 뽑는다. 즉 요셉 자손이 분배받은 땅 중 에브라임 지파는 남쪽 지대를, 므낫세 반 지파는 북쪽 지대를 각각 차지한 것이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의 자손은 유다 지파에 이어 두 번째로, 가나안의 비옥한 땅 중의 일부를 기업으로 차지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요셉을 축복하셨기 때문이다. 요셉은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창 37:3).” 요셉은 극심한 기근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이스라엘을 구하였다. 곧 우리가 주의 뜻으로 살고, 주의 일에 참여하고 선한 공적을 쌓은 것에 대하여 이를 결코 헛되이 돌아가게 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그렇게 은혜를 입었고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선물로 구원을 받았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이와 같은 원리에 따라 이 땅에서의 상급도 달라져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40).” 하여 내가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때, 교회에 주의 이름으로 더할 때 이는 저가 주께 받을 상급이 된다. 곧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1-42).”
그러므로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시 112:9).
곧 요셉은 억울하게 형들의 손에 팔려 노예가 되었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으나 그 모든 상황에서 저는 주의 이름으로 이에 대처하였다. 가령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저는 노예였고, 이를 잘 이용하였으면 저의 인생은 가벼우면서도 순탄하게 풀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가운데서도 주를 경외하였고, 노예일 때나 죄수일 때나 주의 이름으로 언제나 성실하였다. 이를 사람들은 모른다 해도 주는 아신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4).”
하여 우린 언제나 하나님께 장자의 특권으로 사는 자 같다. 모든 지파들이 요셉 지파는 두 배로 땅을 분배 받고 유다에 이어 비옥한 땅으로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처럼 우린 누구 앞에서도 특별한 존재들이다. 이에 흥미로운 말씀이 기억난다.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신 21:15-17).”
곧 장자의 특권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처음 것은 모두 주께 돌리는 원리를 여기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는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하심과 같다. 그런데 실제 야곱 이스라엘은 차자이다. 장자는 에서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붙드신 자, 그리 세우심을 받은 자에 대하여 그이 여기심은 주의 뜻이다. 이에 에브라임이 아니라 므낫세가 장자인데, 이와 같은 생물학적인 장자가 장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그리 정하신 바, 가인이 아닌 아벨이었듯이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이었고, 에서가 아닌 야곱이었다.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렘 31:9).”
주의 강권하신 은혜에 따라 우리의 ‘장자의 특권’은 잃지 않는다. 축복의 통로는 변하지 않는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우리의 임의에 따른 게 아니다. 그렇게 에브라임은 차자였으나 장자의 특권으로 먼저 기업을 할당받았고, 훗날 남북으로 분단되는 북이스라엘에서 에브라임이 저들 열 지파 가운데 왕국의 주도권을 차지했다(사 7:2-17). 물론 에브라임에 대한 하나님의 이와 같은 은혜에도 에브라임은 범죄하였고(신 20:16-18), 가나안 사람을 치우지 못하고 종으로 삼았다. “그들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오늘까지 에브라임 가운데에 거주하며 노역하는 종이 되니라(수 16:10).”
결국은 주시는 은혜가 큰데 그것을 허투루 여길 때 도리어 화가 된다. 에브라임을 중심으로 북이스라엘은 가나안의 풍습을 쫓았고 저들의 우상을 섬기는데 주력했다.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왕상 12:28-29).”
그렇다고 어찌 은혜가 저주이겠나? 이를 화가 되게 하는 것은 교만 때문이고 이는 아주 사소한 일, 저들이 정복하고 다스리는 땅에서 가나안을 모두 몰아내지 않고 종으로 삼은 일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에 따른 결국은 우리가 알듯이 심판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땅에 거주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은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호 9:3).”
곧 우리가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고 온전하게 받지 않을 때,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 낼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기를 명절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12:8-9).” 이렇듯 성경의 귀결은 믿음의 여부나 은혜의 여부에 따른 게 아니라 순종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여 우리가 살면서 실제 누구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이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그를 내 곁에 두시는 하나님을 의뢰하기 때문이다. 저가 다소 모자라고 부족하다 해도 그와 같은 이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따르고 취하여 이를 살핀다.
이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우리가 서로 사랑함은 주를 사랑함과 비례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
이때에 세상은, 그 권세 잡은 자는 우리를 세상적인 편의와 유익으로 유혹한다. 오늘 10절은 그런 의미로 결국 가나안을 분배 받고 이를 정복할 때에 나름의 득실을 따져 남겨놓은 자들로 범죄의 씨앗은 자라나고, 심판의 불씨는 커져간다. 저들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은 것은 오늘까지 에브라임 가운데에서 거주하며 ‘노역하는 종’으로 부릴 수 있어서 이득이었다고 하겠으나 이후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온상이 에브라임에 의한 것임을 묵상할 때면 이와 같은 사소한 일이 얼마나 위중한 일인가를 알게 된다.
늘 주님 곁에서 주와 함께 동행하였던 가룟 유다 역시도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그러니 우리로서는 속수무책이나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하시는 말씀에서 굳은 결의로 다시금 돌아봐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판단하길 별 거 아니라고 여기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 죄는 독버섯처럼 자란다. 이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성경의 이와 같은 경고와 그에 따른 말씀의 의미를 묵상할 때 이와 같은 일이 우리 삶에 너무 자주, 빈번하게 우릴 유혹하고 넘어뜨린다는 사실이다. 가령 어제는 아내가 오후에 수업이 있어 내가 오후 내내 장모를 돌보았다. 물론 장모는 장모 나름 사위에게 주려고 본인 드시라 한 것을 내게 가져다주려 안달이었다. 거실에 널린 빨래를 개켜 일손을 좀 돕겠다는 것이 ‘똥싸개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러니 뭐라도 돕고, 먼저 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그게 사고가 되고 저지레가 되니까, 아니나 다를까 아내가 돌아와서 뭐라 또 한 소리하고 나에게도 덩달아 성화였다.
이런 일상의 아주 사소한 다툼에서도 우리가 서로를 사랑함은 그 대상이 아닌 저를 사랑하고, 우리 곁에 두신 이의 뜻과 사랑을 알고 이를 경외함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신뢰, 그러니까 자신이 스스로 괜찮다고, 옳다고 여기는 일에 대하여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경계해야 한다. 에브라임도 그러했고 유다도 그러했고 저마다 ‘이 정도쯤은 괜찮아!’ 하고 여길 때, 그로 인하여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나 훗날 저들은 아무리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도 저마다의 산당만은 없애지 못한 것과 같다.
이에 지혜자는 이르길,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 28:26).”
여기서 나의 이런 태도가 같은 의미로 적용이 될까 모르겠는데, 나는 어느 순간부터 ‘잊힐 권리’에 대해 가끔 생각한다. 이는 새삼 누가 그립고 같이 했던 일이 생각날 때, 혹은 그와 같이 누가 연락을 하거나 새삼 어떤 관계가 형성될지 모를 때, 나는 예전처럼 마음이 앞서지 않기를 주의한다. 자꾸 나를 비워내고 정복하듯이 예전 사람들의 연락처를 지운다거나 누군가의 새삼스런 연락에 선뜻 답을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더욱이 안 믿는 자들이나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새삼 다시 서로의 인연을 잇는 일에 주의한다. 그저 ‘좋은 기억’로 남겨두는 사이도 좋다. 굳이 다시 이어가야 할 관계이면 하나님이 그리 하실 것이다!
곧 나의 사소함에 단조로움으로 대처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몸에 밴 습관이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에 있어서 오늘의 묵상과 주를 사랑하는 데 따른 걸림이면 잊는 것도 상책이다. 서로에게 있어 그렇듯 잊힐 권리는 다시 죄로 돌아갈 수 있는 미연의 길을 차단하는 일이다. 이에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 5:3).” 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97:10).
더는 예전의 나로 살지 않음으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27:1, 3).
하여 이제는….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4).
부디 더는 다른 데 정신 팔려 살지 않기를,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8, 11, 13-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