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전봉석 2025. 2. 15. 04:30

 

르우벤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제단을 쌓았는데 보기에 큰 제단이었더라

수 22:10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 33:10-11

 

 

가나안의 땅을 분배하고 여호수아는 요단 동편 길르앗 땅의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가나안 정복을 함께 하여 성실히 완수한 것을 치하한다.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전리품을 받아 그들이 강 동편에 받은 땅으로 돌아간다. 이에 두 지파 반은 귀환하며 요단 강 뚝 위에 하나님의 역사를 상기하여 서편 동족과의 단합을 상징하는 기념단을 쌓는다. “르우벤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제단을 쌓았는데 보기에 큰 제단이었더라(10절).”

 

이 일은 요단 서편에 있는 지파들에 오해를 산다. 즉 이를 우상 숭배로 여겨 저들 두 지파 반을 진멸하려 한다. 그러나 제사장 비느하스와 이스라엘 방백들이 진상을 밝히고 그들의 충정을 설명한다. 이 일로 서로 간에 오해가 풀리고 두터운 우의가 다져진다.

 

본문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 그분 외의 다른 어떤 신도 섬기기를 두려워하는 백성들의 열심을 보여 준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은 자신과 자신들의 후손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이 단을 쌓았다(21-29). 이를 요단 서편의 지파들은 여호와 신앙을 거역하는 우상 숭배로 오해하고 두 지파 반을 응징하려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여호와를 향한 뜨거운 신앙으로 그리 행한 것은 알겠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 5:19-20).”

 

저들은 요단 언덕에 이르러 거기서 단을 쌓았다. 모세와 맺은 약속을 완수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돌아가는 길에 동서를 구분 짓는 요단강 언덕에서 깊은 감회에 젖었을 것이다. 저들은 약속한 대로 처자 일가를 떠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데 있어, 선봉에 서서 근 7년의 전쟁을 치렀다. 비로소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면서 또한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민족들과의 작별을 고하여 이를 기념하고자 강 언덕에 제단을 쌓은 것이겠다.

 

‘보기에 큰 단’을 쌓은 것으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을 만큼 큰 기념비’로 그리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 단은 멀리서도 볼 수 있을 만큼 그 규모가 크고 웅장했다. 이에 서편 이쪽에 남은 다른 지파들의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요단 가에 세운 제 2의 제단은 요단 강줄기를 중심으로 좌우편에 형성된 곡선형의 완만한 구릉지에다 그리하였다. 가나안 맨 앞 편 즉 전면에서 보면 충분히 오해할 만하다. 저들은 7년의 전쟁을 끝으로 같은 민족을 사이에 두고 요단을 건너 동편 길르앗 땅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제껏 오랜 인내가 필요했다. 이에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1-12).” 그것은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우리는 오해의 소지가 될 만했다는 것과 실제 그것으로 어떠한 범죄의 화근이 되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의도는 우상숭배를 목적으로 한 게 아니다. 선한 의도였음도 밝혀졌다. 그러나 우선은 오해할 만하였다. 정작 그리 행하기 전에 서편의 같은 민족들에게 그와 같은 마음을 알리고 같이 했으면 어땠을까? 돌아가는 길에 불쑥 강둑에 커다란 단을 쌓으니 의당 오해가 있을만하다. 문득 여기서 바울 사도가 주의하였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거리낄 게 없었지만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 8:4).”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한 분 되심을 아는 우리로서는 별 의미도 없는 것들이나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5).” 문제는 이를 어떤 이들은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7).”

 

그러므로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8-9).” 이를 먹고 안 먹고 하는 게 우리에겐 별 거 아니지만 혹여 누구에게 우리의 이와 같은 행실이 오해가 된다면,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는 부분을 주의하게 한다.

 

즉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세금을 내는 일에 있어서도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마 7:27).” 공연한 분란과 오해의 소지를 피하여 반목의 불씨가 되지 않게 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롬 14:16).”

 

다른 편에서는 경솔한 판단이 악을 가중시킬 수 있음을 살피게 된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그러한 의도가 아니었다 해도 이는 오해의 소지가 있었고, 이를 또 임의로 판단하여 그리 공격하려 하는 것도 경솔하였다. 일련의 사태와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보면서 서로가 점점 더 강대 강으로 대치하는 것 같아 답답하다. 그럴 때 서로는 분별력이 흐려진다. 자기감정에 사로잡힌다. 같은 진영의 논리로만 판단하게 된다. 성경의 지혜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잠 14:29).”

 

하는 것 같이 감정이 앞서면 명철이 따르지 못한다. 하여, 섣부른 행동을 부르는데

 

“너는 서둘러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서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25:8).”

 

오늘 우리 사회의 단면이 그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묵상함으로 함부로 예단하고 판단하지 말며, 감정에 치우쳐 명철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죄에는 단호하되 서로의 입장과 그 사정에 대해서는 깊은 이해와 대화가 필요하다. 서로 죽자고 싸우려 들면 이러다 진짜 제2의 6.25라도 벌이겠다는 것인지? 나는 앞에서 선동하는 자들의 가벼운 입을 경멸한다. 그러다 불리하면 저들 사이에 또 다시 반목과 불화가 싹튼다. 서로는 물고 뜯고 싸운다. 이에 성경 여러 곳에서 이에 따른 가르침이 있다. 먼저는 가증하게 굴면 안 된다. 그럴 소지가 있으면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신 7:26).”

 

또한 우리로 그와 같이 죄로 빠지게 하는 것과 단절해야 한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다소 극단적인 것 같아도, 실제 우리는 그리 선하지 못하다. 처음 의도는 어떠했을지 모르나 그로 인하여 죄가 문턱을 넘는 건 시간문제다. 우린 그렇게 대단히 의지가 강하거나 선한 존재가 아니다.

 

여기서도 보면 앞서 그럼 대화가 필요했다. 먼저 알리고 그 의도를 설명했어야 한다. 또는 이를 적대시하기 전에 무슨 일인가? 하고 묻고 그 의도를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결국은 지레짐작 악의적으로 이를 판단하는 일이 문제다. 오늘도 서로를 탓하는데 어떠하든지 총부리를 겨누고 자국민을 향해 군을 동원한 일은 잘못이다. 이를 비호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백 가지 천 가지 더한다 해도 그것은 결국 자신도 그 스스로의 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상대가 그랬다고 자신도 그러면 똑같은 것 아닌가? 성경의 지혜는 일깨우신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2:25, 15:1).”

 

오늘 우리 사회가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그 문제가 단순해진다. 결국 오늘 본문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자신을 위한 행위는 모두 우상숭배가 될 소지가 높다. “여호와의 온 회중이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서 돌아서서 너희를 위하여 제단을 쌓아 너희가 오늘 여호와께 거역하고자 하느냐(수 22:16).” 분명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이를 성별하여 두는 곳은 하나님이 정하신다. 저들의 의도가 어떠하였든지, 어쨌든 그 일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다. 우상숭배란 게 별 거 아니다. 당장 화를 면하고자 고육지책으로 우선하는 것이다. 그것이 선한 의도에서였든지 어쩌든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출 20:4).”

 

이와 같은 경계를 세우신 것은 우리의 속성이 어떠한지 잘 아시기 때문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있을 동안 저들은 선한 의도에서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어 이를 하나님이라고 우겼다. 이후에도 저들은 이를 버리지 못했다.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0:29).”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일이 놀라울 게 없는 것은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서로 다른 하나님을 숭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 26:1).”

 

그렇다면 저들이 오늘 단을 쌓은 것은 좋은 의도에서였다 해도, 그래서 당장은 서로의 오해가 풀렸다 해도 그것으로 두고두고 우상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기를 위한 모든 것은 우상숭배가 된다. 저들은 이를 이미 학습한 바 있다. 먼저는 브올의 사건이다. “브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회중에 재앙이 내렸으나 오늘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받지 못하였거늘 그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하여서 오늘 너희가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고 하느냐 너희가 오늘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수 22:17-18).”

 

저들이 요단에 이르러 모압 평지에 있을 때 모압의 우상 바알브올을 숭상함으로 2만4천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염병에 걸려 죽어야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민 25:1-3).” 또 하나는 아간의 안이하고 사사롭게 여긴 죄이다. 첫 도성 여리고는 온전히 불살라 주께 바치는 첫 전투였는데 아간은 하나님께 구별된 것을 전리품으로 탐하였다. 그로 인해 아이성 전투에서 36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수 7장).

 

이와 같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 그저 그럴 수 있는 것으로 여겨 임의로 자기를 위한 유익은 우상숭배가 되고 이는 결정적으로 공동체를 죄에 빠뜨린다. 이에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6-7).” 그러므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섣부른 판단과 치닫는 행동도 문제지만 스스로도 속이는 ‘옳다 여기는 일’에 대하여 우리는 항상 깨어 근신하고 조심해야 한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9).” 스스로를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린 그렇듯 선하지 않다. 의지도 약하다. 오늘은 옳다 하다 돌아서면 판단이 바뀐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10:12).”

 

오늘 말씀에서 요단 동편의 민족이나 요단 서편의 민족이나 모두가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이었는가를 살핀다. 이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르시되,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7).” 우리가 죄에 대해 엄격하고, 이를 대하는 데 있어 단호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 12:15-16).”

 

하여 오직 우리가 즐거워할 것은,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시 33:1).

 

이에,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8-9).

 

그리하여,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