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전봉석 2025. 2. 17. 04:41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수 24:15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시 35:13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으로 불러 모았다.’ 저는 이제 남은 생을 다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는가를 조상 아브라함의 때로부터 밝히 듣게 한다. 저들을 세겜으로 불러 모은 데는 먼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창 12:6-7).”

 

또한 이스라엘 곧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온 후에 그의 딸 ‘디나’의 일이 있었던 ‘사건’을 각성하고(창 34장), 이후 각종 우상을 묻어버린 개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35:4).” 그리고 이제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대로 계약을 새롭게 한 맹세의 장소였기 때문이다(8:30-35).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소집하여 언약을 갱신하기로 하고 세겜에 모이게 하였다.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세겜은 족장 시대 이후 줄곧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다. 이곳에서 우상을 척결하고 주 앞에 맹세하고, 언약을 갱신한 곳이다. 그렇게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곧 우리가 주 앞에 나아올 때, ‘하나님 앞에 보이는 일’로 나의 이 시간도, 우리가 매순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때에, ‘첫 신앙의 자리’는 잊힐 수 없다.

 

가끔 회상하고 기억하기를 어릴 때 뭘 아직 분별하기도 어렸을 때 나는 자주 주의 이름을 부르며 투덜거리거나 용서를 빌거나 무엇을 바랐던 게 생각난다. 더욱이 중학생이 되고 세례를 받을 때 어린 게 뭘 안다고 그렇듯 울면서 나의 죄를 비통히 여기며 주가 달려 십자가에 죽으신 나로 인한 은혜에 그처럼 감동하였었는지 모르겠다.

 

운전을 하고 오면서 예전에는 이 시간까지 놀거나 누구와 어울리던 시간인데 이제는 나를 깨워 주 앞으로 나아오게 하는 것이 신기하였다. 문득 떠오른 말씀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오늘의 나 또한 그러한 것에 놀라워하며 감사하였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있어 첫 신앙의 자리라 할 수 있는 세겜에서 다음 세대는 우상을 모두 타파하여 땅에 묻은 장소이면서 이제는 언약의 갱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디딤 발이 굳건해야 한다. 두 발을 다 떼고는 설 수 없는 것 같이 헛되이 떠도는 소문으로 겉돌아서는 안 된다.

 

예배 후 누가 같이 차 한 잔을 했으면 하는데 가지 않았다. 늘 그렇듯 오늘의 시국과 그에 따른 색깔론으로 이념을 논하는 것에 신물이 난다. 그저 그렇다고 하여 기본 일간지나 방송의 뉴스를 부정하고, 이를 모두 좌파가 책동하여 선점하였다는 식으로, 해서 개인방송과 저들끼리의 되풀이되는 주장에 함몰된 것이다. 같이 갔으면 하는 아내의 부탁에도 나는 그런 자리를 꺼려하여 피했다. 더욱이 주일에, 예배 후에 둘러앉아 ‘그런 이야기’로 마음을 두고 싶지 않았다. 어쩌다 그리 망상의 늪으로 빠져든 것일까? 성경은 우리의 디딤 발의 발판이다. 기준이고 근거다. 말씀하시길,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히 10:32).”

 

오늘에 이룩한 이 자유와 평화라는 게 소위 저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렇듯 오늘 우리는 세겜에 모여야 한다. 처음 가졌던 신앙의 통회와 자복을 되찾아 가져야 한다. 오늘 우리는 타성에 젖어 사는 것은 아닐까? 여전히 나의 한 날은 간절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살고 있는가?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

 

우리의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설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하여 백성들은 어찌 이를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으나,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때론 누구라도 자식조차 강제할 수 없다. 믿음도 신앙도 그러한데 삶에 있어 생의 일선에서 우린 항상 무엇으로 마음을 다잡고 살고 있는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 그 은혜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신 8:3-4).” 하여 나는 이제 쓸데없는 논쟁을 피한다. 돼도 않을 사람과의 대화에서 입을 다문다. 믿음은 강요할 수 없고 신앙은 강제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하신 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이를 인정하는 데서 우리는 섣불리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남을 향해 총구를 겨누지 않는다. 시국이 어지러울 때 자신을 돌아보는 게 지혜이다. 누구를 탓하기보다 자신의 자세를 바로하는 게 지혜이다. 이를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자리가 있고 그저 말과 말의 범람으로 서로의 감정만 상할 수도 있다. 우선은 입을 다물라. 들어야 한다. 보고 느껴야 한다. 내가 입을 열고 있으면 들리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다. 그저 자기 말에 심취한 자들은 자신을 속이는 자이다.

 

이에 ‘언약궤가 세겜으로 옮겨졌다.’ 제단이 세겜에 세워져 있음을 뜻한다. ‘여호와의 앞’이란 말씀이 있는 곳이다. 나의 기도가 드려지는 곳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시는 곳이다. 이에 우리는 세상을 논함이 아니라, 이를 보며 주의 나라를 소망함이다. 오늘을 두고 씨름하는 게 아니라 ‘영원한 오늘’에서 자유하는 것이다. 이를 여호수아는 되묻는다.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곧 ‘만일 너희 눈에 악하다면’ 하는 것으로 자신의 이 말이 ‘내키지 않거든’ 하고 되묻는 것이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바람직스럽게 보이지 않거든’ 즉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내키지 않거든’ 어쩌겠나? 결코 억지로나 마지못해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나님도 이를 강제하지 않으셨다. 다만 말씀하셨고, 임재하셨으나, 가인은 그럼에도 동생 아벨을 죽였다. 그의 후예 라멕은 ‘아다와 실라’를 두고 자신의 죄를 자부하였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창 4:19).”

 

죄란 참으로 끔찍하여서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23).” 하고 자신의 죄를 자랑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능멸하기를,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24).” 한 마디로 사는 일이 가소로운 것이다. 죽음 너머의 일이 두렵지 않은 것이다.

 

저의 ‘아다와 실라’는 ‘장식하다, 딸랑거리다’ 하는 뜻으로 자신을 꾸미고 치부하는 것으로 라멕의 문화는 부패의 끝판이다. 이것이 온 지면에 가득하였다. 그에 이르러 노아의 때에 모두 그렇다 해서 전부 그런 것은 아닌 것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곧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그렇다 저렇다 해도 ‘그러나’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있었으니, 오늘의 나는 어떠한가? 우리 자신은 그러한가? 어쩔 텐가? 하고 오늘 여호수아가 묻는 게 아니겠나?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오직 우리는 성실과 진정으로 섬겨야 한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하는 말을 임종을 목전에 둔 여호수아가 말했다. 물론 여호수아의 의도는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을 새롭게 다지기 위해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어찌 우리 의지로 가능하던가? 언약을 갱신함에 있어, 여전히 어중간한 태도로 이방의 우상과 우리의 하나님을 동일시하여 종교화합을 운운하거나 신앙의 자유를 논하는 자리에서 우린 더 이상 무슨 말로 서로를 촉구하고 갱신할 수 있을까?

 

신앙의 중립이란 없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이를 오늘 우리의 형편과 사정에 두고 논한다면 세상이 외치며,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묻는 데서 좌니 우니, 빨갱이가 어떻고 수구세력이 어떻고, 백날 말씨름 해봐야 소용없다. 아내는 같이 좀 대화하고 싶은 건데, 하고 그 자리에 가지 않은 것을 두고 뭐라 하는데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저의 주장을 들을 게 없고 저도 나의 말을 들을 리 없는 자리에서 종교와 정치 이야기는 헛될 뿐이다. 같이 성경공부를 했으면 한다는 말에도 나는 다만 주께 아뢸 뿐이다. 그리하실 거면 주가 행하실 것을 바라면서….

 

오늘 여호수아는 논쟁하자는 게 아니다. 너희 의견은 어떠냐? 하고 묻는 게 아니다. 양쪽 다를 택할 수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나는 어느 쪽이 아니라 선과 악을 본다. 참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한다. 우상을 섬긴다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따른다는 궤변은 통할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긴다면 모든 우상을 배격하는 것이 마땅하다. 빛과 어두움이 같이 공존할 수 없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성경은 오직 일심(一心)으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에 오늘 우리의 사리분별은 이 땅에서 사는 일을 두고 씨름하는 게 아니다. 우린 이를 피한다.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함께 가까이 나아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이니라(사 45:20).” 세상이 외치고 부르짖는 이상과 가치는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는 무지한 일’이다. 미국 국기를 들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찬송을 부르고, 헌금을 걷고, 돼도 않는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무리들에 대하여… 이를 공격하듯 총구를 겨누고 서로의 탓만 하는 또 다른 무리에 대하여… 아, 우울한 날들이여!

 

“그것이 둥근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메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그들에게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느니라(렘 10:5).”

 

오늘 여호수아는 죽음을 앞두고 설교하였다. 그리고 죽어 이 땅에 묻혔다. 저의 시대도 갔다. 어느 훗날 주의 나라에서 우리가 만났을 때, 나의 오늘 이 묵상글을 보며 나의 다짐을 말하며 고맙다고 말할 기회가 있을까?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수 24:19).” 이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근신하여 말을 멈추고, 입을 닫아, 소모적인 논쟁을 피한다. 주께 아뢰어 고한다.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시 35:1).

 

하여 오늘도 시편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자리에서,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9).

 

그러므로 나는 다만 저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뿐,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13).

 

부디,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23-24).

 

하여,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27-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