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2장 / 한 왕의 통치
250223 주일
이사야 32장
한 왕의 통치
사 32:1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사 32:15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사 32:20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
들어가는 말
우리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았다. 오늘은 ‘영원한 현재’이다. 이는 마치 ‘이미’와 ‘아직’ 사이에 끼인 것 같다. 이스라엘은 ‘이미’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갔다. 하지만 저들은 ‘아직’ 가나안을 정복하지 못했다. 우리는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저마다 ‘아직’ 광야를 돌고, ‘가나안’을 정복하며, ‘사사의 시대’를 산다.
회심과 동시에 기본구원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성화구원을 이뤄가야 한다. 인생이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곧 신앙의 여정에서 누구는 ‘광야’를 떠돌고, 누구는 ‘가나안 사람-우리의 자아’을 정복하지 못하고 산다. 성도란, ‘이미’와 ‘아직’ 사이에 끼였으나 날로 새로워져 간다.
바울은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 곧 우리도 육신으로 있으면서 천국의 ‘영광-상급’을 쌓아간다. 이는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본문이해
1. 한 왕: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한 왕’을 주목하게 한다. 이는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장차 한 왕이 공의”로 모든 세계가 정의로 다스려질 것이다.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1).” 즉 ‘예수의 의’로 우리는 믿음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입었다. 공의로 우릴 통치하시고 정의로 다스리신다.
2. 존귀한 자: 우리는 ‘존귀한 자’로 ‘존귀한 일’을 도모한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8).”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존귀하다. 우리는 존귀함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존귀한 일’을 한다.
3. ‘길갈’에서 ‘보김’까지: 세상은 어리석고 우둔하다. 불경건하며 거짓되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삿 2:1).”
‘길갈’은 이스라엘이 ‘할례’ 곧 회심한 곳이다. ‘애굽의 수치’를 떠나게 하신 장소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수 5:9).” ‘보김’은 ‘벧엘’로 회개의 성지다.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삿 20:26-27).”
4, ‘이미’와 ‘아직’ 사이: ‘이미’와 ‘아직’의 거리는 ‘길갈’에서 ‘보김’까지이다. 우리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았다. 우리는 ‘보김(벧엘)’에서 운다. 회개는 주께 나아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5. 안일한 여인들아: 안일한 상태에 빠지지 말 것은, “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9).” 우리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말씀과 기도를 소홀히 할 때 안일한 자리에 빠진다.
6. 성령을 부어주시리니: 그러할 때 성령의 인도하심이 우리를 의와 평안의 길로 인도하신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15).” 하면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17).”
오늘 본문의 시대적 배경은 ‘한 왕’, 히스기야 시대이다. 내용의 완결성은 장차 오시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의 모든 지칭과 예표는 예수시다. 역사적 배경은 히스기야의 통치시대이나 종말론적인 배경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차 임할 재림의 시대이다. 곧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기까지이다.
1. 한 왕의 통치(1-4)
① 한 왕의 공의로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다.
② 한 왕은 광풍을 피하는 곳 같고, 폭우를 가리는 곳 같다.
③ 한 왕은 마른 땅에 냇물 같고, 곤비한 땅에 바위 그늘 같다.
④ 한 왕은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하게 할 것이다.
⑤ 한 왕은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이게 할 것이다.
⑥ 한 왕은 조급한 자의 마음에 지식으로 깨달음을 더할 것이다.
⑦ 한 왕은 어눌한 자를 민첩하게 하고 말을 바로하게 할 것이다.
2. 어리석은 자와 존귀한 자(5-8)
※ 잠언에서 보는, 어리석은 자
①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을 좋아한다.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잠 1:22).” 그래서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킨다(32).
② 어리석은 자는 돌아오지 않고 스올을 알지 못한다.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9:4, 16, 18).”
③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고 행동을 삼가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14:15).”
④ 어리석은 자는 자기 노를 다 드러낸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29:11).”
※ 오늘 본문(5-8)에서 보는 어리석은 자와 존귀한 자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부르지 아니하겠고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아니하리니(5).”
-어리석은 자
①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한다.
②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하게 행한다.
③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른다.
④ 주린 자의 속을 더욱 비게 한다.
⑤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빼앗는다.
⑥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다.
⑦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한다.
-존귀한 자
①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한다.
②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선다.
3. 안일한 여인들아(9-12)
우리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여인들, 신부들이다. 이에 “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9).” 하고 우릴 부른다. 그런 우리가 안일한 여인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① 염려함으로 근신해야 한다. 염려의 긍정적인 측면은 우리를 근신하게 성실하게 한다. 수확의 때에 ‘포도 수확’이 있어 ‘열매를 거두는 일’이 남았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 우리의 수확은 주 안에서 성실함으로 일궈낸다.
②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염려가 없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으로, 얼핏 좋은 말 같으나 ‘겁이 없다’는 소리다. ‘안전 불감증’ 같다. 오늘 본문은 ‘당황할지어다!’ 하고 외친다. 함부로 풀어헤친 ‘옷을’ 바로 하고, ‘베로 허리를 동일지어다.’ 곧 행동거지를 바로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안일한 여인들은 후회할 것이다. “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12).”
4. 어리석고 안일한 자의 땅에서(13-15)
안일한 자의 땅에는 가시와 찔레가 난다. 궁전이 폐한다. 인구가 많던 성읍이 적막해진다. 오벨과 망대가 영원히 굴혈(도둑 소굴) 같이 된다. 하나님이 이를 회복시키심으로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신다. 그럼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고, 그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된다.
5. 정의와 공의(16-20)
메시아 곧 ‘한 왕’의 통치가 공의다. 그 때에 정의가 황폐한 광야를 다스린다. 공의가 아름다운 밭과 같이 거둘 것이 많다.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다.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 우리는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을 것이다. 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된다.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것 같이 수확이 있을 것이다.
나오는 말
하나님의 통치가 ‘한 왕’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어리석은 여자들’로 심히 우려되는 현상을 예견할 수 있다. 이는 개인에 대한 경고이고 동시에 공동체에 대한 예언이다. 이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15).” 앞서 이스라엘의 상태를 통해 오늘 우리의 상태를 경고하였다(9-14).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한 나라’는 곧 장차 의로우신 왕 메시아의 통치가 시작되는 곳이다. 그때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이 온전한 조화를 이룬다. 그 나라의 통치 원리는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16-17).” 광야 같이 황폐했던 우리 영혼은 아름다운 밭과 같이 변하여, 하늘의 축복이 수반된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18-19).”
곧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제공된다. 자연적인 축복이 이루어진다. 곧 우리는 ‘영원한 안식과 평안’에 들어간다. 곧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자들의 삶의 특성과 다른 피조물, 자연의 풍성함이 동일하다(17). 그리하여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20).”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은 편안하고 행복한, ‘물기 마를 염려가 없는 땅’에서 ‘농부가 뿌린 씨앗마다 풍성한 수확의 결실’을 맺으며 풍성한 삶을 산다. 소와 나귀를 이끌어온 농부는 가축들이 이를 뜯어먹는 것으로 즐거워한다.
그러므로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우리는 ‘길갈에서 보김까지’ 날마다 날로 새로워져간다. 하여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 우리는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8, 1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