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전봉석 2025. 2. 21. 05:05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삿 4:4-5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 39:6-7

 

 

에훗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 이는 거의 새로운 시대가 열릴 때마다 되풀이 되는 일과 같다. 죄악이 그만큼 우리 삶을 잠식하고 있다.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삿 2:19).” 우린 늘 이와 같이 악을 나란히 하고 길을 걷는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3:7).”

 

이에 오늘 말씀도 ‘에훗의 죽음’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능력을 대행할 지도자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삶의 구심점을 잃으면 그 기준은 모호하여 저마다 자기 뜻대로 산다. 이는 곧 또 다시 우리를 타락시킨다. 에훗의 치하에서 이스라엘은 평화를 이루었다. “그 날에 모압이 이스라엘 수하에 굴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3:30).”

 

그렇게 ‘또, 악을 행하매’ 사사 시대의 일반적 현상이다. 이는 오늘 우리의 하루하루가 그러하다.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2:19).”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이루어진다. 앞서 하나님은 고통을 더하신다.

 

오늘은 저들을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다(4:2). 즉 고통은 가면을 벗은 죄이다. 죄의 결과로 고통이 따른다. 죽음은 그 절정이다. 마치 우리의 죄악은 늘 되풀이 되는 생이어서 방금 씻은 돼지가 다시 오물에 드러누워 뒹구는 것 같다. 하여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마 8:32).” 하시는 말씀으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죄의 속성은 연속적이란 것이다. 한 번 그러고 마는 게 아니다.

 

하여,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이는 의지적으로 우리가 주를 바람인데, 바울은 그리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기껏 말씀을 묵상하고 이와 같이 글로 쓰며 주 앞에 다짐하고 돌아서기 무섭게 다시금 내 앞에 방종과 죄악이 따라든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다시 또 돌이켜 일어설 수 있도록 어떤 일상이나 사연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다. 오늘은 여선지자 드보라이다.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삿 4:4-5).”

 

랍비돗이 어떠한 자인지 모른다. 성경에 언급이 없다. 다만 그 이름의 뜻은 밝혀졌다. 번개 또는 횃불이다. ‘랍비돗의 아내’라고 굳이 설명하는 것은 ‘불꽃같은 여인’이란 의미가 짙다. 성경에 더 이상 랍비돗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저가 죽었거나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여선지자이다.

 

성경에서 여자로 선지자의 사명을 맡긴 사람은 앞서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있다.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출 15:20).” 그리고 이어 훌다가 있다.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그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로서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하였더라 그들이 그와 더불어 말하매(왕하 22:14).”

 

이들은 하나님께로 예언자적 은사를 받아, 찬양을 하고 재판을 하고 선과 악을 구분하여 주 앞에 아뢰는 일을 하였다. 때로는 왕 앞에 나서 저의 죄를 지적하여 목숨을 걸고 아뢰는 일도 하여야 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삼하 12:7-8).”

 

오늘 드보라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에 거주하였다. 라마는 납달리 지파의 지경에 속한 것이다(수 19:36). 그러나 오늘 여기에서의 라마는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18:25),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9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훗날 예레미야 선지자가 외친 그곳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렘 31:15, 마 2:18).”

 

드보라가 그곳 라마에 있는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다. ‘드보라의 종려나무’란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재판했던 것으로 유래한다. 그렇게 한 곳에서 늘 같은 일을 하며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얼마나 복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드보라의 종려나무’로 알려질 정도이면 그저 단순하게 몇 번 그렇게 한 게 아닐 것이다.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하는 데 있어 묵묵히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마주하며 무던할 수 있는 것이 귀하다. 거기 ‘거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뜻은 ‘거주하다’란 의미와 ‘앉다’란 의미가 같이 있다.

 

곧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오늘도 이렇듯 또,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시적으로는 아무런 성과도 없고 특별히 뭘 어찌 바꾸거나 변화시키는 것 같지도 않은데……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대부분은 그러하고, 나는 그러한 일정한 것의 되풀이 되는 것을 사랑한다. 새벽 세 시 언저리에 교회 근처 작은 떡집이 불을 밝히고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 여덟 시쯤이면 건물 청소부 아주머니의 바구니통과 걸레와 여러 도구를 실은 수레가 복도를 지나서 화장실 청소를 시작한다.

 

매일 그렇듯 드보라는 종려나무 아래에서 재판을 하였을 테고, 이에 사람들은 그 자리를 “드보라의 종려나무”라 하였다. 재판과 관련하여 사사 시대에는 사사의 임무 중 하나가 재판하는 일이었다. 서로의 송사를 풀고 주의 뜻대로 이 일을 판가름했다. 또한 사사는 전쟁에는 앞서 구원자로 나섰다.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다(2:16). 평상시에는 백성들의 송사를 맡아 다스림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시행될 수 있도록 했다.

 

드보라는 여자로서 사사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런 위치에 있게 된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하여 ‘대언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그 이름 앞에 ‘여선지’를 덧붙였다. 곧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황에서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하는 일도 이와 같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로 왕 같고, 제사장 같으며, 때로는 사사로의 사명도 준행한다.

 

이와 같은 나의 일상이 복되다. 성경은 이를 일깨우신다. 그러나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3).” 이는 사사시대에만 그런 게 아니고 인류의 모든 역사가 그러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14-15).”

 

곧 우리의 오늘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데서 항상 판단의 기준을 삼아야 한다. 어쩌다 뚝딱, 오늘의 나로 사는 게 아니었다. 그렇듯 나의 일생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죄의 종으로 살다 ‘출애굽’의 과정과 같이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나를 이끌어내신 역사가 생생하다. 그 뒤 이어졌던 ‘광야’ 같은 세월도 그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으니,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16).”

 

이 모든 게 복을 주려하신 것이다. 복이란 우리의 자유함이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이를 알면 죄의 뿌리를 놓고 날마다 씨름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그러므로 종과 아들의 차이는 자유함으로 판가름 난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35-36).”

 

곧 오늘도 ‘나의 종려나무 아래에서’ 나는 묵상글을 쓴다. 늘 이렇듯 매인 것 같으나 이것으로 나는 자유하다. 앞서도 밝힌 것처럼 우리의 일상에 구심점이 없으면 오락가락하기 일쑤다. 오늘은 뭐하지? 하면서 나른함에 빠지거나 혹은 일에 쫓기거나 하면서 자신의 일과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눈 뜨면 아침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나의 종려나무’에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바울이 제 몸을 쳐 복종시켰다 하는 것도 같은 의미로 이해한다. 오늘처럼 때론 더 자고 싶어서 잠시 침대에 앉아 갈등할 때도 많다. 어떤 날은 묵상글을 짧게 쓰고 싶거나 안 쓰고 눈으로만 읽고 묵상했으면 싶을 때도 있다.

 

이게 뭐라고! 하는 것으로 나의 한 날의 구심점을 삼는 것은, 이렇게 글로 쓴 것을 나는 하루 중에 아무 때나 자주 손에 들고 다시 읽을 수 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혹은 병원에서 무료하게 순번을 기다릴 때도 나는 늘 그 날에 쓴 묵상글을 읽으면서 되새김질한다. 이렇듯 단련된 일상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인격이 되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날로 새로워질 것을 믿는다. 당장 가시적인 어떤 성과가 없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6-8).” 그러할 때 하나님의 응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늘 기대이상으로 나타난다. 곧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묵묵히 같은 동선을 따라 움직인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이와 같은 말씀으로도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짐작하여 바라는 것 이상의 손길로 주가 함께 하고 계셨음을 더러는 한참 지나고 난 뒤에야 안다. 혹은 지금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로 알게 된다. 그러므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4-36).”

 

오늘도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였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를 고통에 넘기셨다. 우리는 신음하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주는 말씀으로, 주의 사사를 세워 오늘의 모든 형편과 사정을 바꾸어 축복이 되게 하신다. 나의 약함이 도리어 강함이 되게 하신다.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이렇듯 말씀 앞에 나를 앉힐 뿐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음으로 오늘의 일과는 늘 ‘드보라의 종려나무’와 같이 같은 시간, 같은 일상이다. 누구는 무료하다 하고 누구는 정체된 것 아닌가? 하고 묻는데,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하여,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이에,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 131:2).

 

모세는 그 모진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품에 안은 것 같이 느꼈고, 이를 성경의 여러 믿음의 사람들도 같아서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이와 같이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 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신 1:11).” 하고 오늘도 나로 하여금 이 길을 가게 한다. 하여,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시 39:1).

 

섣불리 부화뇌동하듯 여러 사람들의 말에 덩달아 입씨름하듯 누구를 두둔하거나 비난할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5).

 

이와 같이 인생이 허무함을 알고,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