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삿 7:18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11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6:14).” 저는 이것이 미심쩍어서 하나님을 시험하여 양털 위에만 이슬을 붓거나 마르게 하실 것을 확인하였다. 그만큼 그는 미약하고 주저하다 주의 길을 따랐다.
이제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삼백 용사를 선발하여 미디안을 친다. 이 전쟁은 기드온이 미디안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면서 끝난다. “세바와 살문나가 이르되 네가 일어나 우리를 치라 사람이 어떠하면 그의 힘도 그러하니라 하니 기드온이 일어나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그들의 낙타 목에 있던 초승달 장식들을 떼어서 가지니라(8:21).”
앞서 기드온을 따르는 수만 명의 이스라엘의 사람을 돌려보내고 3백 명만을 정예부대로 뽑는다. 이때 손에 물을 움켜 핥는 자들을 그리하였다.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7:6).” 여러 해석을 찾아보았다. 용사의 순발력과 방어력을 본 것이라는 해석이 여럿 있었다. 나는 오히려 거꾸로 생각하여 점잖고 기품 있는 자들을 돌려보내고 손으로 물을 움켜 개처럼 핥는 자들을 뽑으셨다. 이는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2).” 하신 말씀으로 이 시험의 의도를 알겠다.
이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하여,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하시는 말씀으로도 그리 여겨진다. 곧 우리의 사역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9).”
하여튼 이렇게 뽑힌 3백 명으로만 기드온이 주의 명령을 수행한다. 이 전쟁은 그의 힘과 능력에서 도무지 불가능하였음을 강조한다. 사사시대에 각 지파의 단결력은 미약했다. 자칫 기드온과 그의 용사들은 고립되어 전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드온을 붙들고 계신 이는 그에게 능력과 지혜가 되신 하나님이시다. 곧 오늘도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여기고, 그리 하였다고 하여 교만할까 하여 우리 생활을 비틀거나 돌아가게 하신다. 불가능한 가운데 주의 일을 수행하게 하신다.
애굽 왕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키실 때도, 저들로 그 물을 걸어서 건너게 하셨고 달려서 따라오게 하셨다(출 14:26-31). 또한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가 유다를 침략했다. 유다는 나약했고 앗수르는 막강하여 도저히 이길 수 없을 때,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으로 물리치게 하셨다. “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왕하 19:20).” 그 결과 밤새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이 순식간에 몰살되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35).”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 되심을 우리로 알게 하신다. 우리가 이를 보고 듣고 느낌으로 주를 인정하는 데서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우리로 주를 알고 주를 온전히 바라게 하심이 주의 기쁨이다. 구약 시대의 수많은 전쟁에서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은 이와 같이 능하신 권능으로 하나님을 드러내셨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시 24:8).
이는 오늘 말씀에서 그 이유가 분명히 밝혀진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 7:2).” 결국 이는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셔야 해서가 아니라, 우리로 그 하나님을 인정할 때 가장 감격스럽고 기쁨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 우리의 교만과 아집이 우리로 눈을 멀게 한다.
이 땅의 현실로도 알 수 있듯이 서로의 이해와 타협은 묘연하다. 갈등과 반목은 결국 상대를 굴복시켜야 끝이 난다. 그와 같은 파국의 결과로 오늘 날 우리나라가 유일한 남북 분단국가로 여전히 휴전중이면서도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서로를 적대시하고 살고 있는 것과 같다. 그렇게 쪼개진 남한에서 또한 늘 서로가 갈려서 너는 어느 쪽이냐? 하는 지경인데, 이와 같이 전쟁 같은 팽팽한 긴장과 경계가 서로를 화합하지 못하게 한다. 이에 베드로 사도는 설교하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자신은 아니라고 하나 누구라도 우쭐하여 자신을 위시하여 나 아니면 안 될 것처럼 군다. 저마다 말을 얹고 사회를 요동치게 하는 오늘의 현실이 마찬가지다. 더욱이 교회가 나서서 그 일에 선봉이 되는 게 나는 부끄럽고 민망하다. 결국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2-13).”
이에 오늘 기드온의 전투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이를 알게 하신다. 고작 삼백 명으로 뭘 할 수 있을까? 그런 가운데 우리의 오늘 싸움은 이미 승리한 것으로,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 이를 말씀하신 후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 결국 우리가 싸우는 것 같으나 이김은 여호와의 것이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일련의 사회 사건과 현상을 볼 때 이와 같은 시각으로 예의주시한다. 섣불리 어느 쪽을 두둔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우리는 악을 보면서 선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모든 악함 가운데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본다. 다만,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세상 끝날에서 우린 이 말씀의 결국을 본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심을 주목하고,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4, 5-6).”
말씀이 현실을 비춘다. 현실에서 말씀의 뜻이 풀이된다. 저마다의 주장에서, 각자의 변명과 변호에서 우리는 사람의 악함과 그 한계를 본다. 그런 가운데 누구는 올곧고 누구는 변질된다. 누구는 악하여서 왜곡하고 누구는 이에 동조하며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건다. 참 다들 각양각색이다. 우리의 죄 된 모습이 그대로 비춰진다. 누가 뭐라 하며 자기 생각을 말할 때 나는 중간에 그 말을 돌려서, 보면서 배우자고 권한다. 있는 그대로 우리의 본색이다. 저들이 못 배우고 못 가져서 그렇겠나? 주동자라 할 수 있는 자들이 모두 육사출신이다. 누구는 그 가운데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여 주목을 끌던 수재였다. 살면서 무엇으로 저들은 그 젊을 때의 기백과 가치관을 잃은 것일까? 이 땅의 권세나 명예가 무엇이라고…….
오늘 하나님은 자신들의 수효를 믿고 자긍하지 않도록, 두려워 떠는 자와 무릎을 끓고 물을 마시는 자를 돌려보내고 삼백 명만 남기셨다(3-8).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사람의 숫자나 칼과 창과 병기의 수효에 있지 않음을 알게 하신다. 우리 교회의 시작이 고작 열한 명의 사도와 백이십 명의 성도로 시작하였다.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3-14).”
당시에도 ‘십자가의 도’는 하찮고 어리석은 실패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런 가운데 상상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이와 같은 영적전쟁은 오늘에도 이어져 하나님의 능력으로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 아무리 적은 무리라 해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일인 듯해도, 승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성령의 전신 갑주를 입는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다들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안개와 같을 때, 우린 오히려 안전하다.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눅 21:18).”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칼날’이 보호하신다. ‘여호와의 칼’이라 외칠 때,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삿 7:18).” 그러할 때에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20).”
하나님의 칼은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 그리고 동방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그들은 7년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이제 하나님의 칼 앞에 징계를 받는다. 모세의 마지막 노래에서, “내가 내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이 정의를 붙들고 내 대적들에게 복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할 것이라(신 32:41).”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수 5:13).” 우리의 온 생에 있어 하나님의 칼은 언제나 우리를 지키셨고 우리의 대적을 물리치셨다.
오늘 말씀은 이르신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 7:2).” 이에 우리는 오늘도 이 말씀을 붙들고 이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우리는 승리한다. 우리는 그의 집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 3:6).”
오늘 본문은 이를 알리신다.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주가 내 안에 거하실 때, 세상은 아무리 요지경이라 해도 그와 같은 세상에 편승하여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결국 이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시 8:2).
하여,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나는 오늘도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주 앞에 선다. 그러할 때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42:1-2).
이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5).
그러므로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8).
하여,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