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

전봉석 2025. 2. 26. 05:23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삿 9:56-57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

시 44:3

 

 

여룹바알은 기드온으로 저가 우상 바알 단을 훼파한 일로 그 이름을 얻었다. 오늘 본문은 기드온이란 이름 대신 이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바알을 극심히 섬기는 자기 친족들과 더불어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 하였기 때문이다.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삿 9:4).” 그는 일찍이 바알 단을 훼파한 기드온의 행동과 반대로 바알을 추종하는 세력들과 결탁하여 기드온 곧 ‘여룹바알’과 대조된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이 그의 첩 가운데서 낳은 아들이다. 그 이름의 뜻은 ‘아버지는 왕이시다’ 하는 것으로 자신이 뒤를 이어 스스로 왕이 되려 했던 사실과 의미를 같이 한다. 세겜은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50km 지점의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의 성읍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에브라임 지파가 기업으로 분배 받은 땅이다(수 17:7-9). 그 후 도피성으로 구별되어 레위인의 성읍이 되었다(20:7).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총회를 이곳에서 개최한 점으로(24:1), 세겜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

 

아비멜렉이 그 부친 기드온의 므낫세 지파보다 모친 쪽 세겜 사람들과 가까이 하여 아직껏 잔존하던 히위 족속과 어울렸다. 세겜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이전에 히위 족속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이 차지하고 있던 성읍이다. 이는 아브라함 때나 야곱의 때에도 언급되는 바로 그 성읍이다(창 33:18-20, 34:2).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당한 사건도 기억이 난다. 아비멜렉은 부친 기드온과 모친 히위인 간의 자식인 셈이다.

 

하여튼 여룹바알-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에 그의 형제들 70인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5).” 아비멜렉은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세겜을 음모의 근거지로 확보했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게 기울었다. 바알의 신당에서 수입금으로 아비멜렉을 지원했다.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4).”

 

마음이 ‘기울어서’ 그리 돌아선다. 이를 ‘지지하다’란 뜻으로 시쳇말로 요즘은 누구를 지지하고 어느 정당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현재의 상황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사고와 판단은 되풀이 하여 일어난다. 세겜 사람들의 마음이 기드온에서 ‘돌아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는 일에 ‘지지하게’ 된 것이다. 오브라에 있는 그 아비의 집은 에브라임 북쪽 경계에 가까운 므낫세 지파의 성읍이다. 거기에서 자기 형제 70인을 한 반석에서 죽였다. 이와 같은 끔찍한 사건이 그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과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고 묵인되는 것을 본다.

 

근본적으로는 기드온이 ‘많은 부인’을 두었던 탓이다.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 세겜에 있는 그의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더라(8:30-31).” 다윗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두었으므로 아들과 딸들이 또 다윗에게서 나니(삼하 5:13).” 그 결과 왕위를 계승하려 서로 싸우는 일은 당연하다(왕상 1:25).“

 

일부다처제라는 축첩제도의 폐단은 성경 여러 곳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다(창 4:16-24, 16:1-6). 축첩제도의 부당함은 사람이 욕심을 품어 그 자식들이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게 된다. 이를 한 구절로 정리하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 결과는 고스란히 끔찍한 결과로 이어진다.

 

여기서 ‘밀로의 족속’이 나오는데,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삿 9:6).” 밀로는 다윗이 여부스 사람으로부터 빼앗은 다윗성에 속한 지역이다(삼하 5:7-9). 그곳은 세겜 성과 위치상으로 많이 떨어져있는 곳이어서 다윗 때까지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의 밀로와는 다르다. ‘밀로의 모든 집’이라 한 것처럼 ‘밀로’라는 어느 가문을 의미하는 듯하다. 아마 아비멜렉의 모친 쪽으로 외조부 전체의 가문을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밀로가 세겜 근방에 있는 요새나 망대일 것으로 추정하여, “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엘브릿 신전의 보루로 들어갔더니 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비멜렉에게 알려지매(46-47).” 하는 이곳일 수도 있다. 여하튼 서로 뜻을 같이 하는 세력이 어떻게든 있고, 서로가 부추겨 동지가 되었다 적이 되었다 하는 경우는 오늘 날도 다르지 않게 흔하다.

 

‘기둥 상수리나무’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 우상 숭배와 밀접한 관련으로 오래된 나무 그 자체로 무속적 의미를 갖는다. 이를 신격화하여 섬기는 일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면 흔한 일이다. 세겜의 이 상수리나무는 야곱이 자기 가족의 모든 우상을 그 밑에 파묻어 버렸던 상수리나무일지 모르겠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창 35:4).”

 

어쨌든 오늘 말씀에서 보면 왕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으로 사람이 스스로 나서서 얻는 게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제도와 권력은 이렇듯 무자비하고 극악하다. 형제 70인을 죽이면서까지 왕이 되고 싶었다. 아비밀렉의 죄악은 기드온이 생전 처첩을 여럿 두어 그 많은 자식들의 최후가 된다. 아비멜렉은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해 교묘한 말로 자기 모친 쪽 세겜 사람들을 포섭했다. 불량배들을 돈으로 샀다. 형제 70명을 죽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 결과가 자멸뿐이다. 그것은 다윗이 여럿 부인을 두어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 사건이 일어나게 한 경우와도 같다. 압살롬도 유사하게 백성들의 마음을 다윗에게서 떠나게 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했다(삼하 15:1-6).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잠 1:19).”

 

성경의 역사적인 사실과 그 진리는 오늘 우리 사회를 분별하고 주의하게 한다. 더욱이 오늘 말씀에서 ‘요담의 비유’라 할 수 있는 예화가 아주 우화적이고 문학적이다(7-21). 요담의 우화(寓話)는 당시의 사태를 통렬히 꾸짖는다. 아비멜렉의 가증스러운 행위(4-5)와 세겜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삼은 사실(6)과 극소수(7)를 제외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입을 막고 방관하는 외면을 그대로 그려주고 있다. 곧 ‘왕이 되기를 거절한 나무들의 우화’로 기드온의 처신을 상기시키며(8:22-23), 아비밀렉 외에 기드온의 70명의 아들이 왕위에 대해 취한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등은 나름대로의 귀한 재능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며 분수를 넘어 과욕에 빠지지 않는 겸허한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이를 바울의 설교에서 읽으면,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반면에 오늘 14-15절에 등장하는 가시나무는 아비밀렉을 비유하고 있다.

 

이를 다시 읽으면,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시 12:8).

 

하는 시인의 표현으로 오늘에도 여전한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를 지혜자는 이르길, “우매한 자가 크게 높은 지위들을 얻고 부자들이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전 10:6).” 하는 말씀으로 함축할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요담은 우화를 통해 아비밀렉과 세겜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다(16-19). 저들의 결국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놓여 멸망당할 뿐임을 경고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삿 9:20).”

 

요담은 아비밀렉이 자기 형제 70인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복수하기 위해 은밀히 군사를 양성한다든가 다른 사람들과 의기투합하여 나름의 방법을 간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심판을 하나님이 손에 맡기면서, 정의를 외치는 예언자적 행동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그의 행동은 오늘 우리가 지금의 이 현실을 어떻게 보고 듣고 느끼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같이 덩달아서 부화뇌동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성도란,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시 103:19).

 

하는 시인의 찬송처럼 하나님이 다스리실 것을 안다. 앎으로 무던하고 아니까 진득하니 인내하며 기다린다. 마음의 분을 갚는 일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하여 누구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있다면 이를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직고하는 것은 오히려 찬송이 되고, 사람을 불러 같이 동조하여 세를 불리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는 죄악이다. 이를 아비밀렉의 최후로 증명하는 듯하다.

 

“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 공격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그것을 불사르려 하더니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 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52-54).”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 외의 모든 사상이나 행위는 결코 세워질 수 없다. 반드시 무너지게 될 인간적인 발상과 행위와 사상을 좇지 않기를. 일련의 오늘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보면서도 이를 알겠다. 개인적으로는 저마다의 아집과 고집이 문제다. 두 형제를 기르는 엄마는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이제 초등학교 3학년 5학년 다니는 아들 둘이 하나는 정신과 약을 먹어야 그나마 그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 큰 애는 이를 보면서 그러한가, 거짓말과 나태함으로 온갖 유튜브나 게임에 빠져 산다. 동생을 패고 집안을 엎기도 한다. 이 아이도 약물치료가 필요한 것 같은데… 아이엄마는 술에 의존하고 담배를 피우며 아이들의 극성에 치를 떤다. 서로가 맞물려 악순환의 고리를 어찌 풀 수가 없다.

 

그러니 오늘을 살면서 우리가 사는 동안 죄악의 고리를 어찌 해결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뭐라 이르면 친구도 거절하며 ‘쉬고 싶다’는 말로 안 하고 싶은 것인데, 같이 성경공부하자, 성경읽기 하자, 하고 권하는 것도 거기까지라 다음은 기도뿐이다. 아이엄마가 눈물로 호소한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롬 1:24).” 어쩌겠나? 저들이 정말 모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

 

일련의 사회적인 혼란이나 개인적인 문제들이 실은 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2-23).” 하는 바울 사도의 설교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킨다는 것처럼, 나는 억지로라도 묵상글을 쓴다. 이처럼 책상에 앉히고 말씀을 되뇐다. 하루도 빠짐없이, 나름은 정해진 분량의 글로, 같은 동선을 따라서 나를 복종시키는 것은 한두 번의 예외가 나를 좀먹듯 해이하게 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는 아이와 성경공부가 있다. 잠든 사이 아이가 보내온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고후 13:7).”

 

이는 결국 복음을 알고 이를 증거하는 삶으로 ‘진리를 위할 뿐이다.’ 하는 다음 구절로 연결된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8-9).” 즉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진리가 우리의 명예나 명분보다 우선한다. 진리를 위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한다. 사람들의 혹평을 받고,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일이 있더라도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자세이고 마음이다.

 

결국 오늘 본문의 극악한 일이나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나 개인의 사정이 모두 하나여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우리는 분별하고, 주 앞에 엎드려야 한다. 주만 바라야 한다. 우린 누구라도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5:28-29).”

 

이를 두려워하고 주를 경외함으로,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심이라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 33:5-6).” 이번 한 주간은 이 말씀으로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있는데, 아이가 보낸 성경구절이나 오늘 읽은 본문이나, 일련의 여러 상황과 사건이나 모두가 한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

(시 44:3).

 

그러므로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6, 8).

 

오늘, 이 우울한 영혼들에게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25-2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