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전봉석 2025. 3. 1. 04:55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삿 12:6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시 47:7

 

 

서로의 반목은 특권의식 때문이다. 다툼은 분열을 가져온다. 길르앗의 입다가 사사로 부르심을 받고 암몬을 대적할 때에 에브라임 지파가 왜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는가? 하고 와서 다툰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삿 12:1).”

 

에브라임 사람들은 앞서 사사 기드온에게도 그리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8:1).” 저들은 마치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다. 기드온의 경우에서와 같이 사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자하여 시비를 건다. 이는 폭력적으로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 하고 위협적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한 축을 보는 듯하다. 서로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를 수 있으나 이를 극단적으로 해결하려 난입하고 부수고 때리고 욕하고… 오늘 우리 사회에도 ‘에브라임 사람들’ 같은 부류가 있다. 저들은 사사건건 억지와 시비로 폭력적이다. 오늘은 입다와 싸워 그가 길르앗의 우두머리로 군림하지 못하도록 멸하겠다고 한다.

 

여기서 ‘불’은 기드온의 막내 아들 요담의 우화에서도 ‘싸움’의 의미로 표현된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9:15).” 성경에서 불은 징계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에브라임 지파의 이와 같은 모습은 고질적이다. 늘 보면 그러는 사람이 또 그런다. 불평과 불만은 몸에 밴 습관과 같다. 이것은 죄에 대해 무뎌져서 그렇다. 스스로들 겉모습에 속고,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데서 그러하고, 시간이 약이라는 식으로 그 흐름에서 무뎌진다. 그렇듯 몸에 밴 불평과 원망을 남을 탓하고 상대에게 늘 총구를 겨눈다.

 

이에 같은 민족끼리 다투다 4만이 넘게 죽는다. 여기서 서로가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싶은데, 우리나라의 현재진행형과 같은 비극은 끝내 서로를 무찔러야 하는 적으로 돌리게 한다. 그렇게 해서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이천 명이다. 요단 나루턱에서 이 정도의 에브라임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 숫자는 출애굽 당시 첫 번째 인구 조사에서 에브라임 지파의 장정 수가 4만오천 명이었다. “에브라임 지파에서 계수된 자는 사만 오백 명이었더라(민 1:33).” 그 뒤 2차 조사에서 삼만 이천오백 명으로 줄었다. “이는 에브라임 자손의 종족들이니 계수된 자가 삼만 이천오백 명이라 이상은 그 종족을 따른 요셉 자손이었더라(26:37)”

 

이후 오늘에 사사 입다 당시까지 약 삼백여 년이 흐른 뒤라 당연히 그 인구가 증가했을 것을 감안하더라도 에브라임의 장정 사만이천 명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끔찍하고 심각한 일이다. 이 무슨 해괴한 짓인지, 죄란 참 우리를 몽매한 자들로 가둔다. 그 특징 가운데 하나가 서로 그 숫자가 많으면 안전하다고 착각한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자신들의 주장을 하는 데 있어 그 숫자가 관건이다. 또한 죄는 친절함으로 가면을 쓰고 서로를 괜찮다고 무마한다. 그러면서 도덕적인 회의에 빠진다. 그러다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린다.

 

오늘 본문에서 사사 입다는 암몬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 그 뒤 엉뚱하게도 이처럼 동족상잔의 비극이 발생하였다. 에브라임은 크게 패하였고(4-6), 이스라엘은 다시 안정을 찾는다(7-15). 그때마다 사사가 있었다.

 

우리가 주를 바람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곧 겉으로의 어떤 행위와 자신들의 결과로 얻는 게 아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22).” 나름의 수고와 노력을 주장한다 해도,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이와 같은 말씀에서 두려움이 든다. 우리 안의 ‘에브라임 지파’와 같은 교만이 없는가? 이는 믿음의 본분을 그르치게 한다. 스스로 도덕적으로 놓고 볼 때 죄가 없다고 여기거나 그저 도식적으로 그렇지 뭐, 하는 정도의 죄의식으로는 주 앞에 서지 않는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주께로 나오지 않는다. 주 앞에 서서 그 은혜로 감복하는 일에서도 그의 충만함은 자신의 죄의 자복과 비례한다. 믿음이란 회개의 정도에서 은혜가 가름된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20).”

 

오늘 내 안의 ‘에브라임’은 욕심에 근거한다. 시기심이다. 정작 함께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뒷전이다,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이 승리하고 돌아오자 그 영광에 시기가 났다. 곧 우리의 시기심이 우리를 멸하게 한다.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욥 5:2).” 시기와 분쟁은 육신에 속한 사람을 따라하는 것이라 하였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이에 남을 욕하고 멸시하면 자신도 당한다. 예수님은 이르시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그와 대조적으로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예수로 인해 당하면 복이 된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1-12).”

 

우리의 죄는 교만으로 비롯되어 교만은 자신을 위하고 우선하는 것이 스스로의 주장으로 강하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즐거움을 극대화하거나 자신의 고통을 극소화하려는 모든 게 다 교만 때문이다. 결국 이를 타락이라 하는데 타락은 무지함으로 비롯되고, 무지는 교만을 낳고, 교만의 바닥은 결핍에서 시작되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를 꾈 때 사탄은 저들의 결핍을 파고들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모든 게 충만하였던 것인데 순간 그 마음에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결핍을 건드렸다. 결핍은 하나님의 뜻을 저항하게 한다. 그와 같은 저항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순식간에 판단 기준을 달리하게 한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6).”

 

우리의 선은 스스로 얻은 영광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다해 싸웠지만 승리의 영광은 하나님께 돌렸다. 하여 비록 어리석은 서원으로 딸을 바치게 되기는 하였으나, 그는 기생의 자식으로 비천한 출신이었으나 길르앗의 우두머리로 부르심을 받아 주의 영광에 참여하였다.

 

이는 예수님과 같아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곧 모든 성경의 역사와 인물과 사상과 그 배경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진술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우리의 궁극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뜻을 높이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나타내신 ‘세 가지의 심판’을 볼 수 있다. 먼저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을 시기하였다. 그렇게 비판하고 비난하다 결국 싸움이 발발하여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남에 대해 비판하지 말 것을 가르치셨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보면 늘 서로가 서로를 비판한다. 자신의 옳음을 강조하려다 상대를 무시하고 비난한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우리들로서는 기본적으로 피하여야 할 덕목이다. 즉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그러므로 우린 늘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신앙의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고통을 주신다. 육신의 감각적인 고통에서부터 영혼의 감정적인 고통과 그에 따른 결과로 우리 앞에는 ‘영원한 심판’이 있음이다. 이 심판은 종말에 있을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러므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이에 우리의 고통은 일종의 징계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하여 오늘에 고통이 무조건 나쁜 게 아니다. 얼른 피해야 하고 축소해서 최소화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바울의 설교도 그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27).”

 

우리가 죄인인 것과 그에 따른 예수의 보혈로 오늘을 의롭다하심으로 살 때,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 5:4-5).” 이는 결국 사랑하는 아들을 징계하시는 아버지의 채찍과 같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그렇다고 내가 고통을 즐기는 기이한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고통 예찬론자’라 하고 싶은 것은, 고통으로 주를 바란다. 적당하여 괜찮을 때는 나의 마음도 해이하여 남을 탓하고 비난하게 되는데, 육적으로나 심적으로나 고통이 같이 있을 때면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게 된다. 어찌 표현될지 모르겠으나 늘 나는 어디가 아프다. 지금도 의자에 앉아 몸을 뒤틀며 허리에 통증을 혹은 다리에 고통을 어기적거리며 글을 쓴다. 그러다 못 견딜 때는 책상을 올려 서성거리며 그리한다. 운동이랍시고 산책을 할 때도 나의 느린 걸음에 아내는 저만치 앞서 갔다가 도로오고 하는데, 고작 한 시간 남짓 걷다 돌아오면 나는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옆구리도 결린다.

 

아픈 게 지겹다. 나는 나의 지겨움으로 주께 하소연한다. 이래저래 안정제를 서너 시간 터울로 먹고, 가슴이 벌렁거려 빈맥을 잡아주는 약을 같이 먹는다. 자주 먹는 진통제와 소염제도 문제지만 늘 달고 사는 안정제 때문에 위가 약하다. 약물 부작용으로 여러 증상이 또 같이 나타난다. 어디가 아프다는 일, 참 지겨운 일이기는 하나… 오늘은 새벽에 양말을 신으면서 허리가 덜 아파서 감사했다. 어제는 오후께 안정제 먹는 걸 깜빡할 정도로 불안이 괜찮아서 감사했다. 요즘은 옆구리가 쑤시지 않아 감사하다. 늘 조금씩은 어디가 아프거나 불편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아직은 혼자 움직이면서 이처럼 한 손으로나마 자판을 치고 묵상글을 쓸 수 있어 복되다.

 

나의 감사는 이처럼 비루하고 사소하나 이것으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 C. S. 루이스의 <고통에 대한 변증>이 귀에 박히듯 공감이 간다. 누구의 힘들고 아픈 사연이 나로 또 가슴 아프게도 하지만 그것으로 주를 찾고 엎드려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것은 복이다. 내가 결코 나의 고통이 좋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것으로 주를 바라며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 수 있어서 복이 된다. 어느 훗날 이에 따른 보상이 있을 것을 믿는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0-11).”

 

하여 오늘도 내 안의 ‘에브라임’을 쳐서 복종시킴으로,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시 47:1-2).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