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이름은 기묘자라

전봉석 2025. 3. 2. 04:30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삿 13:18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시 48:1

 

 

초대 사사 옷니엘에서 압돈에 이르는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시대도 거듭하여 죄를 지었다가 징계를 받고, 회개하여서 사사를 보내시고 하는 일이 되풀이 된다. 이제 삼손을 보내시는 데 있어 ‘기묘자’라 하시는 이가 이를 알리신다. “내 이름은 기묘니라.”

 

우리가 알듯이 성경에서 이름은 곧 그 대상의 본질이다. 그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한 암시이면서 표징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 이름을 기묘자라 하시는데, 기묘는 ‘필리’ 또는 ‘펠레’라 하는 히브리어의 형용사형으로 ‘이해를 초월한다’는 뜻이다. 또는 ‘놀라운’을 뜻한다. 우리가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낸다. 이 용어는 구약에서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할 때 그의 속성을 묘사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삼손의 부친 마노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는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는 의미다. 곧 저는 구약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의미한다. 오늘 본문은 이가 두 차례나 나타나신다. 그렇듯 삼손을 나실인임을 예고한다. 이에 마노아는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15-23). 그리고 삼손이 출생하였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출생에서와 같이 삼손의 출생은 그에 앞서 이와 같은 서술이 상세한 것을 본다. 그만큼 삼손의 출생이 이스라엘의 구속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삼손을 잉태할 것과 저가 누구인지, 어찌 가르쳐야 하는지를 자세히 알린다. 때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의해 사십 년 동안이나 지배당하고 있었다.

 

삼손은 출생 전부터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했음을 보여준다.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24-25).” 이는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삼상 3:19).” 하셨던 것과 같이 예외적이다.

 

이는 삼손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으로 태어났고 성장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훗날 여자의 유혹에 빠져 허물어지고 말았다(16:15-22). 이는 그렇듯 예외적으로 이끄시고 돌보셨던 이도 역시 하나님을 떠나 어쩔 수 없이 죄에 물드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은 막힘이 없으셨다.

 

결국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하신 말씀과 같이 사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1-12).”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와 온전히 그 뜻을 의지하고 이루게 하심을 본다(삿 16:28-31).

 

우리는 일생 동안에 우리가 위치해야 하고 어느 자리에 거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우리 뜻과 의지와는 다르다 해도, 하나님의 품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직접 그의 손으로 우릴 이끄시고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온전하지 못하여 여러 죄에 시달리듯 자주 넘어가고 물들어 죄악된 길로 간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이루시는 데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결국 내가 그의 가지로 붙어 있기만 하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를 돌이켜 다시 온전하게 하실 것임을 알게 한다. 오늘 본문에서도 알 수 있는 것 같이 하나님은 먼저 구원의 길을 예비하신다. 곧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는 내가 오늘 의롭다 하심을 받는 데 대해 나는 아무 공로 없으나 주가 그리 삼으신 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하여 오늘을 사는 데 있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7-8).” 하심으로 오늘 우리에게 더하시는 여러 형편과 사정 가운데서도 우리가 주를 신뢰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이스라엘은 그 죄가 반복됨을 무뎌졌고 그리하여 결국 한 세대가 넘어서 40년이나 ‘블레셋’의 손에 넘기신 상태가 되었다. 죄란 그와 같이 무뎌져 반복되는 만큼 감각도 의식도 없다. 이는 예외가 없는 터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삿 13:1).” 하시는 말씀에서 그에 따른 사무치는 의미를 알 것 같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렘 7:13).”

 

보면 아이들이 딱한 처지에 놓였다. 작은 아이는 약을 먹으면서 나아지기는 했으나 행여 약을 안 먹으면 더욱 심해져서 그 개수가 늘어가는 것이 문제다. 큰 애는 핸드폰 중독으로 그것을 빼앗겠다는 협박으로 아이를 조정하듯 다루기는 하지만 그 형편이 말이 아니다. 듣다보면 ‘예전에 믿었던’ 아이엄마는 속상하다며 술과 담배로 시름을 달랜다. 주께로 돌이킬 기미가 보이지를 않는다. 다른 아이는 지능검사가 낮게 나와 결국은 장애판정을 받아야 할 정도인데 이를 두고 울면서도 저이 역시 ‘예전에 믿었던’ 그 믿음으로 돌이키려 하지 않는다.

 

얼마나 더 매를 맞듯 블레셋의 손에 시달리고, 애굽에 매이고, 앗수르의 공격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를 알리면 돌아오는 말이 항상 ‘나중에’ 하면서 당장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성경은 일러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하셨음에도 별로 개의치 않듯 이미 아이들이 그렇듯 신음을 토하며 아우성인데도 안 믿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찾고 그들과의 푸념으로 신세한탄을 늘어놓는 것으로 위로를 삼는 듯하다.

 

결단이 필요하고 절제가 필요하다. 오늘 여기 잉태하지 못하던 단 지파 마노아의 아내가 나온다. 그에게 일러 삼손의 출생과 그의 사명을 알린다. 오늘 우리의 어떤 어려움이나 애타는 심정은 신호다. 하나님의 외침 같다. 아이를 통해 또는 저의 절규하는 외침으로 이를 대신하는데도 어찌 모를까? 어느새 몸에 밴 죄의 습성이 문제다. 곁의 안 믿는 친구가 문제다. 늘 나를 위로하는 듯한 취미나 취향이 문제다. 그것으로 위로를 삼으려는 안주함이 문제다.

 

엊그제도 아이엄마는 술을 한 잔 했는지, 아내는 길어지는 아이엄마의 푸념을 듣느라 한참을 통화했다. 그런 아이엄마를 대신하여 아내가 수시로 아이들과 통화하며 이것저것 잔소리를 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인내해야 하고 수고해야 한다.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을 때도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신기하지? 하나님은 이상할 정도로 딱, 그만큼씩 필요한 정도로 그 이상을 허용하지 않으신다. 때로는 그 하나님이 인색하신 것 같아도 가만히 생각하면 나 때문이다. 나의 나 된 것을 알 때, 더 주시는 게 오히려 그릇 행하게 할 것을 안다. 풍족할 때 내가 어찌 행하는지를 알면 된다. 안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바르게 잘 쓰고 온전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아는 바 그럴 위인이 아니다. 설마, 하는 순간에 이미 나태함과 게으름으로 죄에 빠져 있기 일쑤다. 딱, 그만큼 간당간당하게 채워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인색하심이 아니라 내가 그릇행하여 길에서 또 탈선할 것을 나도 이제 안다.

 

누구의 안부를 묻다 어떤 그리움이 사무칠 때, 나를 꼼짝 못하게 붙들어두신 하나님의 손길이 때론 답답하다가도 그것으로 안전함을 느낀다. 마치 험한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아버지가 꽉 잡은 손이 아프고 불편한데 그것으로 내가 미끌어져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듯이…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4-5).”

 

나의 나 된 것을 알 때, 수치심이 나로 주께로 숨게 한다. 죄의식이 나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이를 무뎌지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나를 구별하셨다. 이를 이제는 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시 135:4).

 

특별한 소유, 그렇게 하여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오늘 나로 더러는 불편하게 또는 옴짝달싹 못하게 붙드신 것 같아도 실은 이게 자유함이었다. 즉 나의 자유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 이제는 한심한 게 아니라 안심한다. 답답한 게 아니라 자유하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일이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무엇을 꼭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에서도 놓여났다. 아무런 성과도 없고 달라지는 게 없는 것 같고 오히려 더 악화되어 안 좋아지는 것 같을 때도,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런 나를 세상은 어찌 생각하는지 알지만,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암 5:10).” 개의치 않을 것은,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우리의 목적은 이 땅에서의 어떤 결과도 성과도 그에 따른 평가도 아니다. 사람들의 평가나 관심은 예수님 때의 사람들처럼 언제든지 이랬다저랬다 급기야 우리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까지 끝 간 데 없이 간다. 일련의 사태와 사회적 혼란은 물론 개인사에 있어 저마다의 사연과 그에 따른 어려움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면서 알겠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언제나 내 문 앞에 죄가 엎드렸으나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이를 다스릴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를 인정하는 데서 가능하다. 주를 나의 구주로 받음으로 가능하다. 그러할 때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 5:3).”

 

어떠한 때에 누가 그리워 문득 찾아가고 싶을 때나 연락이라도 해보고 싶을 때, 저가 아직 ‘거기 있음’으로 뭐라 한들 돌이켜 주 앞으로 올 리 없음을 알면 주께 아뢸 뿐… 자식들이 그 지경으로 신음을 내고 아이들이 아우성인데도 주를 찾지 못하고 어울리던 이들과 술에 취해 시름을 달래다 넋두리하듯 눈물로 하소연을 한들! 들을 수 없는 귀와 보이지 않는 눈을 어찌하랴?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오늘도 주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시 48:1).

 

다들 어찌 사는가, 나는 어떻게 할 수 없어도

 

거기서 떨림이 그들을 사로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도다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

(6-7).

 

주가 행하실 것을,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시온 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

(10-11).

 

그리하여,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