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들의 길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갔고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였던 그의 친구에게 준 바 되었더라
삿 14:19-20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시 49:12-13
나실인으로 태어난 삼손은 그처럼 살지 못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방 여인인 딤나 땅의 블레셋 여인과 결혼한다. 그 결혼 잔치에서 수수께끼를 내고 이를 빌미로 블레셋을 대적하려 하였다. 당시 삼손이 그러했듯 모두가 제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이는 곧 타락한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진술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잘못과 결함에도 그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을 본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14:4).” 삼손은 딤나 여인으로 인해 블레셋 사람 30명을 쳐죽인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갔고(19).” 그리고 더욱 즉흥적이긴 하나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였던 그의 친구에게 준 바 되었더라(20).”
하나님께서 구속사역을 펴시는 데 있어 우리 사람의 강퍅함을 들어서도 그리 사용하신다. 결정적으로 아무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하는 자가 없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모습도 전혀 다르지 않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1-12).”
그러니 오늘 우리의 현실은 다른가?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13-18).”
서로가 대통령 탄핵 결정이란 비극적 현실에서 양쪽으로 대립한다. 더욱이 우리 개신교의 몇몇 교회가 극단적으로 치달아 선봉에 서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어렵다. 왜 굳이 우리 개신교가 그러한가 생각하면, 역사적으로 우리 개신교의 상당수가 남북 전쟁 때 북에서 공산당에 쫓겨서 남한으로 밀려왔다. 그들 가운데 반공방첩에 대한 사상이 그 속에 내재되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우파 즉 극우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그들 사이에 또 균열이 생겨 광화문 집회와 여의도 집회로 갈렸는데, 두 축을 이루는 세력이 각각의 인물을 중심으로 그 구도가 형성되었다. 다수의 집회나 성회를 선호하고 번영신학을 기반으로 그 중심이 은사를 중시하는 신사도주의 사상을 토대로 한다. 그러다보니 미국을 상징으로 하여 자유주의를 부르짖으며 보수의 선두에 서서 진보나 좌파를 죄악시하게 되었다. 이를 일반화시킬 수는 없으나 그러면서 늙은이는 거리로, 젊은이들은 신천지로 대거 흡수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저마다 성경의 어느 구절을 인용하고 이를 중심으로 한다고 하지만 실은 너무 편협하다.
그때마다 각 나라의 대통령을 마치 이 시대의 종이나 선두자로 세워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는데, 마치 이스라엘 포로들을 풀어주고 예루살렘을 재건하게 한 바벨론의 고레스 왕을 하나님의 종으로 놓고 신봉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성경의 이치는 분명하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런 오늘의 우리 모습도 어떠한가?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다. 주장하는 말들이 너무 극단적이다. 또한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는 데 있어 극렬하게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 앞장서서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다. 소위 보수라 하여 세운 대통령들의 비극적인 결과가 이를 반증한다. 대부분 감옥에 갔고, 두 번째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저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하시는 말씀과 다름이 없이 유난히 극우에 개신교 교회가 섰다. 몽매한 성도들을 방패막이로 하여 저들을 선동하고 획책하여 법원에 폭동을 일으키고, 앞장섰던 이들이 하필 무슨 교회 어디 전도사들이 더러 눈에 띈다. 누가 비난하듯 교회가 왜 그러냐? 하고 물으면 나는 참 마음이 좋지 않다. 누군 대놓고 교횔 욕하며 타종교로 개종을 운운한다. 오늘의 삼손처럼 개신교가 유난히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다.
오늘 삼손의 경우, 저가 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뜻에 나실인으로 구별되었으나 먼저는 그의 부모가 전혀 신앙적인 권위가 없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의 부친은 주의 사자가 찾아올 때마다 그 자리에 없었다.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였으나 그의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13:9).” 이후 별다른 기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저는 삼손을 양육하는 데 있어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였다. 오늘도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14:4).”
어쨌든 삼손은 나실인으로의 신분을 망각하고 이방 여인과 결혼하였다. 죽은 동물의 시체를 만졌고, 심지어 그 꿀을 먹고 가져다 부모에게도 주었다. 그 후로도 창녀와 관계한다. 삼손의 비행이 그대로 성경에 기록되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에 팽배한 악행들의 한 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들어 블레셋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늘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구원의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인 것을 입증한다. 하나님은 삼손의 죄악 된 행실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 주권적으로 일하셨다. 삼손이 받은 은총은 나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연상하게 한다. 곧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삼손의 선행이나 이스라엘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도적인 계획과 주권적인 행사로 악을 선으로 갚으시는 은혜 안에서 이루어진다.
오늘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 교회의 행태나 몇몇 사역자들의 그릇된 선동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뒤바뀌지는 않는다. 그럼 그럴수록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목격할 수 있다. 삼손은 오직 안목의 정욕에 따라 이생의 자랑을 쫓아 자신의 힘을 행사하였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아무리 이런저런 주장으로 강단에 서서 연설을 한다 해도 우린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 그저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책동하고 획책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불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신사도주의니, 은사주의니, 성령주의니 저마다의 생각을 붙들고 ‘지나치게’ 쓸려가는 것 자체가 무지몽매함이다. 지혜자는 말하길,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하고 묻는다. 그런 뒤 저는 일찍이 깨달은 바,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그러므로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15, 16-17).” 그럼 우린 어찌해야 할까?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이를 이사야의 시선을 보면,
“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심이라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 33:5-6).”
곧 오늘 우리가 살면서 가장 귀하고 또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하는 말씀이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도 간절하다.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묻는 세상의 물음을 왜 교회가 나서서 구획하고, 가르고, 비난하고, 비판하며 심지어는 준동하여 사회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지 모르겠다! 이 사회가 뭐? 이 나라가 어째서?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는 일인가? 그러기 위해 반공을 부르짖고 빨갱이는 때려잡고 소수자들을 정죄하는 데 교회가 앞장서야 하는가?
저들이 죄인이면 우리는 죄인이 아닌가? 저들을 정죄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던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옳으나 거리에 나서서 연단에 올라 세상적인 방법 그 이상으로 거침없이 정죄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루는 데 있어 옳은 일인지? 하여 본회퍼는 히틀러를 척결하려 목사의 신분으로도 그를 죽이려고 그처럼 선봉에 섰으나 결국 본회퍼가 죽고 얼마 뒤에 히틀러가 죽었다. 그럴 거면 모세가 나서서 바로를 죽였으면 될 것을….
나는 지혜자의 ‘지나치게’라는 표현을 자주 묵상한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여기서 지나치게는 바울의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곧 성경은 우리로 세상을 바꾸라는 게 아니다. 세상을 통해 우리 자신을 바꾸라는 것이다. 악인을 처단하라는 게 아니다. 악인으로 우리 안의 악을 물리치라는 것이다. 결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 삼손은 나실인이었다.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스라엘 자기 민족에 대한 애국심으로 블레셋을 무찌르는 게 그의 사명이 아니다. 이를 위해 전략적으로 블레셋 여인과 결혼한 것을 바르다고 할 수 없다. 의도와 목적이 어떠하든지 우리가 선을 이루는 게 아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교회가 나서고 목사가 연단에 서서 선동하고 어느 쪽으로 ‘지나치게’ 휩쓸리는 것을 마땅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럴수록 교회가 욕 먹고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진다. 물론 어느 특정 교회나 목사가 그렇다는 것이고, 저들의 사상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운운하며 은사주의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규합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오늘 시편은 목소리를 높인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시 49:12-13)
오늘 본문을 여러 번 되새겨야 할 것은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 감동될 때 그가 사자의 시체에서 꿀을 먹는 것 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맛볼 수 있었다는 것으로 읽힌다. 삼손은 딤나로 내려가던 길에 사자를 만났고, 이때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맨손으로 사자를 찢어 죽였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블레셋을 격파하여 패망시킬 것을 암시하지만, 죽은 사자의 몸에서 난 꿀을 취하게 먹는 것을 어찌 묵상해야 할지…. 이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응하면 이처럼 큰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기에는 억지스럽다.
삼손이란 사사의 이와 같은 행태와 앞으로의 비도덕성은 그 자체로 암시하는 바가 크다.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우리는 인정한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그러했고, 모세나 다윗도 다를 게 없이 저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하나님께 범죄 한 후 회개하는 과정이 남다른 것이지 그들이 그릇 행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거듭 의심하거나, 인간적인 사랑을 편애한 일의 결과나, 혈기나, 통간하는 일이나… 그러면서 우리가 누굴 정죄하고, 우리가 나서서 감히 누굴 처단하고 어딜 대적하여 싸워야 한다고 선동하는 것인지?
사사시대 역시 에훗은 사실 암살자였고(3:15-23), 야엘은 시스라를 배신한 여인이다(4:17-22). 기드온은 미디안족을 치는 과정에서 자기 형제들의 죽음으로 흥분했고(8:18-21), 입다는 본래 잡류의 두목이었고(11:3), 뿐만 아니라 서원기도를 한 것이라 하나 자신의 딸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결국 이방인의 풍습을 따른 것이다(11:34-40). 결국 성경의 어떤 인물도 그 스스로를 의롭다 할 수 없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던 세례요한도 감옥에서 예수를 의심하였고,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정하였고, 바울은 앞서 사울일 때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며 잡으러 다니는 자였다.
누군들 자신 있게 나서서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사람이라고 자신하겠나? 그리 여겨주시는 주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의 허물과 죄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주의 은총이 아니면, 누구라고 감시 누가 누굴 정죄하고 비난하여 사람들을 선동하고 획책할 수 있겠나? 교회에 언제 그런 사명을 주셨나? 사사기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고, 계명이 지켜지지 않은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다스리시는가를 보여준다. 오늘 우리 사회를 바로보고 행여 휩쓸려 부화뇌동하지 않도록 겸손히 주 앞에 우리의 무릎을 꿇린다.
하여 오늘도 시편의 시각으로 접근하여,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49:6-8).
결국 우리 모두,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12-13).
이에,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
(15).
주의 은혜로, 그의 은총을 입어, 오늘도 주의 긍휼하심 가운데서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