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전봉석 2025. 3. 7. 04:56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삿 18:31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 53:2-3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 앞서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 그러하였듯이 ‘그때에’ 종교적, 도덕적 타락은 자기들 좋을 대로 행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오늘 단 지파는 아직도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다.’ 실은 단 지파는 여호수아가 생존하던 때에 이미 기업을 분배 받았다. “일곱째로 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수 19:40-46).” 그러나 가나안 정착 초기에 분배받은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모리 족속에 쫓겨나 다른 지파의 땅에 분산하여 거주하거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도는 신세였다.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삿 1:34).”

 

단이 분배받은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지 못한 것은 요셉 족속이나 유다 지파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들은 주저하였고, 머뭇거리다 사기는 저하되고 불안만 가중되어 떠돌이 신세가 된 것이다. 이를 오늘 본문은 ‘왕이 없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18:1).”

 

그런 가운데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은 본래 미가의 집 제사장이었던 ‘레위 소년’으로 이해되는데, 여러 해석이 다르지만 ‘모세의 손자’로 레위 소년은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으로 글은 마무리한다. 해석이 분분한 것은 당시 사람들은 모세의 이름을 신성시하였다. 히브리인들이 모세란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명기함으로써 불경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거기에 단 지파를 우상을 숭배하는 죄로 몰고 간 ‘레위 소년’이 요나단으로 모세와 같은 레위 지파 출신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럼에서 성경은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하고 단 지파가 그곳에 정작하게 됨을 알린다. 이것을 엘리 시대 때 블레셋이 법궤를 탈취해 갈 때로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삼상 4:17).” 중첩된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하고 그 시기를 정확히 밝히는데, 그때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31).”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는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던 곳과 시기이다. 이 실로의 회막은 여호수아 때 세워진 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수 18:1).” 사무엘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삼상 4:3).” 곧 사울 때에는 놉으로 옮겼고,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21:1).” 다윗 때에는 기브온에 있었다. “제사장 사독과 그의 형제 제사장들에게 기브온 산당에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 모시게 하여(대상 16:39).”

 

오늘 미가의 새긴 우상이 앗수르의 침략 때까지 계속 해서 그곳에 있었다면, 분열 왕국 시대에 여로보암이 그곳에 다시 금송아지를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여로보암이 단에 금송아지를 세운 것은 미가의 전통을 따라 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고, 그의 어머니가 그것으로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긴 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때에 만들어진 ‘한 신상’으로 이와 같은 역사가 굳어진 게 된다(삿 17:3).

 

그만큼 이스라엘의 기강이 바로 잡히던 사무엘과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까지 한 지파의 이러한 우상 숭배는 계속적으로 용납되어 전통이고 관습이고 오랜 역사가 되었다. 따라서 “단 자손이 사로잡힌 날”이란 블레셋의 침략으로 법궤를 빼앗기고 이스라엘이 내외적으로 연약해졌을 때까지를 가리킨다. 그렇게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로 추측컨대 오늘 이 내용은 사무엘 시대 이후에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회막이 엘리 시대까지는 실로에 있었고, 블레셋에 의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긴 이후부터 실로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새로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로 성막이 보관되어 있던 곳은 실로였다. 따라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특정한 절기 때에 즉 종교적 의무를 이행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다들 실로에 모였다. 이러한 관습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언약에 기초한다. 모든 지파가 하나님의 동일한 언약 공동체라는 사실을 함축해준다.

 

솔로몬 왕에 의해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될 때까지, 그렇게 해서 ‘실로’는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중심지였다. 그러므로 단 자손이 단 지역에 신상을 세우고 섬긴 것은 언약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매우 가증한 죄악이었다. “여호와의 온 회중이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서 돌아서서 너희를 위하여 제단을 쌓아 너희가 오늘 여호와께 거역하고자 하느냐(수 22:16).”

 

이것이 실은 일개 한 가정의 무지몽매한 모자가 재물이 풍족하여 그 많은 은을 녹여 신상을 만든 것에서 시작되었다니. 거기에 직업적인 제사장으로 ‘레위 소년’이 점을 치듯 개인적인 가정에서 주의 사역을 감당하던 것이 이처럼 부풀려진 누룩 같이 한 지파의 제사장으로, 그 신상이 한 지파의 우상이 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나? 그러므로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하시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내가 아는 몇몇도 이와 같은 위험의 경계를 보인다. 저는 그의 거실에 십자가를 걸고 그 아래 성경과 성화를 가져다 꾸몄다. 또 누구는 한 방을 기도실이라 하여 구분하였는데 그 꾸며진 모습이 위험스럽게도 성스럽다. 이를 모두 옳다 그르다 탓하기 전에 이러한 미신적인 꾸밈과 행위가 자칫 엉뚱한 이해와 의식을 가져올 수 있다. 교회를 이뤄가는 데 있어서도 어느 물건을 성스럽게 여기는 일에 대하여는 주의한다. 그러면서 목사 안수 때 받은 가운을 그 후 나는 거의 입은 적이 없다.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의식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할 때 엉뚱한 우상숭배가 된다. 누구는 안전운전을 도모하며 십자가를 운전석 앞에 걸어두는 것과 같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 5:9).”

 

아주 작은, 사사로이 여길 수 있는, ‘그럴 수 있는’ 것이 ‘그래도 되는’ 일로 여겨지면서 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어떤 미신적인 행위나 마음으로 부풀리면 이것이 우상이다. 보면 그렇게 사소한 듯 시작되어 나중에는 종교의식이 되는 것이다. 하여 나는 무엇을 기념하는 비석이나 제단이나 어떤 성물을 두는 것에 상당히 주의한다. 처음에 그 마음은 순수하였을지 모르나 오늘 본문의 내용과 같이 한 가정의 모자가 몽매함으로 신상을 만들고 떠돌이 레위 소년을 가정의 개인 제사장으로 세운 것이 화근이 되었다.

 

한 가정, ‘미가의 집’에 있던 우상이 한 지파로 번지고 급기야 모든 지파마다 저들 좋은 산당을 짓고 어떤 형상을 두어 숭배하는 의식으로 번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저들은 블레셋 족속의 압제를 피해 북쪽으로 이주한 단 지파가 미가의 집에서 우상을 가져다가 자기 지파의 우상으로 숭배하게 되는 것을 본다. 성경도 십자가도 어떤 의복도 이를 신성시하면서 그 자체로 신상이 될 수 있다. 물론 형식과 의식이 중요하기는 하나 이를 더욱 성스럽게, 그 의식자체를 과장되게 의미를 부여하면 이런 일은 오늘에도 비일비재하다.

 

당시는 가나안 정착 초기였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된 기업을 차지하고 있던 터라, 아모리 족속에 쫓겨 적당한 정착지를 찾지 못하던 단 지파는 소라와 에스다올에 일시 정착했었다. 그러다 저들은 새로운 적을 만나 그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또 다시 블레셋의 압제를 피해 북쪽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가 되었다. 오늘에도 이처럼 신앙적으로 떠돌이 성도가 자주 보인다.

 

자신의 조급함과 답답함으로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듯 정착하지 못하면서 늘 그 신앙은 손님처럼 다녀가는 주일에 배회하는 것이다. 누구는 아예 자신의 처지나 그 형편을 누가 아는 게 싫어서 늘 적당히 뒤에 있다가 행여 누가 교회 공동체 안으로 이끌려고 하면 슬그머니 교회를 다시 옮긴다. 남들이 알까 하여 숨기려는 그 가정사는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늘 뒷자리 신자로 있다, 그나마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것이다.

 

이를 오늘 단 지파에서도 여실히 전달된다. 저들은 일찍이 주를 온전히 신뢰함으로 자신들에게 분배된 기업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다들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만큼씩 각 족속의 무리들을 살려두거나 쫓아내지 못해서 두고두고 저들이 옆구리의 가시가 되는 것을 본다.

 

거기다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돌던 중에 ‘미가의 집’에 유숙하면서 미가의 우상과 드라빔을 탈취하고, 그 집이 사유한 개인 제사장 레위 소년을 데려다 자신들의 제사장으로 삼은 것도 가관이다. 당연히 미가의 거센 항의를 받지만 이를 힘으로 묵살해 버리는 것도 꼴불견이다. 우린 늘 이와 같이 자기 좋을 대로, 자신들의 힘으로, 옳다고 여기는 쪽으로 기울어져 신앙이랍시고 이를 지켜간다. 그렇게 하다 누구는 코로나19 덕분에 줌이나, 유튜브 방송으로 예배드리는 게 개인적으로 좋았던지 아직도 혼자 자신이 좋을 시간에 녹화된 영상으로 예배를 본다!

 

그야말로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니라 보는 게 되었다. 우리 또한 그때 이후에도 거리가 멀어서 오기 힘들고, 이런저런 이유로 왕래하기 어려운 이를 위해 줌을 사용하기는 하는데… 죄란 그렇듯 고착되어 서로 괜찮다고 여기는 습관 같다. ‘그럴 수 있지’ 하고 허용하게 된 작은 일이 언제부터는 ‘그래도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급기야는 ‘그렇게라도 하는’ 그 행위? 의식? 자체로 용인되고 용납되고 묵인되면서 방관한다. 그렇게 하여 누구는 자기가 혼자 좋은 시간에 영상으로 예배를 보고, 온라인으로 헌금을 부치고, 일체의 성도의 교류 없이도 나름은 믿는 자로 산다.

 

단 지파가 ‘미가의 우상’을 백성들 앞에 세우고, 미가의 우상과 제사장을 세워 자기들 좋을 대로 ‘예배를 본다.’ 이러한 발단이 너무도 사소한 일에서 출발하여서 어이가 없다. 말씀은 엄연히 경고하시길,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하고 우리의 실제적인 삶과 그 실천으로 충성을 요구하신다.

 

우상 숭배에 있어서도 삯군 목자를 경계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나는 일련의 시국에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가 아닌 연설을, 말씀 선포가 아닌 사상 선전을 일삼는 것이 가증스럽다. 목사가 왜 어느 당을 따지고, 어느 정치인을 거론하여 이쪽저쪽으로 갈리는지, 이를 왜 성도들에게 강요하는지, 그때마다 어찌 두려움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는지… 나는 이러한 현상을 경계한다.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함은 오늘 내게 허락하신 땅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정을 사랑함은 하나님이 이 땅을 사는 동안 내게 부여하신 사람들로 하나님을 더욱 영화롭게 하심이다. 내가 내 몸을 돌보고 건강을 살피는 것은 사는 동안 내게 맡기신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치 주객이 전도되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며 끌어다 붙이면 어쩌겠다고? 허락하신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을 위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우선하면 어쩌려고? 내 몸과 이 목숨이 귀한 것이기는 하나, 하나님보다 더할 수는 없는데 어떻게든 더욱 위한들?

 

그런 거 보면 우리 신앙이란 두 갈래로 확연하게 갈린다. 하나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약속의 말씀으로 굳건하거나,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뜻을 이루어주소서.’ 하는 마음을 우선하여 주를 섬긴다고 하나 실상은 하나님이 나를 섬기기를 바란다. 이 둘의 차이는 아주 사소하여서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아서 우리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가늠하기 힘들다. 혼자 줌으로 그러지 말고, 또는 여러 교회를 떠돌듯 그러지 말고, 우리 교회에 나와 함께 예배합시다, 하면 저는 늘 누구보다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다’며 거절한다.

 

오늘 여기 미가의 집 우상과 제사장이 단 지파의 우상과 제사장으로 확대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하시는 예수님의 의중이 분명해진다. 우린 얼마나 사무치게 나름의 신앙으로 자기 좋을 대로 믿고 살면서 실상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나의 의지를 믿고, 하나님이 나의 구주가 아니라 나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지. 우리 안의 주인이 실은 내가 되고 하나님은 객이 되어, 필요할 때나 위급할 때만 유용한 구급함이나 비상구 정도로 족한 것인지….

 

“하나님께서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는 말씀은 뒷전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붙든 것으로 족하게 여기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고후 13:7).” 그리하여 바울은 축원한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롬 15:33).”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 53:1-3).

 

오늘도 나의 실상을 점검하듯 혹여 내 안의 ‘미가의 우상’은 없는지, 나의 오늘의 사명감이 행여 ‘레위 소년’의 제사장직 같이 삯군 목자로의 직업으로는 아닌지….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