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삿 19:1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시 54:7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일어나는 일들이 참담하다. 17:6, 18:1과 같이 ‘그 때에’라 시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에브라임 산지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의 이야기이다. 저가 레위인인 것을 강조하는 것은 당시 얼마나 혼탁하고 타락한 사회인가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이라 하면 에브라임 산지 북쪽 끝 실로 인근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런데 레위인이 그곳에 우거했다는 것으로, 이 레위인도 앞에서 등장했던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18:30)처럼 에브라임 산지를 떠도는 나그네였던 것 같다. 그만큼 제사장직을 수행하여 성전을 섬기고 그 대신 다른 지파들로부터 나오는 일정한 터전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게 된다. 저가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다. 당시 사회에서 첩을 취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첩 때문에 기드온의 가정이 파멸된 것처럼(8:31) 본장에서도 이 레위인이 첩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을 보여 준다.
레위인과 그의 음행한 첩에 관련된 이야기가 이스라엘 전체의 내분을 가져오는 도화선이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16-30). 앞서 레위인이 미가의 우상과 함께 단 지파의 제사장 노릇을 하게 된 이야기와 오늘 레위인의 첩의 이야기는 나름 연결이 된다. 먼저는 두 사건 모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에 일어난 일이란 것이다. 당시 사회 전반의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또한 두 사건이 모두 레위인과 연관된 타락이란 점이다. 그리고 또 두 사건이 모두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는 레위인’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관은 한 시기의 이야기로, 추정컨대 사사 옷니엘의 활동 당시로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대제사장으로 있었던 때이다. “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삿 20:28).”
어쨌든 전반적으로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이 다양하게 퍼져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2:7).” 그러던 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삿 2:11-13).”
그런 가운데 오늘의 본문의 이야기는 더욱 극적인 사건이다. 그만큼 심각하게 타락한 상황을 보여준다. 더욱이 신앙적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어야 할 레위인들이 조명되면서, 어제는 ‘미가의 집의 우상과 그 집의 제사장 노릇’을 보여주고, 오늘은 ‘레위인의 첩’을 중심에 두고 벌어진 일을 보게 한다. 곧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며, 신정시대에서 왕정시대로 전환되는 격변의 시기를 보게 한다.
하나님의 법이 파괴되고, 각기 자기 소견대로 옳은 것을 판단하고 행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악으로 물들었음을 알게 한다. 출애굽 후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인들이 섬기는 우상과 그들의 관습을 수용하였다.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성결의 의무(출 19:5-6, 20:1-17)를 저버렸다. 이를 조명하듯 성직자인 레위인들이 떠돌고 뜨내기 같이 가나안의 풍습에 따라 행하는 죄의 현장을 기록하고 있다.
결국 이 모든 상황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면 감당이 안 되는 우리의 실상을 보여준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또한 연거푸 왕의 통치가 없던 ‘그때에’ 일을 두각시킴으로, 하나님으로 우리의 왕이 되심을 거절하던 때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보여준다. 그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대표로 레위인에게서 말이다. 후에 호세아 선지자는 사사시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데 있어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한 전초’ 시기였음을 말한 바 있다.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 3:5).” 여기서 ‘그들의 왕 다윗’은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사사의 시점으로 왕을 희구하는 이상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암시한다.
오늘 본문은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한 레위인의 문란한 사생활에서 시작된다. 이 레위인이 본처와는 어떠했는지 기록이 없다. 다만 스스로 문란하여 첩을 삼았던 것이 도망하여 저를 찾으러 간 것이다. 첩이 다른 남자와 행음한 뒤 남편에게서 달아난 것,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삿 19:2).” 이를 찾으러 처가에 갔던 레위인의 이야기다.
레위인은 장인의 집으로 찾아가 며칠씩 머문 뒤 그 첩을 데리고 돌아간다(3-10). 그 도중에 날이 저물고, 여부스족의 성읍인 예루살렘에서 유숙하고자 했던 종의 간청을 뿌리치고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기브아 성읍에까지 거서 그곳에서 유숙하려 하다, 아무도 그들을 영접하는 사람이 없어 난감하였다. 그러다 한 노인의 집에서 유숙하게 된다(11-16).
여기서 당시의 시대상을 유추할 수 있는데 모범이 되어야 할 레위인의 가정이 먼저 이 지경으로 첩을 두고, 그 첩이 음행을 하였다. 첩을 도로 찾고자 장인의 집으로 가서 며칠씩 유숙하여 데려오는 일이나, 돌아오는 길이 같은 이스라엘 백성의 땅에서 하루 묵을 곳을 찾기 어려운 상황도 보여준다. 어렵게 기브아에 도착하였으나 유숙지를 얻지 못하던 레위인과 일행(10-15)은 우연히 같은 고향의 노인을 만나 그의 집으로 인도된다(16-21).
그런데 그날 밤의 일은 극단적이다.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22).” 그로 인해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25).”
결국 레위인은 고향으러 돌아와 첩의 시신을 열 두 조각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보내 기브아에서 당한 만행을 고발한다(27-30). 이러한 엽기적인 방법으로의 호소도, 그것도 레위인이 그리 행한 일에 대해 어찌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 옛날 소돔이 멸망하기 전에 다급하였던 사건을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또 공교롭지만 그때의 소돔이 오늘 이 사해와 가까운 기브아에서 가까웠다는 사실이다(창 19:4-26).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 19:5).”
오늘 기브아의 만행을 증거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마땅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죄악이란 점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없는 시대는 윤리가 파괴된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강퍅해진다. 비류들의 만행이 자행된다. 소위 남색(男色)이라 하여 동성애가 버젓이 드러난다(창 19:5). 기브아 성읍은 그렇듯 나그네를 영접하는 기본적인 윤리가 사라졌고, 불량한 것들이 활개 쳤고, 성적인 타락이 극에 달했다.
인간의 기본 윤리가 파괴되는 데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가 깨진 결과이다. 사탄은 이를 부추겨 성도의 삶을 황폐하게 한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우리의 맛’을 강조하신 바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어쩌다 이 시대의 교회가, 성도들이 그 쓰임을 다하지 못하고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다.
사회악은 성경적 삶을 버리면서 사회적 타협과 종교간의 화합을 운운하면서도 자행된다. 사사시대에 저들의 폐단은 가나안인들의 우상과 생활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교회의 실상도 시대에 맞춰, 사람들이 선호하는 바와 합리적인 타협의 결과로 이렇듯 사회화된다.
본문에서 집주인인 노인은 기브아의 비류들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 자기의 딸과 레위인의 첩을 그들에게 내주었다.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24).”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롯은 이와 동일하게 자기 딸들을 대체하여 내놓았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창 19:8).”
당장의 소요를 잠재우려는 지혜 같으나 단적으로 그 사회의 악을 보여준다. 이러한 악은 맞서 싸워야 할 책망의 대상이지 타협의 문제가 아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11).” 이를 위해서도 우리는 무장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6:13).” 오늘 여기 ‘첩의 음행’은,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해야 할 일이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 20:7, 10).” 더욱이 연속으로 레위인들의 행태를 고발하는 것은 그만큼 당시의 시대상은 물론 종교적으로도 얼마나 죄악 중에 빠졌는지를 알게 한다. 이는 또한 오늘 우리의 실상이기도 하다.
법적인 근거나 논리는 그 적용이 다소 어렵지만, 계엄을 선포하고 내란으로 구속된 이의 법적 구속취소신청이 인용되었다. 다소 의아한 상황인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저마다 아전인수로 이를 해석하고 저마다의 주장으로 사회는 점점 더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듯하다. 하긴 이를 두고 저마다 ‘자기 밭에 물이 들어오길 바라는 것’이야 인지상정이겠으나, 자꾸만 대두되는 교회와 목사와 장로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속상하다. 마치 맛을 잃은 소금처럼 밖에 버려져 밟힐 뿐이다. 나는 일체 종교적인 논쟁이나 정치적인 주장으로 서로 대화하는 것을 주의한다. 같은 쪽이면 서로 다른 쪽을 정죄하게 되고, 서로 다른 쪽이면 자기주장에 함몰되어 서로조차 감정이 상하기 일쑤다.
여기서 나는 더욱 하나님의 법과 통치가 살아나기를 기도한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신 6:24).” 더욱 종교 지도자라 할 수 있는 ‘레위인’의 사명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덩달아 날뛰는 것에 우려한다. 우린 이 사회의 마지막 남은 보루이다. 어른이 없는, 왕의 부재, 아버지 부재의 시대에 우리는 주 앞에 서서 말씀으로 굳건해야 한다. 그러해야 할 우리가 사회적 논쟁과 그러한 논점으로 휘둘리면 안 된다. 하여 바울은,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1-13).”
애고 어른이고 듣지 않으려는 사회이나 그럴수록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하여 오늘 우리의 책임이 더 막중한데, 어쩌자고 교회 안에서 설교가 사라지고 정치적 선동과 연설이 난무한지… 말씀이 아니라 감정이 앞서면 말을 하다 막말이 나온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으면 감정과 소요에 이끌려 사탄이 휘젓는 자기 판단과 기준이 앞선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그러다보니 성경공부가 희미하다 정치 이야기가 대화의 주제를 차지하면서 그나마 전화로 하던 성경공부도 멈추었다. 우린 실상 우리 자신과 싸워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나도 왜 저 어이없는 판결과 이상한 논리에 할 말이 없겠나? 화도 나고 속상하기도 한데, 그러하여 주께로 돌아가는 심정으로 입을 다문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8-19).”
하여,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시 37:4-6).
이는,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145:19).
그러므로 오늘의 이 비극적인 현실에서 조금 더 일찍 주 앞에 올라와 말씀 앞에 나를 앉히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54:1-2).
시대가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4,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