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전봉석 2025. 3. 18. 04:31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삼상 4:18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시 64:9-10

 

 

“사무엘의 말이 전파되니라.” 곧 사무엘이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그 권위가 모든 사람들에게 미쳤다. 저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이끌어 나갈 것이다. 그런 가운데 블레셋과의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이스라엘은 대제사장인 엘리의 주관 하에 있었다. 엘리가 사사로서 마지막 사역을 맡은 게 된다.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이 일에 앞장섰다.

 

블레셋 사람은 본래 해양 생활을 하던 민족이다. 주전 13세기 말에 헬라 본토인들의 압력에 자신들의 본거지 에게 해(海) 지역을 떠나 애굽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그들은 거기서 애굽 왕 라암세스3세에게 쫓겨 다시 가나안 땅 지중해 쪽 해안으로 건너와 거기에 정착했다.

 

한편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기르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암 9:7).” 하신 말씀에 따라 블레셋이 갑돌(그레데 섬)에서 왔다고도 말한다. 이는 그들이 주전 2000년 경, 아브라함 시대에 성경의 무대에 처음 등장할 때에도 기록이 있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창 26:1).”

 

아무튼 블레셋 족속은 사사 시대에 들어와서 가나안 땅의 남서쪽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모든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이라(삿 3:3).” 그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13:1).”

 

또한 이들은 가나안 지역에서 유일하게 제철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었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들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삼상 13:19).” 이러한 기술을 기반으로 무장된 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오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이고,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아 갔다. 그렇게 블레셋 사람들이 아벡에 진 쳤다.

 

‘아벡’은 이스라엘이 진 쳤던 에벤에셀 서쪽 약 3.2km 지점, 아르곤 강의 근원지이다. 샤론 평야 한 지점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 쳤더라(29:1).” 이곳은 원래 가나안 족속들의 본거지로 블레셋 족속이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얼마나 맹위를 떨치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오늘 본문의 배경과 그 지역을 살피면서 결국 얻게 되는 교훈은 범죄하고 즉시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징계가 임한다는 사실이다. 어제도 살펴본 바, 엘리가 대제사장으로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다고 하니,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그 형편이 어떠하였는지 짐작이 된다. 이에 따른 징계는 하나님께 범죄한 까닭이다.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 8:12-13).”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신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곳에 행하겠고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렘 7:13-15).”

 

결국 오늘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은 죄로 인함이고 죄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고통은 우리로 자신의 주장을 주 앞에 내려놓게 한다. 나의 의지를 주께로 양도하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그러므로 누가 누굴 탓하고 원망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6).” 이것이 성경의 원리다. 그런 가운데,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7-8).”

 

하시는 말씀에서 오늘 우리 사회의 이 흉흉한 시절을 견딜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듯하다. 더욱이 이번 주 헌재의 판단이 내려질 것 같은데, 그렇듯 서로가 당을 지어 자신들의 진영논리에 빠져 선과 악을 혼용하고, 교회도 이에 동조하는 것이 속상하다. 결국은 이게 다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따라’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다.

 

그렇게 하여 엘리의 두 아들이 죽고 엘리 대제사장도 그와 같은 소식에 죽었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4:18).” 어쩌다 여호와의 궤까지 빼앗기게 된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던 때였다는 사실에서 짐작이 간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은 이를 치신다.

 

여기서 “쳤더니” 하는 표현은 싸우다, 삼키다 하는 뜻으로,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워 저들로 괴롭게 하였다. 그렇게 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하는 말씀으로 이 싸움에서 얼마나 처참하게 완패당하여 뿔뿔이 흩어졌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더 죽어 삼만 명에 이르렀다.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10).”

 

당시 이스라엘은 군대랄 것도 없이 기병이나 전차도 없이 보병이 전부였다. 이때의 전사자(戰死者)가 이스라엘 한 지파의 장정 숫자와 비슷하다. 그만큼 처참한 패전이었다. 이때 블레셋 사람들은 이 아벡 전투에서의 여세를 몰아 이스라엘 본토로 쳐들어갔다. 심지어 실로의 성소에까지 치고 들어간 것 같다. 이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그리하신 것임을 성경은 밝힌다.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라(렘 7:12).” 곧 우리의 고통이 전혀 새로울 게 없다.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26:6).”

 

성경이 이와 같이 밝히시는 데는 우리의 고통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먼저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심이다. 돌이켜 주를 찾게 하심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희귀한 말씀을 갈구하게 하려 하신다. 오늘도 이는 같은 원리를 따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이와 같이 이르신 주의 음성이 들려야 한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5-27).”

 

오늘 이 블레셋의 전투는 징계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던 때’에 ‘여호와의 궤’도 빼앗겼다. 우리가 사는 오늘의 이 혼탁함이 말씀이 없어서이겠나? 어느 시대보다 말씀의 시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각종 매체를 통해 말씀은 전달되고, 교회는 헤아릴 수 없이 늘었어도 정작 풍요 속의 빈곤과 같이 정작 들을 수 있는 귀가 닫혔다. 다른 소리로 혼미하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의 입에서 말씀보다 현실의 정치참여에 열을 올린다. 여기서 여호와의 궤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과 언약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다.

 

이를 모두 빼앗겼다는 소리가 된다. 말씀도, 언약도, 통치도 없이 더는 무슨 의미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을지?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교회의 행태로 우리 자신은 어떠한지? 오늘 우리의 ‘아벡 전투’는 어떠한지? 오늘도 우린 ‘블레셋 족속’에게 법궤를 탈취당하고,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 한 시에 죽고, 3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대제사장 엘리가 죽었다. 이 참혹한 현실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이 사건은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다.

 

앞서 전투가 있었다. 거기에서 4천 명이 죽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삼상 4:2).” 이에 저들은 묻는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하고 이때에 누구 하나도 회개의 통회와 자복이 없었다. 그저 이 모든 탓을 주께 돌리려는 것인지? 훗날에 지혜자 솔로몬이 말하였다.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잠 1:28-30).”

 

충분히 돌이킬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이보다 앞서 엘리에게 어린 사무엘이 이 일이 있을 것을 경고한 바도 있다.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 3:13).” 이를 듣고도 엘리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저 형식적으로 “…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18).” 마치 주의 선하심을 인정하는 듯한 말이지만, 저는 이후 14년 후에 있을 오늘에까지 그저 ‘비대한 몸’으로 자기 의자만 보존하다 뒤로 넘어져 죽었다.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4:18).”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 2:13-14).”

 

이를 결국 듣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면 결국은 오늘 본문과 같은 비극적인 현실이 닥치고 난 뒤에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하는 게 탄식과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께 부르짖음이 아니라, 스스로들 자기 의지에 따라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결국은 우리의 아집이란 끝장을 봐야 알 수 있는 것일까…(4:3).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여호와의 언약의 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벗어나면 한낱 궤짝에 불과하다는 사실, 범죄함으로 언약이 파기된 곳에서 그 어떤 의식도 부질없다는 사실, 영적으로 타락한 주의 백성에게는 징계뿐임을… 이것은 단지 ‘엘리 가문’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다. 엘리의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었다. 그때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법궤도 빼앗긴 것을 알고 그대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때가 지나면 모든 게 허무하다. 엘리의 죽음은 영원한 단절을 연상하게 한다. 더는 돌이킬 수 없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하시는 말씀을 나는 늘 그리 각성하듯 묵상한다. 영원히 더는 돌이킬 수도, 회개도, 후회나 탄식도 소용이 없는 때가 온다. 죽음은 죄로 인한 모든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 오늘 말씀으로, 회개하지 않고 초조하게 요행을 바라는 게 어찌 불행한 일인지를 생각한다. 엘리가 어린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러했다. 그리고 14년이 흐르는 동안 우유부단하다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삼상 4:1).” 그런 가운데서도 회개는 없었다.

 

엘리가 죽는 시간, 비느하스의 아들 이가봇이 태어났다. 그 뜻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갔다는 것이다.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19-22).” 이와 같은 비극을 목격하고,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주 앞에 설 것인지?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시 64:1).

 

나는 주께 나의 두려움을 아뢴다. 곧 오늘 내 안의 두려움으로 주를 경외함이니 두려움으로 선포하고, 생각하고, 즐거워하며, 자랑해야 한다. 오늘 우리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심을,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