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삼상 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시 91:14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신다. 더러는 주의 응답이 내가 원하던 게 아닐지라도, 어느 사이 기도하던 내가 하나님의 뜻에 합한 자가 되게 하신다. 기도는 내가 원하던 것을 아뢰다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순응하게 한다. 사울과 사울의 아들들이 한 날 한 시에 죽음을 맞았다. 참으로 비극적이라 사울은 그 와중에도 스스로의 종교심으로 자살하였다.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4).”
무엇이 우리로 참되게 하는지, 스스로의 의는 이와 같이 허무하다. 사울은 늘 다윗을 쫓다 오늘은 블레셋 사람들이 쫓아와서 저를 따라 잡았다.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분산되었고, 사울과 그의 세 아들들은 아무런 경호도 받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다. 사울과 세 아들도 각기 흩어져 있었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길보아 전투에서 이처럼 전사했다.
사울의 네 아들 중 세 아들이 이 날에 죽고 네 번째 아들 ‘에스바알’은 아브넬에 의해 잠정적으로 사울의 후계자로 옹립되었던 ‘이스보셋’이다.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삼하 2:8-9).”
특별히 다윗을 생명처럼 사랑했던 요나단의 죽음이 안타깝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이었으나 부친 사울과 대조된다. 요나단과 다윗의 참 사랑과 우정은 눈물겨웠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삼상 18:1).” 한 생을 사는 동안 이와 같이 마음을 하여 우정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복이다.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4).”
요나단은 지혜롭고 용감하였다. 신앙적인 인격을 갖춘 의인이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20:42).” 요나단은 자신이 이을 왕위에 집착하지 않았고 겸손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23:17).”
요나단도 이번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과 같이 운명을 달리했다. 결국 부친 사울의 사악한 죄 때문에 그의 자손들도 이와 같이 비극을 당했다. 요나단을 통해 보고 배울 수 있는 것은, 의인의 소망과 생명이 이 세상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는 세상에서 참되고 영원하게 이어질 것이다. 지혜는 말하길,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 14:32).” 그리하여 비록 사악한 부친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다 끝내 운명을 같이 하는 효심 또한 갸륵하다.
오늘 본문에서 안타깝도록 끔찍한 것은 ‘사울이 패전하매’ 스스로 칼 위에 몸을 얹어 죽은 것이다. 저는 쫓기다가 궁수(弓手)의 활을 맞았다. 스스로 판단하여 곧 잡혀서 모욕과 고통을 당할 것으로 알고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31:4).” 스스로 죽었다. 그 이유는 매우 종교적이다. 즉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결국 스스로의 성스럽게 죽음을 택한 것이나 사울의 시체는 욕을 당했다.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9).” 참으로 가혹하고 잔악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방인들로서 저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고, 선민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도 알지 못했다. 일찍이 블레셋은 사사 삼손을 사로잡아 그를 욕보였던 것처럼 오늘 사울의 시신 또한 그리 행하였다.
사울은 그들이 이렇게 할 것을 알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하여 병기 든 자로 자신을 죽이라고 하였으나 저는 그리할 수 없었고, 이에 스스로가 칼 위로 엎드렸다. 사울의 이와 같은 결국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생명을 스스로가 거둔 것이다. 그러자 사울의 병기 든 자도 그와 같이 자기 칼 위에 엎드려서 죽었다. 두 사람 다 스스로가 판단하여 ‘할례 없는 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겠다는 히브리적 종교심이 이와 같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후일에 유대 전승에 따르면 사울의 병기 든 자는 에돔 사람 도엑으로 밝혀진다. 더욱이 그가 자살한 칼은 놉 제사장들은 쳐 죽였던 바로 그 칼이라고 한다.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22:18-19).” 전승에 따르면 그렇다는 것이고 확실하지는 않다.
스스로 자살을 하는 것은 그 어떤 죄악보다 더욱이 하나님을 경멸하는 처사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생명찬탈은 창조주 고유의 권한이다. 이에 스스로 목숨을 거둔다는 일은 매우 심각한 죄이다. 어릴 때 나도 주일학교에서 배웠고, 자라서는 주일학교에서 그리 가르쳤다. 모든 죄가 악하나 용서받지 못할 게 없어도 자살만은 돌이킬 수 없는 죄가 된다. 곧 우리 죄가 아무리 크고 끔찍하다 해도 주의 사랑의 충만하심이 이보다 더 크고 넓고 높고 깊으나 자살에 대하여는 더는 여지가 없다.
누가 문득 그 생각이 났다. 아이를 낳고 여러 사정과 겹쳐 산후우울증으로 수면제를 삼키고 있었다. 순간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말이 떠올라서 갑자기 격한 두려움이 몰려와 억지로 손가락을 목구멍 깊이 밀어 넣어 삼킨 것을 토해내다 의식을 잃었다. 며칠 뒤 깨어나 안도하며 감사하였고, 이런 이야기를 언젠가 찾아와서 어렵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내가 주일학교에서 저에게 그리 가르쳤던 것이다. 나 역시 자주 자살충동에 시달리고는 했다.
어릴 때 같은 교회에서 우리 가건물사택에 살았던 가정이 있었다. 서로가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던 시절, 우리는 교회가 세든 건물 옥상에 가건물을 짓고 살았었다. 그 집 큰형님이 서울대법대를 다녔나 그런데 도봉구 관악산에서 실족사로 떨어져 죽었다. 또래 친구와 나는 그리 알고 있었는데, 어른들 대화에서 실은 그 형 주머니에서 유서가 발견됐다는 말에 자살이란 걸 알게 되었다. 아마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까? 나에게는 마치 희소식 같은 신비로운 비밀이 되었다. 아, 그런 묘수가 있었구나! 싶은, 스스로 더는 사는 일을 달리할 수 있다는 게 참으로 희한하고 든든한 비상금 같은 소식이었다.
이후 나의 청소년기에 받은 유혹은 윌리엄 쿠퍼가 평생 시달리며 겪었을 우울증과 자살충동과 같다. 그런 그를 끝내 붙드심으로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하는 찬송시를 짓게 하였다. 오늘을 살며 목사가 되고 주와 함께 살면서 이 놀라운 은혜에 감복할 따름이다. 누구는 이내 삼켰던 수면제를 기워내고 간신히 돌아와서 주 앞에 안도하였고, 십 수 년 만에 만난 어느 날 그와 같은 고백을 들려주었다. 이를 나는 또 어느 날 한 소녀에게 들려주었는데, 저 애는 자해를 하다 이내 자살미수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아이였다. 우리가 살아서 사는 동안에 생을 다하는 것으로도 이 한 생을 부여하신 이에게 참 위대하고 감격스러운 순종이란 말을 나는 하소연하듯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그리하여 주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틈을 노리다 사탄은 순간 앗아간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곧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에서 생명도 그와 같아서, 길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눅 8:5).” 이는 참으로 허무하여서 가룟인 유다는 예수를 팔고 스스로 목메어 죽었다. 극한 수치와 허무와 고통으로 순간 그러한 감정에 사로잡힐 수 있다.
더는 회개하여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지옥이다. 살아서 아직 살았을 때는 누구라도 기회가 있다. 이에 두려운 말씀으로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하신 말씀을 되새길 때마다 간담이 서늘해진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같은 죄라도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 분명히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언제나 죄의 삯과 하나님의 은사가 충돌한다. 우리 안에 내재된 죄성은 예외가 없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하나,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8).
살면서 사는 동안에 마음이 상하지 않고 어찌 살 수 있겠나? 그러할 때 우리의 은사는 주의 이름을, 이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하신 말씀으로 확신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겔 18:31).” 하고 성경은 오늘도 사울의 죽음을 앞에 두고 묵상하게 한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요즘은 아흔 살을 넘기고 연로한 몸의 고통을 가지고 살아내는, 생의 애착이 남다른 장모의 모습이 때로는 경이롭다. 억지로라도 음식을 씹어 삼키고, 주신 바 한 생을 다하는 데 있어 진심인 모습에서 때로는 눈물겹다. 상대적으로 허튼 소리를 하듯 더러는 악락사를 운운하여 존엄사를 입에 담는 사람들로 세상이 미혹당한다. 건강할 때는 하고 싶은 게 많고 여러 꿈을 꾸고 생각이 많으나 몸이 아프면 그 생각은 아주 단순할 뿐이다. 나 역시 늘 어디가 아픈 사람이라, 이런 날씨에는 몸을 비틀어가면서 묵상글을 쓴다.
그런 가운데 오늘 사울의 선택은 참으로 종교심이 강했고 나름은 고상함으로 스스로 선택한 존엄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만하였다. 결국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사 2:17).” 우리의 결국은 항상 주 앞에 맡김으로 살아야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하여 나는 누가 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기사를 들을 때마다 안타까움으로 신음한다. 자살의 정의는 바로 이 말씀이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선택하는 결과 말이다.
우리가 다른 점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5).
하고 스스로의 영혼에게 선포해야 한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62:5).
선포하지 않으면 설득당한다. 눈을 뜨기 무섭게 어떤 삶의 질곡이 짓누르며 우리의 영혼을 에워싼다. 한동안 자해하는 아이와 거식증으로 시달리는 아이와 조현을 앓는 모녀를 대하면서 마음이 늘 어려웠다. 한 아이는 물론 관심 받고 싶어서라는 걸 알지만, 20층이 넘는 자기 집 아파트 베란다에서 밑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서 나는 밤새 두려움에 떨었다. 누군 들어오는 전철을 찍어서 순간, 어쩌고 하는 내용으로 카톡을 보냈는데, 이런 게 다 사랑이 필요해서였다. 우리가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모든 인류의 숙명은 죽음으로 씨름한다. 분명히 성경은 이르시길,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이런저런 사연은 차치하고, 모두는 살아서 사는 동안에 기회를 얻어야 한다. 회개의 영을 받아 자신이 죄인인 것과 그러한 자신을 사랑하시는 주의 사랑이 어떠함을 알아야 한다. 이에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하여 나도 산다. 우리가 살아서 사는 동안에 그 주어진 상황으로 주를 인정하는 것이 사명이다. 내가 아는 아무개는 일찍이 기형으로 태어나 모든 신체가 자라지 못하였고, 부모에게 버림받아 여러 시설로 떠돌려져 전전긍긍하다 나이 50이 되어서 요즘은 주의 은혜로 산다. 저의 걸음은 온 우주를 비틀어야 한 걸음을 떼지만 금세공기술을 배워 장인으로 홀로 산다. 저를 만나면 온 몸에 전율이 온다. 강한 거부감도 인다. 속상하고 안타까움으로 울고만 싶다. 그렇듯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는 남의 집 문 앞에서 그들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주신 바 한 생을 다한다는 일은 그 자체로 우선은 모든 생명에 부여된 사명이다. 이에 고통으로 일그러진 욥은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1-22).”
그리하여 오늘 사울의 마지막은 그 의미가 크다. 그런 저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그 시신을 추슬러서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삼상 31:13).” 야베스 거민들이 사울의 뼈를 그 나무 아래에 장사한 까닭은 사울이 평소 그 나무 아래 앉기를 즐기는 등 생전에 그 나무를 특별히 좋아했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그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 나무 아래에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의 곁에 섰더니(22:6).”
후에 다윗에 의하여 이 뼈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 있는 아비기스의 묘에 안장하였다(삼하 21:11-14).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시 91:1-3).
이와 같은 대상이 우리 믿는 자들로, 나 자신들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고백이다. 비록 사는 일이란 게, 참으로 고통스럽고 수치를 당하는 일일 때도 있으나 우리는 이내 살아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찬송해야 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7, 9-11).
이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