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전봉석 2025. 4. 28. 04:34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삼하 14:33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 105:18

 

 

요압은 기회주의자이다. 압살롬이 다음 왕이라 여겨 다윗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열고자 한다. 하여 드고아 여인에게 비유를 들려주어 왕에게 고하여 압살롬을 부르게 한다. 저는 앞서 다윗의 허락 없이 아브넬을 살해했다. 압살롬의 반역 때도 다윗이 압살롬을 죽이지 못하게 하였으나 결국 압살롬을 죽여 다음을 노렸다. 다윗도 이를 알고 후에 솔로몬에게 요압을 척결할 것을 당부하였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왕상 2:5-6).”

 

그렇듯 요압은 다윗의 신복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영달을 도모하는 기회주의자로 오늘 본문에서도 다윗의 마음을 읽고 암논을 죽이고 도망쳐 있는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여 다윗과의 화해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윗의 마음이 ‘향하는’ 것을 요압은 눈치껏 알고 있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삼하 14:1).”

 

곧 다윗 왕의 마음이 자연스러운 부성애로 아들 암논을 잃고 압살롬까지 잃을까 하는 것을 요압이 발견한 것이다. 압살롬은 암논 살해 사건 후 3년이 지나도록 도망쳐 살고 있었다(13:23-39). 이를 눈치 채고 요압은 드고아의 여인을 불렀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을 비유로 왕께 고하여 그 마음을 일깨우려 하였다. “드고아에 사람을 보내 거기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상주가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 같이 하고(14:2).”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6km, 베들레헴에서 8km 지점에 있는 고지대이다. 선지자 아모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암 1:1).” 르호보암의 산성이 세워져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지혜 있는 여인을 찾았다. 이 여인의 거주지인 드고아는 요압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부터 약 2시간 거리였다. 요압은 이 여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

 

저에게 상복을 입혀 왕 앞에 보냈다. 두 아들 중 한 아들이 한 아들을 죽여 저마다 죽이고자 하는 처지에 놓인 것처럼 말을 지었다. 나름은 요압의 계략이 다윗을 위하고 압살롬을 살리는 일이라 생각했다. 저는 실권자로 다음 정권도 염두에 두고 일을 벌인 것이다. 결국은 요압의 뜻대로 되었다.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14:33).” 그러나 다윗은 그 전에 압살롬을 부르고도 2년 가까이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다.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24).” 우선은 기회주의적으로 자신의 계략으로 삶을 꾸려가려는 것과 주를 의지하고 지혜로 삶을 이뤄가는 것은 차이가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르신다.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

 

자신의 모색으로 머리를 굴려 꾀를 내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고자 하는 마음을 가로막는다. 요압은 충신인 듯하였으나 간신으로 자신의 영달을 우선으로 선택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곧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우리가 무엇을 따를 것인가 하는 데 따른 문제이다. 그러다 결국 주를 저버리고 자신의 뜻을 좇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저마다의 주의 뜻이라 합리화하겠으나,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딤후 4:10).”

 

이 나이쯤 되니까, 아 누가 그때 그러다 주를 떠나갔구나, 하는 생각이 뚜렷해지는 것 같다. 청년 때 교회 전도사로 있던 이가 목사까지 되어 선교사로 나가더니 사업가가 되었다. 친구 아무개도 선교사로 해외로 갔다가 사업가가 되어 돌아왔다. 잠깐 아이들 키울 동안만 밥벌이를 위해 시작했던 일이 전업이 되어 다시 설교 단상에 서지 못한 이도 있다. 이와 같이 기회주의란 어떤 면에서 실리를 따른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한 것이다. 세상적으로는 현명하였다. 전도사로 그 부친의 목회를 이어 갈 줄 알았던 이는 생활을 위해 택시를 시작했다가 운수업으로 빠진 이도 있다. 그러고 보니 중도에 이 길에서 이탈하여 나름들 살 길을 찾아간 이가 많다. 아무개도 결국 보험에 전념하여 목회로 돌아오지 못한 것 같고….

 

그러니 나 같은 경우는 복에 복이 많다. 주의 길을 가지 않겠다고 작정을 하고 떠나 살았던 것인데 이내 주의 강권하심으로 끌려온 것이니… 같은 것 같으나 다른 길 위에서 나는 머리에 스치는 누구누구를 생각하다 잠시 눈을 감는다. 요즘도 작은 교회 개척으로 목사만 하며 생활하기는 어려워서 두세 개 일을 동시에 하는 자들이 많다. 누구는 어디 빵집에서 알바를 하며 주일을 지켰는데… 누구는 커피를 도매하며 카페를 하면서 그곳에서 주일을 지킨다고 했었는데….

 

이런저런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고 한숨도 난다. 요압의 기회주의적 판단과 모색을 생각하다 내 곁에 이처럼 많은 이들이 그리하다 다시 목회 현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떠올리게 되고 가슴이 답답하여졌다. 그런 가운데서 죽기 살기로 말씀으로만 씨름하며 한심하고 처량한 삶을 고집하며 묵묵히 이 길을 지키는 이도 있다. 그들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빈궁하고 비루하다. 아이들도 덩달아서 고생이다. 나도 자주 이러한 고민을 하거나 듣는다. 누가 물으면 나는 달리 대답할 수 없다. 어쨌든 나로서는 이제 애들이 다 컸고 그러는 동안 주를 멀리하고 살았던 죄인이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이다. 한데 이제 한참 돈이 들어가야 할 나이의 자녀를 두고 있는 경우에는 선뜻 할 말을 찾기 어려워서 쭈뼛거리기 일쑤다.

 

“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잠 7:21).”

 

현실은 잔인하고 주의 뜻을 더딘 것 같을 때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처음 사람들의 경우나 오늘 우리의 경우나 다를 게 없다. 여전히 우린 같은 시점에서 주 앞에 선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르기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그러나 현실은 늘 맹렬하여 한 달마다 아니 매순간마다, 이렇게 하고 있는 게 맞나? 하는 회의와 갈등을 퍼붓는다. 매월 교회 임대료 날짜는 어쩜 이렇게 빨리도 찾아오는지…. 그럴 때면 말씀으로 내 앞에 세우지 않고는 아차, 싶은 생각들이 마치 지혜인 것처럼 여러 구상을 하게하곤 한다.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 1:5-6).”

 

오늘 본문 가운데 드고아 여인의 말에서 ‘하나님의 기업’을 주목하게 된다. “왕께서 들으시고 나와 내 아들을 함께 하나님의 기업에서 끊을 자의 손으로부터 주의 종을 구원하시리라 함이니이다(삼하 14:16).” 하나님의 기업이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치하게 하시는 것이다. 곧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나라, 저 본향을 행해 나아가 주와 함께 누리고자 하시는 영광을 의미한다.

 

오늘 말씀은 문맥적으로 ‘다윗 왕과 그의 왕조’를 가리키고 있다. 즉, 드고아 여인은 자기와 자기 아들의 이야기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는 현상을 은연 중에 알림으로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는 불행한 일에 빗대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곧 드고아 여인은 자기가 다윗을 찾은 동기를 그렇게 밝힘으로 하나님의 기업, 곧 우리가 이루어가야 하는 역사에 대해 ‘다윗’으로 이를 알도록 시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이 어렵든지 적당하든지, 부족하든지 여유롭든지 궁극적인 우리의 목적은 이게 아닌 것이다.

 

내가 아는 아무개의 가장 안타까운 사연은 저에게 두 딸이 있어 개척교회는 도저히 살림도 어렵고 아이들 교육도 힘들어서 친구 정육점에서 고기를 납품하는 일로 품일을 하였다. 그러다 하필(?) 그 일이 잘 되어 거래처가 늘고, 확장한 가게 하나를 맡아 그 또한 생각 이상으로 번창하였다. 문제는 주말에 주로 신선한 도축과 배달이 밀려, 저의 그때 생각은 딸아이 둘 고등학교까지만 뒷바라지 하고 목사로의 사역을 감당할 생각이었다. 설교를 접고 청중으로 그나마 주일 예배만 간신히 참석하다 그것도 여의치 않을 정도로 일요일이 특히 바쁘게 되자… 그렇게 좀 살만해졌을 때, 대장암에 걸려 더는 사업도 사역도 감당할 수 없는 몸이 되었을 때 나는 그의 사연을 들었다.

 

모든 게 다 허사(虛事)라는 말, 보람을 얻지 못하고 쓸데없는 일에 기울인 노력으로… 저는 어쩌다 그리 되었고, 그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로 듣기에는 내게 너무 강렬하여 마음이 많이 아팠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하나님의 기업’ 곧 주의 사업이 우리에게는 무엇인지? 비록 드고아 여인의 입에 비유로 요압의 머리에서 나온 내용이라 해도 다윗을 일깨우기에 충분하였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믿는다고 하면서 실상은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를 게 없는 삶으로, 우선하게 되는 나의 일상을 돌아봐야 한다. 자신이 믿음이 있는가, 시험하라는 말씀으로 과연 도전이 되는지? 막연하게 그저 나는 믿는 자로 여기면서 적당히 교회도 나가고 성경도 보고 나름은 신앙으로 산다고 살고 있어서 괜찮은지? 그러면서 굳이 세상과 신앙을 분리하는데 거부감이 들고, 먹고 사는 일에서 신앙으로 사는 일이 별반 구분이 없다면? 어울리는 이들이나 하고 있는 일들이 굳이 안 믿는 사람이나 믿는다는 자신으로나 크게 뭐 구별된 것이 없다면?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 하는 말씀에 쿵, 하고 심장이 뛰기는 하는지….

 

어쩌면 우린 너무 무뎌져서 산다. 믿는다고 믿는 자신의 믿음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리 여겨 평안함으로 종교가 그런 것인지, 저마다 평안을 얻고자 성경이나 부적이나, 중보기도나 고해성사나, 목사를 찾거나 주술가를 찾거나… 이 땅으로 안주하려는 것이면 그 차이가 뭐 그리 ‘하나님의 기업’을 운운하여 성경의 믿는 사람들처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뭘 꼭 굳이 이렇게까지…! 그리하여 내가 아는 사람만 몇 명인데, 저들은 모두 나름은 믿는 자로 산다면서 안 믿는 자들이 추구하는 삶과 다를 바 없이 ‘다 그런 거지!’ 하는 마음으로 살기도 한다. 뭐라 이른들 자만이란 그렇듯 ‘자신으로 흡족하여, 이만하면 됐다’고 여기는 일인데,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하여 나 역시 하루에도 수골백번 같은 질문으로 나를 회의하고 갈등하다 묵묵히 다시 한 날, 이와 같이 말씀 앞으로 나를 이끌어….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9:1-2).

 

하여,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부디 나의 남은 날들 또한 그러하여서,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105:1-2).

 

하면,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3).

 

오직,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6).

 

나는 할 수 없으나 나로 하게 하시는 이는 하실 것이니,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7, 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