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전봉석 2025. 5. 4. 04:44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삼하 20:2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시 111:10

 

 

상대적으로 내부의 적이 더 어렵다. 악은 우리 안에 있다. 그런 가운데도 온전한 동행은 있다. 앞서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과 함께 건너니라(19:40).” 하는데 김함은 부친 바르실래의 선행으로 다윗과 동행하였고, 다윗이 임종 때도 저를 부탁하는 것으로 그 행적을 짐작하게 한다.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이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그들이 내게 나왔느니라(왕상 2:7).”

 

그런 가운데도 오늘 본문은 또 다른 인물을 조명하는데 그 이름은 세바이다.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삼하 20:1).” 여기서 불량배라 하는데, 이는 ‘무익한 사람’, ‘무가치한 사람’으로 히브리어는 지칭한다.

 

같은 의미로 ‘파괴적인 사람’이란 뜻이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칠 때 따라오며 저주하던 시므이를 두고도 같은 의미로 설명하였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16:7).” 그렇듯 우리 안에 부도덕하고 사악한 속성으로 하나님과의 사이를 무익하게 하고 쓸모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4-16a).”

 

오늘 여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는 사울 왕의 친척으로 추정된다. 그는 베냐민 지파로서 사울을 지지하는 과격한 선동가인 것은 분명하다. ‘저가 나팔을 불었다.’ 나팔은 수양의 뿔로 만든 양각 나팔이다. 악기로 사용되기보다 신호용으로 쓰였다. 이것은 임박한 재앙을 경고하거나 파문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세바가 이를 불어 다윗 왕의 파문과 자신의 반란을 선포하였다.

 

이는 이스라엘이 다윗으로부터 분열을 촉구하였다. 세바는 ‘다윗 왕’이라 호칭하기보다 “이새의 아들”로 부르면서 자신들은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하고 의도적인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일종의 불복이다. 내부의 갈등은 그렇게 파문을 일으켜 이를 따르는 백성들도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갔다.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20:2).”

 

이는 오늘 우리 현실에서의 사회 상황으로도 알 수 있다. 우리가 누릴 하늘의 영광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로로 인함인 것을 알기가 쉽지 않다. 이에 바울은 단언하기를,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이 말씀은 늘 나의 심금을 울리는 것으로 전적인 내 이야기다. 나는 일한 게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자인 것을 인정한다. 불법에 사함을 받았다. 나의 죄가 가리어졌다. 주께서 나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심으로 나는 감히 의인으로 삼으심을 받았다. 바울도 자신을 그리 여겨,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 15:9-11).”

 

어쩌면 이는 내가 아는 내 곁의 모든 믿는 자들의 특징이다. 누구도 자신을 내세워 자랑하지 않는다. 말하다 울컥, 눈물을 머금으며 주의 은혜에 감사하는 고백을 자주 듣는다. 곧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이렇듯 우리 안에 ‘김함’이 있고 ‘세바’가 있다. 이 두 속성은 서로 공존한다. 그러다 어느 한 쪽이 나를 지배하는데, 감사와 원망과 찬송과 근심이 그러하다. 순종과 초등학문도 그러하다. 즉 세상의 이치와 가치로 판단할 수도 있고 순종함으로 수긍하는 마음으로도 할 수 있다.

 

결국 자기주장을 포기할 때 내 안의 평안이 깃들고, 공동체의 하나 됨도 가능해진다. 일련의 급작스런 대통령선거를 치르면서 우리나라는 격랑의 소용돌이에서 두 패로 갈리는 것 같다. 그렇듯 교회의 불화나 가정의 것도 다르지 않다. 이에 성경은 늘 가르치시길,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2-3).” 하심으로 우리의 근신함을 요구한다. 곧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그러니 우리에게 항상 두 길이 놓이는 셈이다. ‘김함의 동행’이 있고 ‘세바의 거절’이 있다. 이를 따라 동요하는 마음도 문제다. 오늘도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삼하 20:2).” 그러니 쓸려 다니는 안개 같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짙은 안개로 바람에 쓸리고 수증기에 날려 온 사면을 가리는 것 같지만 해가 뜨면 순식간에 사라질 연기 같다. 사람들의 마음이란 그와 같고 오늘 나의 마음 속에서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심정이 그와 같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는 행위는 다윗 왕에게 등을 돌려 그의 통치를 거절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때 세바가 반란의 격문으로 외친다. 후일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때 여로보암에 의해 주창된 말도 같았다.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왕상 12:16).”

 

그런 거 보면 서로가 하나 된다는 것이 그처럼 어렵고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우리의 의지나 선택으로는 그때는 옳고 지금은 틀린다. 늘 그런 식이라 한결같기가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도 유다 사람들은 마음을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다윗을 따랐다. 세바의 반란이 시작된 길갈은 요단 강가에 위치했다. 길갈을 넓은 의미에서 요단이라 하고, 유다는 ‘합하여 좇았다.’ 합하다는 ‘들어붙다’, ‘연합하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의 신앙이 그렇듯 정의된다.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시 102:5-7).

 

하고 주께 아뢰는 것,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

(119:25, 31).

 

그러니까 우리가 삶의 고달픈 현실에 붙들려 괴로움과 고난이 우리에게 달라붙을 때 우리는 그럴수록 주께 더 매달리며 말씀으로 증거를 삼아 사는 것이 신앙이다. 결국은 겸손이 문제다. 그러해서 내가 어찌 알아서 하려 할 때가 교만이 일고, 그러므로 내가 주 앞에 더 아뢰고 고함으로 주께로 더 가까이 하는 것이 신앙이다. 결국은 때가 이르렀을 때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될 때가 오는데,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0-11).”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찾아 앉을 것인지, 남으로 나를 높일 수 있게 낮은 자리에 가 앉을 것인지. 또는,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17-18).”

 

이러한 예화가 오늘 우리 현실의 단면을 그대로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선택의 기로에서 어찌할 것인가 하고 묻는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그러므로 굳이 꾸미거나 거짓으로 자신을 숨길 수 없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9).” 있는 그대로 주 앞에 설 때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모든 게 다 때가 있고 결국은 홀로 남는다. 주 앞에 혼자 마주해야 할 날이 있다. ‘야곱의 얍복강’에서와 같이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빌 2:29-30).” 하나님의 유일하신 목적은 우리로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이를 위해 더러는 원치 않는 일을 당하나 그것으로 이루시고자 하는 주의 뜻을 알면 굳건해진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호 10:2).”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7-8).”

 

한데 오늘을 살면서 현실적인 문제는 언제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 ‘김함의 동행’인가? ‘세바의 반란’인가?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자주 얼굴을 달리하듯 주를 멀리하다 또 가까이 하는 듯 도우심을 구하면서 오락가락하곤 하는지? 오늘도 주 앞에 참 회개가 필요하다.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스 9:5-6).”

 

하필 ‘마침 거기에 불량배 세바’가 속삭인다. 그럴 때마다 언제 거기에 있었는지 몰랐던 나의 불안과 염려와 근심으로 감사보다 한숨을, 주를 의뢰하기보다 나의 판단으로 생각하기를, 내 안에 이는 이와 같은 ‘김함과 세바’ 사이에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곧 우리의 심지는 굳건하여 구할 것은 충성뿐이기를.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 3:6).” 하심을 명심하며,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계 2:26, 28).”

 

오직 주만 바람으로,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 111:1).

 

이와 같이 내 곁의 주의 사람들과 하나 되어 전심으로 감사하며,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5).

 

이에 따른 확신으로,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