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전봉석 2025. 5. 9. 04:26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

왕상 1:30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시 116:3-5

 

 

다윗도 나이 들어 늙었다. 다윗 왕의 노환을 언급하며 오늘 본문은 시작한다. 더는 국정을 돌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압살롬의 다음으로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려 하였다. 다윗이 죽기 전에 솔로몬이 즉위할 수밖에 없었다. 천하의 다윗이 늙었다. 늙는다는 일은 생의 무상함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시간이 가까운 것이다. 베들레헴의 이름 없는 목동에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하나님은 다윗을 세우셨다. 다윗의 생은 파란만장하였고, 숱한 역경의 연속이었다.

 

사울에게 쫓겨 광야로 떠돌던 세월이 다윗의 영성을 구성한다. 다윗은 많은 날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그러는 동안 이스라엘은 영토를 확장하였고, 성전 건축의 기반을 다졌다. 다윗은 명군(名君)이었으며 성군(聖君)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업적은 남았다. 무엇보다 다윗의 영성은 놀라운 저의 신앙고백들로 시편을 가득 채우고 있다. 여러 행적을 살필 때 저는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곁에서 주와 함께 하였다.

 

그런 가운데 오늘 그의 늙은 나이와 기력이 다한 몸으로도 진실한 신앙을 보게 된다.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임의로 왕이 되려 할 때 선지자 나단은 이를 바로 잡았다.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에게 바른 왕권의 계승을 일깨우고, 다윗의 마지막 통치를 바로 잡는다. 아도니야는 헤브론에서 통치할 때 학깃을 통해 낳은 넷째 아들이다. 첫째 암논은 이스르엘의 여인 아히노암을 통해 낳았으나 압살롬에 의해 죽었다. 둘째 길르압은 갈메 여인 아비가일을 통해 낳은 아들이고, 셋째가 압살롬이다. 저는 다윗에 맞서다 죽었다.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었다.

 

오늘 아도니야는 ‘스스로 높여서’ 왕이 되었다. “그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5).” 여기서 ‘스스로 높여서’ 할 때 이는 교만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독자적인 모든 행동을 가리킨다.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대저 젖을 저으면 엉긴 젖이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잠 30:32-33).” 이와 같은 원리로 교만은 하나님의 진노를 더한다.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의 아들들 중에 아도니야가 다음 연장자였다. 때문에 다윗이 늙고 기력이 쇠하자 아도니야는 스스로 판단하여 왕권을 가지려 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정하신 바, 저는 주를 경외함이 없었음을 알게 한다. 이스라엘의 장자권 보다 우선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인 것을 저는 알지 못했다.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신17:15).”

 

그러므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는 앞서 솔로몬에게였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2).” 그리하여 “다윗이 그의 아들 솔로몬을 불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부탁하여(대상 22:6).” 이른 것을 아도니아는 알지 못했다. 곧 스스로 높여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아도니야의 용모가 준수한 자로 소개한다.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왕상 1:6).” 이에 성경은 분명히 밝히시는 바,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더욱이 아도니야의 주위 인물들은 특히 군대 장관 요압이 있었다. 대제사장 아비아달도 같이 하였다. 당대들의 저들은 권력자들로 나라를 통치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왕상 1:7).” 오늘도 그렇듯이 정치란 그 곁에 함께 하는 사람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저들의 권세만으로도 아도니아는 교만해져서 스스로 왕이 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역사의 모든 현장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결국 멸망에 이른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시 107:10-11).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는 어느 때보다 정치에 민감해졌다. 그야말로 전혀 관심이 없던 아내도 요즘은 자주 누구에 대해, 어떤 상황에 대해 언급한다. 나는 이를 가급적이면 저지한다. ‘한 손에 성경을 한 손에 신문을 들라’고 했던 본 회퍼 목사의 시대와 조금도 다를 게 없는 반복의 정치 현실이다. 당시는 실제 히틀러의 폭정이 저로 하여금 목사로서 정치참여에 적극적이게 하여 실질적으로 히틀러 암상을 꾀하기도 하였다. 나는 이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하나님의 일을 사람이 나서는 데는 아도니야의 ‘스스로 높여서’와 같은 교만이 작동하게 되어 있다는 것에 주의한다. 그런 점에서 자주 아내의 말을 저지한다.

 

그때나 오늘이나 시편의 진술과 같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결국 원인과 결과가 뚜렷한 죄의 속성은 한 마디로 교만 때문이다. 아도니야는 ‘앞서 달리는 자’였다. 더불어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였고 그들이 따르고 도왔다.’ 저의 수리한 용모는 스스로 높이기에 손색이 없는 나름의 자격과 세상의 인정을 암시한다. 저의 야심과 그에 따른 만만한 기질도 포함한다. 그리고 용의주도한 정치력 또한 앞섰던 압살롬을 닮았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선한다. 주의 뜻을 저버리면 자신의 판단과 기준만 남는다. 설령 내가 판단하여 누구를 지지한다고 하나 그에 앞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주가 하시는 일에 묵묵히 순종하는 것이 필요한 때이다. 신앙은 결코 환경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바울의 명설교 중에서 꼽으라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나의 나이도 이제 오십대 후반을 지나면서 이와 같은 말씀으로 가만히 멈추게 된다. 어제는 아흔 살이 넘은 장모를 휠체어에 태우고 집 앞 식당에서 손위 처남 내외와 같이 식사를 했다. 총기는 여전한데 혼자 몸을 가누기 어려운 장모의 운신은 딱하다. 그런데 어느덧 그 자녀들도 머리가 하얗게 샜고 어디가 아프거나 사정이 다 있다. 마침 아들이 같이 있어 장모의 휠체어를 끌고 같이 식사를 하고 차를 들고 아파트 한갓진 곳에 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같이 나누었다. 그래봐야 손위 처남이 주도적으로 말을 하는데, 대부분이 부동산에 관련된 것이었다.

 

늙을수록 조바심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으로 몸살이 난다. 전날에는 어디 무슨 개발이 있을 것 같은 서울 어디에서 가리봉동에도 갔었다고 했다. 무슨 개발이 어떻고 어디가 유력하고, 투자냐 보유나 하는 것으로 말에 말을 이어갔다. 그러는 동안 저의 어떤 불안을 느낄 수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끝장일 것 같은,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저는 이제 환갑을 지나 것도 이미 후반부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다 불쑥 교회에서 하는 무슨 양육반에서 성경공부를 하기로 했다는 둥, 지금 무슨 프로그램으로 성경에서 하는 선지서를 공부한다며 내 말을 끌어내려 했다.

 

보면 말하기 듣기가 각각의 은사인 것 같다. 말하기에 전념하는 사람은 듣기에 취약하다. 듣는 자는 말하기에 신중해진다. 가령 나에게 무얼 물을 때 굳이 나의 답이 필요한지 그렇지 않은지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뭐라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전달이 안 될 터, 그럼 가만히 듣기만 하는 것으로 뭐라 이를 것이 없다. 부동산은 아는 게 없고 성경공부에 대해서는 스스로 판단하여 이것저것 열심히 하는 일이라, 오히려 저의 열심에 나의 게으름을 돌아보게 될 뿐이다.

 

결국 우리가 늙는 일은 겉사람이 낡아지는 일이나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일이다. 새로워질 속사람이 없거나 속사람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는 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말씀의 이름이 가 닿을 길이 없다. 공허할 따름일 테고, 그러니 더욱 뭐라도 해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늙어서 더 바쁘다. 가만히, 가끔씩은 혼자서 조용히 하나님과 대면하여 아무 생각도 없이 주의 뜻으로 채워지기를… 그리 권하여도 이와 같은 소리가 무의미할 때가 있다. 그런 상대와의 대화는 어렵다.

 

결국,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 1:21).” 이와 같은 원리가 신앙의 기초가 된다. 주신 이도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라고 한다면 이를 바탕으로 할 때 답은 하나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하여 우리는 믿는 자로 묵상을 하고 하나님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자는 명상을 한다. 묵상과 명상을 분명히 구분하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의 채움과 비움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명상은 ‘스스로 높여서’ 자신이 자신을 비움으로 채우려는 것이다. 묵상은 전적인 주의 뜻을 의지하여 (말씀으로) 채움으로 나를 비워가는 것이다. 사람으로 사는 동안 어찌 저들이 필요한 게 우리에게는 필요치가 않겠나? 그럼에도 다른 것은 ‘스스로 이를 하느냐’, ‘하나님으로 이를 하게 하시느냐’의 차이다.

 

오늘 아도니아와 솔로몬의 결국으로 알게 되는 사실이다. 우리가 주를 사랑한 게 아니다. 주가 우릴 사랑하셨다. 내가 주를 믿는 게 아니라, 주가 주의 이름으로 우리로 믿게 하심이다. 자주 아이와 성경공부를 할 때 언급하는 말도 그래서다. 가장 이해가 안 되지만 가장 우리 안에 확고한 것이 믿음이다. 왜 내가 믿는지, 그런데 나로 믿게 하시는 이의 강권하심은 불가항력적이다. 이 은혜를 알 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이를 알고 밧세바도 솔로몬도 조바심낼 게 없었다. 하나님이 나단을 보내 이를 알릴 때 밧세바는 따랐고, 솔로몬은 순종하였을 뿐이다. 결국 주가 하신다. 어제도 형님 내외는 아들에게 같이 ‘경매강의’를 듣고 ‘그런 일’에 같이 하자며, 무슨 교육이 다음 주부터 한 주간(?) 어디서 있는데 교육비가 백만 원이라나? 나는 뭐라 이르거나 권하지 않았고 실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라 큰 관심도 없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답답하기도 하겠다. 주로 그런 대화라, 만나고 나면 이대로 있어도 되나? 하는 조바심이 내 안에 나기도 한다.

 

그러다 불현듯 누구에게나 인생의 겨울이 온다! 이에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 40:6-7).” 이는 우리 생의 이치라, 느닷없이 가리봉동을 다녀오고, 여전히 어디 취업박람회에 가서 무슨 정보를 듣고 오고, 하루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나는 저의 말을 듣다가, 불안하신가? 하고 묻고 싶었지만 돌아올 말을 짐작하고 꺼내지도 않았다. 묵묵히 듣기만 한 내게 아내는 답답하다며 핀잔을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생의 끝자락이 가까울수록 조금은 혼자, 느긋했으면 좋겠다. 아픈 몸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가야 할 질병과도 친해지면서,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하심을, 오늘도 다윗의 노년에 저로 조용히 늙게 두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세우는 것에서 새 힘을 얻는다.

 

“왕이 이르되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왕상 1:29-30).”

 

이는 주가 하심이다. 필요하면 기력도 주신다. 오늘의 나는 의기소침한 게 아니라 순응을 배워가고, 무력하거나 무관심한 게 아니라 무던하게 주를 바람이다. 딸애가 이별로 진통을 겪고 있고, 아들은 미래가 막연하여 그 마음에 박차를 가하느라 몸부림칠 때에 나는 알면서도 모르는 듯, 이 모든 상황에서 주를 본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 오늘까지 함께 하시며 언제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나의 생을 이끌어주셨던 것처럼 주가 하실 것을 믿는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116:1-2).

 

나는 이보다 더 확실하고 정확한 방법을 모른다. 주가 이루신다는 것으로 나는 기도할 뿐이라.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109:4).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3-4).

 

점점 더 이제 나이가 들어 더는 옴짝달싹 못하게 되는 날에도,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5).

 

이를 확신하기까지,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6-7).

 

그러므로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