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전봉석 2025. 5. 16. 21:55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제단 위에 해마다 세 번씩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또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에 분향하니라 이에 성전 짓는 일을 마치니라

왕상 9:25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시 123:1-2

 

 

주어진 삶에 충실할 때 하나님은 가까이 계신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주신 상황 속에서 감사한다. 솔로몬이 왕궁과 성전 건축을 마치었다. 저는 나라를 올바로 다스리기 위해 일천번제를 드렸다. 이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3).”

 

그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충성한다는 일은, “여호와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에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6:11-13).”

 

그리하여 “솔로몬이 두 집 곧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이십 년 만에 건축하기를 마치고 갈릴리 땅의 성읍 스무 곳을 히람에게 주었으니 이는 두로 왕 히람이 솔로몬에게 그 온갖 소원대로 백향목과 잣나무와 금을 제공하였음이라(9:11-12).”

 

여기서 갈릴리 땅의 성읍 스무 곳은,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 지역으로 아직 그 경계는 모호하고 일정하지 않았다. 뚜렷한 경계가 확정된 것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을 때부터였다. 역사상 이 지역은 끊임없이 여러 민족이 이주해 들어오고 나갔다. 그래서 이스라엘 주민의 숫자가 다른 지역에 비해 적었다. 그러다보니 주로 베니게인들과 가나안 본토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솔로몬 당시 갈릴리 지역은 히람의 나라 두로와 국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 지역의 성읍 스무 곳을 히람에게 주었다는 것은 국경선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솔로몬이 왜 이 성읍들을 히람에게 주었는지 알 수 없다. 히람이 건축 자재를 제공한 것에 대한 보답이었을 수 있다. 히람의 호의에 답례로는 히람이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히람이 두로에서 와서 솔로몬이 자기에게 준 성읍들을 보고 눈에 들지 아니하여(12).”

 

왜 그토록 눈에 들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르기를 내 형제여 내게 준 이 성읍들이 이러한가 하고 이름하여 가불 땅이라 하였더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있느니라(13).” 혹자는 두로 왕 히람이 공급한 건축 자재의 물량이 엄청났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보충으로는 그 영토의 일부가 적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눈에 들지 않았다’는 것은 특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소리다. 즉 두로 왕 히람은 솔로몬에게 받은 성읍이 자신이 제공한 온갖 종류의 풍부한 건축 자재의 대가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내게 준 이 성읍들이 이러한가 하고 이름하여 가불 땅이라 하였더니(13).” 그러니까 당신이 나에게 준 성읍들이 이게 뭡니까? 하는 정도의 어감으로 불만스럽게 여겼다. 추측컨대 해양 민족인 두로는 갈릴리 산악 지대의 성읍은 무가치하였다. 또한 그 성읍들은 메마르고 척박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가불’이라 하였다고 하는데, 가불은 별로 좋은 점이 없다는 뜻으로 무가치하다는 의미의 베니게어이다. 실제 가불은 ‘악고’ 동쪽 약 13Km 지점에 위치한 현재의 ‘카불’일 것이라 한다. 대하 8장 2절에서, “후람이 솔로몬에게 되돌려 준 성읍들을 솔로몬이 건축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거기에 거주하게 하니라.” 하는 것으로 보아 히람은 솔로몬에게서 호의로 받은 성읍들을 솔로몬에게 도로 반환하였다. 그래서 원래부터 이 성읍들은 ‘담보로서’ 히람에게 주어졌을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제단 위에 해마다 세 번씩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또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에 분향하니라 이에 성전 짓는 일을 마치니라(25).” 하고 일련의 성전과 왕궁 건설을 끝낸다. 그래서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이는 “솔로몬이 낭실 앞에 쌓은 여호와의 제단 위에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되(대하 8:12).” 곧 성전 앞뜰의 번제단을 가리킨다. 여기서 해마다 세 번씩 제사를 드렸다. “모세의 명령을 따라 매일의 일과대로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 곧 일년의 세 절기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드렸더라(13).”

 

<무교절>은 출애굽을 기념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봄 축제이다. 무교절과 유월절은 약간 차이가 있다. 유월절은 1월 14일(유대 종교력), 어린양을 제물로 잡는 첫날을 가리킨다. 무교절은 그 다음 7일간을 가리킨다. 그래서 따로 구별하지 않고 이 절기 전체를 ‘무교절’ 혹은 ‘유월절’로 통칭한다(출 12:1-28).

 

<칠칠절> 또는 맥추절은 유대인의 3대 절기 중 두 번째 절기로 일종의 수확제로 드려진다.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 23:16).” 처음 보리를 벨 때부터 밀을 수확하는 7주간이 끝난 다음 날이다. 신약의 ‘오순절’이 바로 이 날이다.

 

<초막절>은 장막절이라고도 하는데, 3대 절기 중에 세 번째 절기로 가을 축제이다. 이 절기에는 광야에서 유랑하던 40년을 회상하면서 계약 갱신의 의식을 갖는 의미이다.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출 23:16, 34:22).”

 

그런데 이 절기는 순례 절기였다고도 한다.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신 16:13, 16).”즉 모든 백성이 성소에 모이는 절기인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이 일상적인 제사는 성전의 참다운 완성을 이루었다는 의미다. 성전을 완전하게 한다는 의미로 ‘성전을 완성된 상태에 두다’ 하는 뜻이다. 곧 우리의 삶이 매순간 늘 그러해야 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에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3).” 하는 것처럼 요셉의 일상이 애굽 사람들에게 그리 여겨지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하여,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시 69:13).

 

곧 기도는 드려지는 제사와 같아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다. 오늘 4절에서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으로도,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하고 이어지는 약속이 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 2:1-2).”

 

하여 나는 오늘도 이 묵상을 글로 쓴다. 기록하여 수시로 읽는다. 문득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거나 층을 오르고 내릴 때 무심히 본다. 봄으로 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내가 복이 있다. 오늘 우리의 말씀 묵상은 일 년에 세 번 그렇듯 드려지는 제사와 같고 그와 같은 제사는 주께 구하는 기도이면서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시 85:8).

 

이처럼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 내가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시기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이와 같은 약속과 맹세가 우리로 구원에 이르고, 이를 다하여 달려갈 길을 끝까지 향하게 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오늘 나의 이 순간이 그러한가? 한 번의 생을 사는 동안 더러는 원치 않는 일로 힘들고 노여울 때도 있지만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이 땅의 삶으로 끝이 아닌 것을,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8).” 아, 이 소망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린 과연 무엇으로 또 한 날의 생을 마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나?

 

보면 그런 것 같다. 생각이 많고 여러 바라는 게 많다는 것은 실제 살만하여서 사는 데 따른 욕심이 있어서이다. 당장 몸이 아파 옴짝달싹 못할 지경이거나, 목구멍이 포도청으로 한 날을 먹고 사는 일이 겨워 쓴물이 날 때 우리가 바라는 한 가지 소원은 간결하고 간절하다. 마치 초대교회 성도들이 재림 주 예수를 사모하며 그 소망으로 폭압적인 시대를 살아냈던 것처럼… 혹은 누가 한 날의 수고로 날마다 주께 의지하지 않으면 다음 날이 고달파서 견딜 수 없는 것 같이 우리의 절박함이란 더욱 더 소망 중에 바라는 것이 있다.

 

하여,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하면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주가 날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이유, 저 본향을 소망함으로 오늘도 무사하였다. 한 날의 수고로 족하였다. 결국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삿 10:13).” 그러므로 고작 이 땅에서 수억 만금을 얻는다 해도, 그 어떤 권세와 명예를 누린다 해도 이는 결단코 무의미할 뿐인 것을.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그러니 사는 게 다들 허무하다. 우물을 곁에 두고 너무 애써 삽질이다. 스스로 웅덩이를 판다한들 그 물을 가두지도 못할 것인데, 어찌 생수의 근원을 마다하고 그와 같이 허망한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일 텐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러므로 두려운 일은,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2-23).”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이상과 꿈을 가지고 산다지만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나는 자주 아픈 게 일인 사람이라, 아내와 동네를 산보하다 어디 구석진 데 서서 아픈 허리나 다리의 통증이 좀 가실 때까지 서있다 보면, 유난히 우리 동네는 노인인구가 많아서 그런가? 가던 길을 멈추고 섰거나 앉은 이들을 보면서 동질감을 느낀다. 아담 이래로 모든 인류의 숙명이려니… 그렇다면 약속의 소망을 붙들고 산다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사느라 기를 쓰고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러는 동안 주가 이루시는 영광을 소망하며, “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1-22).” 하여 우리는 협력한다. 오늘 솔로몬도 이를 깨달아서 훗날에 진술하기를,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 그러니 서로 또 같이 주의 나라 가는 그날까지 기도로 중보하고 말씀으로 위로하며,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 123:1).

 

우린 주를 바람인데, 나의 이 간절함은,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2).

 

하면,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3).

 

사는 일이란 그와 같아서 몸의 일도 일상의 여러 얽히고 설킨 일들도 그러하여,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4).

 

이에 오늘도 주 앞에 나아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