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왕이 포학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새 노인의 자문을 버리고 어린 사람들의 자문을 따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는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니라
왕상 12:13-14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5-6
하나님은 정하신 뜻에 따라 일하신다. 오늘의 이 모든 일이 르호보암으로 인한 것 같지만,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시는 데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심이더라(15).”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분단되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리었다.
저로 ‘포학(暴虐)한 말’을 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어찌 감당해야 하는 것일까? 포학하고 난폭하게, 자신의 고집대로 그리 정하게 하심으로 초래될 역사의 과정을 주가 그리 두심으로 이루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바울의 설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곧 르호보암은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여 솔로몬을 모셨던 원로들에게 물었다. “르호보암 왕이 그의 아버지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과 의논하여 이르되 너희는 어떻게 충고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냐(6).” 그러나 저는 또 “왕이 노인들이 자문하는 것을 버리고 자기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어린 사람들과 의논하여(8).” 고약하게 굴었다.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11).”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여로보암이 이끌어 분단하게 된 것인데,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심이더라(15).”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모든 만사(萬事)를 주장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한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시 103:19).
이를 인정하는 일이란,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 4:34-35).“ 하는 느브갓네살 왕의 입을 통해서도 알게 된다.
백성들의 요청에 르호보암은 어처구니없이 거부하였고(12-14), 이와 같은 실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리하여 남북 분열의 파국을 가져왔고,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르호보암의 앞날을 전환시키셨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실로 사람 아히야’이다. 저는 솔로몬 때부터 르호보암에 이르기까지의 활약한 에브라임 지파 출신의 선지자다.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그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11:29).”
이때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심인데, 르호보암이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순간(12-14)이 하나님의 심판의 판결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그의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그의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11:35-36).”
곧 우리의 악함도 선으로 바꾸시는 데 있어 우리는 미처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한다. 이를 다시 바울의 설교에서 이해하면,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 우리의 오늘이 그와 같지 않은가 돌아본다.
어제도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어려워 산보를 하며 생각하였다. 친구는 점점 한쪽 눈의 시력이 없어지고, 또 한 친구는 주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일하고자 하나 그 체력이 안 되어서 고달프다. 저마다 주를 믿는다고 믿으면서 주의 일에 성심을 다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서 몸이 점점 쇠약하거나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회의가 든다.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아서 그것으로 겪는 갈등은 우리들로 낙심하게도 한다. 그럼에도 주의 길에서 묵묵히 준행하는가하면 다른 길을 모색하느라 기진하여질 때도 있다.
이러저러한 나의 일상도 속상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곤 하는데, 내 곁의 믿는 자들로 그러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볼 때면 더욱이 의욕을 잃고는 한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바를 바로 알기란 전적으로 주를 신뢰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하여 고난의 대명사 욥을 통하여,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나 또한 이와 같은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기를…. 이는 반드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그러므로 허투루 버릴 게 없는 말씀을 붙들고 행하여야 하는데,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하시는 말씀을 토대로 하여,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6:12, 10:36).” 그렇게 오늘 저녁예배로 드린 말씀으로도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5).” 하는 중보가 필요하다. 결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2).” 하시는 말씀 앞에서 새삼 겸손하게 나의 믿음을 돌아보며,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13).”
결국 오늘의 나에게도, 내 곁의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의 삶에서도 지치지 않기를 위해 기도한다. 친구에게 말할 때는 그와 같은 고난이 우리로 주를 더욱 간절하게 바라게 한다고 말해주었다. 날 때부터 몸이 약한 아이로 부부는 오늘도 기도밖에는 새 힘을 얻을 길이 없어 퇴근 후면 저녁마다 교회로 올라와서 주 앞에 부르짖는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기 위함이 아니라 주의 뜻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사는 일은 고단한데 누구는 그래서 더 주를 뒤로 밀고 자신의 의지로 나아가려 하고, 누구는 그러므로 주를 앞에 모시고 자신은 따를 뿐이다. 나는 이 차이를 내 곁의 믿음의 사람들로부터 배운다. 그래서 더 한 날을 주와 함께 살고자 하는 이가 있고, 그래서라도 더욱 자신의 뜻을 굽힐 수 없어 힘닿는 데까지 스스로의 보람을 찾고자 하는 이도 있다.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묻는 것 같아서 나는 저 둘 사이를 눈여겨보며 배운다.
우리 행위의 완고함은 단순히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주를 신뢰하는 전폭적인 의지의 정도에 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도 그러했다. “여호와께서 너를 슬픔과 곤고와 및 네가 수고하는 고역에서 놓으시고 안식을 주시는 날에 너는 바벨론 왕에 대하여 이 노래를 지어 이르기를 압제하던 자가 어찌 그리 그쳤으며 강포한 성이 어찌 그리 폐하였는고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통치자의 규를 꺾으셨도다(사 14:3-5).” 결국, 모든 일의 결국은 하나님이 이루신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으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육신의 소욕이 아니라 영의 소욕을 따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도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오늘의 이런저런 조건과 상황이 우리를 절망적이게 한다 해도,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곧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삶으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데서 소망을 얻기를.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고로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이는 주신 나의 한 날의 수고로 족할 것이다. 어디가 아프고, 어떤 일로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해도,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시 143:10).
오늘 우리의 어떤 어려움이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하는 스승이 된다. 그렇게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같이 기도를 부탁하고, 어떤 어려움을 토로하여 주 앞에 같이 엎드릴 수 있는 것이 복이었다. 그야말로 내 코가 석 자인데도 누구의 어떤 일로 마음이 쓰여 먼저 안부를 묻고 주의 이름으로 권면할 수 있는 일이란, “훈계에 착심하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23:12).”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사실 요즘 심적으로 의기소침하기도 하고 마음이 어려워서, 내가 이러고 있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을 자주하였다. 그러다보니 이 일을 계속하는 게 맞나? 싶은 마음으로 한참씩 시달리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말씀이 살아서,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40).” 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음을 확신하면서 오늘도 묵묵히 이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겨져,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욥 23:14).”
결단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주가 이루실 것이라 확신하면서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12).” 그렇지, 내가 알 수 없는 나의 날을 두고 주를 신뢰함이라니,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상대적으로 오늘 르호보암의 어깃장과 그릇된 판단으로 벌어지게 될 미래와 그 일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구속을 이루시는 일이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자신을 우선하여 그와 같은 판단으로는 비극뿐이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겔 34:2).”
하여 오늘을 사는 동안에,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이는,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4).”
하면,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5, 17).”
이를 다시금 명심하게 되면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126:5-6).
하는 오늘 시편의 세계에서 살기를, 결국 이 모든 날들에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3).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읊조리게 되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