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왕상 17:2-4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하나님이 그 종을 먹이시고 책임지심을 확실히 알게 하신다. 아합의 죄를 지적하고 기근이 임하게 하셨을 때, 엘리야를 피하여 그릿 시냇가로 가게 하신 것과 물과 음식을 주가 제공하시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더하여 이마저 기갈 됨으로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보내시고 이 기간을 면하게 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8-9).”
길르앗은 ‘증거의 돌무더기’라는 뜻이다. 신앙적으로 암흑기라 할 수 있는 아합의 시대에 신앙의 증거자 엘리야를 통해 말씀을 회복하시는데, 저가 길르앗 출신임을 밝힌다. 길르앗은 곡창 지대와 목축지로 유명하였다. 일찍이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이곳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얻고자 서로 요구할 정도였다(민 32:1-5).
디셉은 엘리야의 고향으로 여러 번 언급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21:17, 28, 왕하 1:3, 8, 9:36).” 길르앗 북방 산악 지대에 위치한 곳일 거라 짐작한다. 또는 납달리에 있는 게데스 남쪽을 디셉으로 알기도 한다. 그래서 디셉 사람이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라면 엘리야는 디셉에서 출생하여 길르앗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쨌든 길르앗은 ‘증거의 돌무더기’란 뜻이다.
엘리야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는 의미다. 실제 엘리야의 생애는 그의 이름을 구현하며 살았다. 성경에는 엘리야의 가족들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는 주전 9세기에 활동하였던 유명한 선지자로서 아합 왕(B.C. 874-853) 때부터 아하시야 왕(B.C. 853-852) 때까지 북왕국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모세에 버금가는 인물로 유대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세례 요한의 정체를 확인하면서 그가 엘리야인지 물어 볼 정도였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요 1:20-21).”
저는 오늘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1)” 여기서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하고 분명한 어조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였다. 이 짧은 선포에 함축된 의미는 대단하다.
분명하게,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확실히 한다. 이 말은 새삼스러운 것 같지만 실상은 ‘바알 숭배’가 만연하였던 상황에 비춰 매우 강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즉 이스라엘의 참 신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시지, 바알이 아니라는 분명한 항변의 선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외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호와가 바로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시다. 하는 뜻으로 그 확신과 단호함이 얼마나 용감하고 대단한지 알게 한다. 바알을 섬기는 시대에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외칠 수 없는 소리였다.
또한 덧붙여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하는 것도 엄청난 외침이다. 이러한 표현은 구약 시대에 결연한 맹세의 형식이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18:10).” 저의 외침과 저항에 사람들도 이를 인정하였다.
우리가 믿는 자로 살면서 내 곁의 사람들이 나의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내가 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내지 못하고 산다면 이는 얼마나 초라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교회를 다니는지, 믿는 자이기는 한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우리의 신앙이 흐리멍덩하여 안 믿는 자들과 별로 구별이 안 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소리다.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렘 5:2).” 누구라도 내가 믿는 자인지, 그 믿음과 신앙에 대해 더러는 조소와 무시가 있을 수는 있어도 주의하게는 해야 한다. 남들로 나를 보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남다른 구별된 삶으로, 구제하고 헌신하며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경건의 삶을 따라 산다고 하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 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14-15).”
하여,
“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호 4:15).”
곧 우리의 경건의 삶이란 실제 생활 속에서 드러나 누구라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단지 상투적인 교인으로,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믿는 식으로는 어림없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상황에서 이와 같은 진솔한 신앙 고백과 그에 따른 인정함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엘리야의 목숨 건 사명과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모든 이로써 알게 하였다는 소리다. 즉 바알을 위시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세력들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살아있는 참 신은 여호와’라는 이 놀라운 외침이 얼마나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겠나?
그리할 때 하나님은 ‘때를 따라 적절히’ 도우신다. 주의 특별한 은총은 ‘내리는 단비’와 같아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남달리 받은 자들에게서 자주 언급되었다. 이와 같이 단비로 비유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은 여러 각도에서 표현되고 있다. 먼저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에,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 11:10-12).”
이는 오늘 우리 믿음으로 사는 자들의 특별한 삶으로도 알게 하시는데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14).” 하는 생활의 보장이 말씀 가운데 있다. 곧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욥 5:10-11).”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일상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할 때,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28:26).” 하는 말씀으로 우리 삶의 법칙을 알아보게 한다. “그가 물방울을 가늘게 하시며 빗방울이 증발하여 안개가 되게 하시도다(27).”
이에,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시 147:8-9).
이와 같이 인자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가 신앙 안에 살면서 얼마나 바로 느끼고 있는가? 하는 부분을 돌아보게 한다. 반면에 오늘 본문의 배경도 그렇듯 오늘도 여러 우상과 그에 대한 숭배가 팽창하여 더 없이 황폐하고 삭막한 현실인 게 느껴진다. 더욱이 이번에 치러지는 ‘대선 토론’을 보고 있자면 토론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서로의 불신과 증오의 골이 깊다. 저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다고 그러는데 각각의 나라와 국민이 다른 것인가? 서로를 적대시하면 서로를 지지하는 국민들이 어찌 한데 어울려 이웃하고 살 수 있겠나싶다.
그렇게 하늘은 더 이상 비를 내리지 않아 생명을 쇠약하게 하며 땅을 메마르게 하리라는 오늘 경고의 말씀이 이 시대의 현상과 그대로 맞물리는 것 같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신 11:17).” 다들 사는 게 어렵다 하고 그것이 서로의 탓이라며 총구를 겨누는 꼴이라, 참으로 위태롭고 안타깝다. 그렇다면 결국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 마침내 너를 멸하리라(28:24).”
우린 이를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내고 있는 것인지? 말씀이 없는 생활이란 그와 같아서 영혼은 가물고 메말라서 먼지만 날리듯 퍽퍽한데도 서로는 괜찮다며 ‘친절한 타인의 얼굴’로 수수방관한다면 결국 저의 황폐함이 나의 영혼에도 목마름으로 다가올 뿐이다. 당시 바알은 땅에 비를 내리는 등 생산력을 주관하는 신이라고 여겨졌다.
가안의 신들에 대하여는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 26:1).” 하고 주가 일찍이 경고하신 바 있다. 그런 가운데 오늘 이 마른 땅과 하늘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그 명맥을 잇듯 엘리야에게 이르셨다. 임하여, 곧 존재하여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소명을 주셨다.
그렇게 엘리야는 아합을 찾아가 경고하고, 요단 강 동편으로 가서 머물게 하신 것에 또한 순종하였다.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3).” 더하실 때,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4).” 여기서 ‘그릿 시냇가’에서 ‘그릿’은 분리, 잔절이란 뜻이다. 잔절은 흐름이 연속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세상의 유행과 문화가 내 삶에 흘러들지 않도록, 따라서 오늘 우리의 삶으로 근신하라, 하심도 그런 뜻으로 통한다.
근신은 단절함으로 경계선을 구축한다. 구별하여 시간도, 돈도, 마음도, 생활도 그리 사용해야 옳다. 즉 ‘숨고’는 피하고, 감추고 하는 뜻으로, 문맥적으로는 아합과 왕후 이세벨의 즉각적인 위협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세상의 타락과 아무렇지도 않은 타협과 억측의 선들(?)로부터의 구별 돼야 한다. 요즘은 정말이지 참과 거짓을 가리기가 어렵다. 누가 모 NGO 단체에 소속되어, 그곳이 기독교 연합으로 아침마다 큐티도 하고 직원들 신앙공부도 한다고 하는데… 워낙에 이단이나 사이비 단체가 많아서 나는 이를 듣고도 잘 구분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듯 구별 되이 살려고 하면 당연히 두렵다. 소위 말해 사회생활을 하는데 어찌 안 믿는 자들과 함께 안 하고, 타 종교와 어울리지 않으면서 살 수 있겠나? 극단적으로 수도원에 들어가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리하여서도 우리에게는 말씀이 그에 따른 묵상과 주 안에서의 깨어 있고자 하는 의식적인 삶의 자세가 필연적이다. 하면 사회에서 도태되어 낙오자가 될 것 같지만 하나님은 ‘까마귀들을 명하여’ 우리로 충분히 살게 하신다.
이때 엘리야와 같이 ‘여호와의 맡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그리 거하고 살 수 있는 것이 복이다. 여기서 엘리야는 ‘피신’을 수치로 꺼리지 않았다. 이 또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온전히 순종하였다. 엘리야는 사람의 취향과 기질에 영합하여 영웅이 되기보다 자신을 잊은 듯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였다. 이를 바울의 설교에서 들어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하는 확신이 오늘 나에게도 있는 것인지? 또한 말도 안 되는 말씀 같은데 하필 가난하고 가련한 과부에게 보내심은 어찜일까?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9).” 그때에도 엘리야는 주변 시선이나 자신의 자존심을 두고 고민하지 않았다.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10).”
다소 뻔뻔하고 수치스러운 일 같은데,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11).” 그런 가운데 더 놀라운 것은 그런 형편의 사람이 또 주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15-16).”
이처럼 순종하는 과부나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13).” 이처럼 당당히 요구하는 엘리야나… 저들 속에 주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셨다면 어찌 이럴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말씀으로 의지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4).” 할 때에 오늘 말씀에서 더욱 시편의 고백과 기도가 가깝게 다가온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그러한 것은 온전히 주가 이루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2).
여기서 ‘젖 뗀 아이’라 소개하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게 아니라, 엄마를 알고 그 품의 안식을 잘 아는 것이다. 그저 막연하게 의지하여 품에 안기는 게 아니라 뚜렷하게 알고,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안전한 엄마의 품인 것을 아는, 지각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와 같이 오늘 나에게도 전하신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