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전봉석 2025. 6. 1. 21:20

 

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왕하 3:1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 139:23-24

 

 

북이스라엘의 아합이 죽고 모합이 배반하였다.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5).” 이어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 왕도 죽자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의 동생 여호람이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이때 남유다의 왕은 여호사밧으로 18년째 통치하고 있었다.

 

여호람은 그의 아버지 아합이 만든 바알의 우상을 철거하였다. 물론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이하였음이라(2).” 곧 그의 부모처럼 악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은 그를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평가한다. 즉 눈에 보이는 우상들은 철거하였는지 모르나 여전히 여로보암이 저지른 우상숭배의 죄에서는 돌아서지는 못했다.

 

즉 눈에 보이는 우상은 철거하여도 마음에 있는 우상까지는 철거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외적으로는 결단하여 그럴 듯하게 할 수 있으나 마음의 결단으로 이어져 온전하게 주 앞에서 선을 행하기란 그처럼 어렵다. 여기서 ‘눈에 보이는 우상’과 ‘마음속에 있는 우상’으로 나누어 보는 것은 남들 이목과 자신의 처신으로 그럴 듯하게 행할 수는 있겠으나 마음에 ‘두고 사는 수많은 우상들’까지도 철거하는 것은 다르다. 곧 자신만 아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로 ‘행함 없이 눈으로만 보이는 경건함’으로 마음을 들여다보시는 하나님을 결코 속일 수 없다. 곧 혼자 있을 때 나와 남들 앞에서의 나는 다르다.

 

모압은 다윗 왕 때 이스라엘의 속국이었다. 양털을 조공으로 바쳐왔다. 그러다 아합이 죽자 모압은 이스라엘을 배반했다. 이에 이스라엘 왕 여호람은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사절을 보내 함께 모압을 치자고 제안한다. 여호사밧은 기꺼이 함께 한다. “또 가서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 이르되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올라가리이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하는지라(7).”

 

모압으로 가는 두 길이 있었다. 하나는 요단강을 건너 모압 북쪽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남단을 돌아 에돔으로 해서 모압 남쪽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여호사밧은 이 두 길 중에 에돔 광야 길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아마도 이쪽이 산이 많고 험난하여 상대적으로 경계가 소홀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유다의 속국이었던 에돔 군대도 동참시킬 생각으로였다.

 

에돔 역시 연합군에 합류했다. 그러나 그 길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7일 동안 행군하던 중에 물이 떨어진 것이다. 북이스라엘의 여호람은 난관에 봉착하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한다고 탄식했다. 그때 여호사밧은 생각이 달랐다. 이런 상황에 주께 물을 수 있는 선지자를 찾아보자고 제안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엘리사를 만나게 되었다. 같은 국면에서 두 사람의 차이가 이렇듯 다르게 드러난다. 

 

엘리사는 우상숭배의 죄에서 완전히 돌아서지 못한 여호람의 모습을 지적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여호사밧이 있어 응하였다. “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14).” 하고 주의 뜻으로 그 난국을 해결할 방법으로 계곡에 도랑을 많이 파라고 하였다. 다소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한 명령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선 생각하게 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악함도 선함도 각각에 하나이나 더 악한 것과 더욱 선한 일이 있다. 마치 영광은 하나이나,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하심과 같이 죄에도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고, 선에도 구원과 무관한 의로움이 있다. 가령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가 없고, 주의 뜻으로 행함이 아니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하여 오늘 엘리사는 여호사밧을 보고 주의 뜻을 전하는데, 계곡에 도랑을 파라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바람이 부는 것도 보지 못하고, 비가 내리는 것도 보지 못하겠지만, 이 계곡은 물로 가득 찰 것이며, 너희와 너희의 가축과 짐승이 마시게 될 것이다.’ 곧 믿음으로 그리 순종하든가, 어처구니없는 말로 듣고 그리 행하지 않던가…. 이런 일쯤은 주님께 너무 가벼운 일이지만 우리로서는 말도 안 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끔 나에게 그와 같은 것은 내 안의 믿음이다. 나로서는 믿지 않고 믿지 못하는 게 더 합리적이고 타당한데, 이상하게 내 안에서 믿음이 역사하시는 것과 같다. 말씀을 전하다가도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하는 부분에서 자주 울컥, 한다. 더욱이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하실 때면 이 말씀이 감격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결국 주님은 모압을 넘겨주셨다. 저들의 요새와 모든 아름다운 성읍을 치실 것이다. 좋은 나무를 쓰러뜨리며, 물이 솟는 모든 샘을 막을 것이고, 모든 옥토를 돌짝밭으로 만드실 것이다. “당신들이 모든 견고한 성읍과 모든 아름다운 성읍을 치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모든 샘을 메우고 돌로 모든 좋은 밭을 헐리이다 하더니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19-20).” 이와 같은 예언대로 다음 날 아침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물이 에돔 쪽에서 흘러와 땅에 가득하였다.

 

중요한 선택 앞에서 하나님을 먼저 기억하였던 여호사밧의 신앙이 귀하게 다가온다. 어떤 어려운 일 앞에서 물론 기도한다고 하고, 신앙으로 임하다고 하나 ‘그 속의 우상’은 염려와 근심으로 다른 어떤 방법을 찾고, 그러는 데 있어 남을 탓한다. 이런 단적인 여호람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모든 선택에서 최선이란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도다. 성도란 그에 걸맞은 생활과 마음가짐이 동시에 같아야 한다. 겉으로 남들 보기에 어떠하든지, 주님은 외식하는 자들을 경멸하셨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16).” 겉으로 그럴듯하다 하여도 이는 악이다.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22:18).”

 

오늘과 같은 시국에는 분쟁과 이단과 온갖 거짓이 난무하다. 이는 모두 우상숭배의 또 다른 면이다.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 11:19-20).” 그러면서 어느 쪽을 지지하는 데 있어 스스로도 거침이 없이 상대를 비판한다. 이에 따른 비판으로 우리가 비판을 받을 것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하면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어떤 것을 붙들어야 할까?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그렇다고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하란 소리가 아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

 

일련의 상황과 사건을 통해 나는 주께 감사한다. 이제와 하는 소리지만 작년 12월 3일 뜬금없이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밤에 나는 교회에서 묵상 글을 쓰다 가족들의 카톡을 받고 뒤늦게 알았다. 밤새 급박하던 상황을 보느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샜지만 감사하였다.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말이다. 모든 일은 차치하고 자주 여러 사술과 주술적인 것으로 나라가 운영되는 것에 마음이 어려웠다. 그래도 싫든 좋든 아직도 반이 더 남은 임기를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답답해하였다.

 

아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겁이 나는지 전화를 했을 때, 나는 교회에서 오히려 ‘잘 됐다.’ 하는 마음이었고, 그리 말하며 안심시켰던 기억이 난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싫든 좋든 2년은 족히 더 임기가 남았을 것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마치 물이 떨어진 계곡에 도랑을 파라고 하시는 것과 같은 국면을 맞닥뜨리게 하신 것이다. 그 뒤로 반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오히려 오늘의 혼란이 감사하다. 마치 태풍이 몰아쳐서 여기저기 흩어졌던 쓰레기와 불순물이 쓸려 내려가게 하시는 것 같다. 더욱이 난다 긴다 하는 말쟁이들이 이번 일로 그 민낯이 드러나는 것에도 감사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참으로 기묘하다.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너희 악행과 가증한 행위를 더 참을 수 없으셨으므로 너희 땅이 오늘과 같이 황폐하며 놀램과 저줏거리가 되어 주민이 없게 되었나니(렘 44:17, 22).”

 

역사는 되풀이 되고,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처럼 죄는 오늘 본문의 여호람의 그것이나 현실의 우리 모습이나… 결국 우리는 다 어쩔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생활 하듯이 행동해야 할 것을,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3-4).” 오늘 이 현실의 모습은 수천 년 전 이스라엘의 역사와 다를 게 없으나,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9).”

 

결국은 주가 이루심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겔 2:7).” 이것으로 내가 할 일은 분명해진다. 성경의 배경과 오늘의 현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하심인데,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1-12).” 오늘을 보고 성경을 읽으면서 그 의미를 되새길 때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오늘의 이런저런 어려움이 오늘의 나로 열심을 내게 하시려는 것이고 이로써 회개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는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고로 오늘의 일은 기도이다. 개인적으로는 돌아보아 회개의 기회로 삼는 것이고, 나아가 교회와 나라와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오늘에 더하시는 사명이었다.

 

그렇게 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2-3).”

 

이 모든 일에서 주가 행하심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시 25:12).

 

하여,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 139:1-4).

 

아,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6-7).

 

오늘 시인의 마음으로 주께 아뢰기를,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4).

 

이는,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6-17).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23-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