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전봉석 2025. 6. 12. 19:33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왕하 14:27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시 150:2

 

 

우리의 죄가 얼마나 지속적이고 반복적인지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알게 된다. 북이스라엘이라 해서 하나님이 결코 저버리지 않으심을 오늘 말씀 가운데서 느끼게 된다. 이에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27).” 이러한 내용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만이 살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남유다는 그나마 하나님을 경외하는 어머니나 부친의 영향으로 주 앞에 나름 선을 행하였다. “그가 왕이 된 때에 나이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호앗단이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2-3).” 다소 미진하고 아쉬움이 들지만 그래서 북이스라엘보다는 나은 듯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정직히 행함으로 주 안에서 순종하는 것이다. 하여,

 

“마음이 굽은 자는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 11:20).”

 

그럼에도 번번이 죄로 물들고 금세 또 주를 거역하는 자리에 들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아마샤의 말년에 우상을 숭배하였고, 그의 죄를 책망하는 선지자를 멸시하였다. “선지자가 아직 그에게 말할 때에 왕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왕의 모사로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하니 선지자가 그치며 이르되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줄 아노라 하였더라(대하 25:16).”

 

그렇게 해서 오늘 아마샤는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패하는 신세가 된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 은과 모든 기명을 탈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고서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왕하 14:13-14).” 그러니 말씀에 일관되게 순종하여 자신을 정직히 세우는 일은 아무래도 불가능한 모양이다. 곧 신앙의 처음과 끝이 같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딤전 5:12).”

 

그러니 누가 감히 오늘의 믿음을 자부하며 자신을 자긍하겠나? 분명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하고 경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천하의 다윗도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이는 죄에 빠졌고, 누구보다 복에 복을 더하여 받은 지혜의 왕 솔로몬은 그의 노년에 부인들을 사랑함으로 우상숭배의 늪에 빠져 노년을 망쳤다. 이처럼 구제불능으로 우리는 누구라도 아차, 하는 순간에 하나님을 저버리고 믿음을 잃기 일쑤인데….

 

오늘부터 가정예배를 점심식사 후에 드리고, 아내와 산책을 한 후 나는 일찍 교회로 온다. 설교원고를 마무리하다 이방 왕 ‘고레스’를 친히 세우시고, 하나님을 잊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구원자로 삼으시는 것에 새삼 송구하고 놀랐다. 하나님은 결국 바사 왕 고레스를 도구 삼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주셨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사 42:2-3, 43:14).”

 

이렇게까지 된 것은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시매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42:25).” 오늘 본문의 남유다 아마샤도, 북이스라엘 여로보암도 저들이 어찌 그러한 징계를 당하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렇게 해서 가까운 훗날에 바사의 왕 고레스를 세워 구원자로 삼으셨는데,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친히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42).”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시 118:21-23).

 

오늘의 본문에서도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27).” 하시는 부분에서 그저 놀랍고 감사하기만하다. 곧 이 모든 일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유일하신 섭리자이심을 밝힌다. 이사야는 이를 전달하였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사 45:5).” 이는 단지 남유다에 국한 된 말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북이스라엘에만 국한 된 말씀도 아니었다. 이는 오직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6).” 하심으로 만국이 다 알게 하신다. 저는 누구신가?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 45:7).”

 

고로 오늘의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이 하나도 허투루 다루어지는 게 없고, 이 모든 일과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궁극적으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그리하여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곧 오늘에 이르러 이 구원의 생수가 우리에게도 가득하게 하심인데, 다시 한 번 되새기지만 우리가 살아있는 가장 귀한 이유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하심이다. 아직 숨이 붙은 자는 기회가 있다.

 

결국 이러한 말씀이 우리의 가는 길을 비추신다. 우리의 망가지고 감각을 잃은 양심으로 무엇을 되돌릴 수 있겠나?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그렇게 이미 죽은 바 된 우리를 다시 살리신 것이라,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37:31).

 

말씀으로밖에 답이 없다. 세상의 이런저런 일들로 우리는 갈등하고 때로는 저들을 부러워하다 미끄러지고 넘어지기 일쑤이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73:3).

 

그러니 상대적으로 생각해서는 이 신앙을 지켜낼 자신이 없다. 그렇게 알지 못하는 나의 연약한 심령을 아시고 하나님은 이방의 왕 ‘고레스’를 불러서 세우시기도 했다. 결국 하나님은 그의 일을 의로 이루신다고 하신다.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18).”

 

이를 분명히 하심은 “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21).” 그러므로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15).” 하고 나는 오늘도 감탄하며 주의 말씀을 정리하고 다듬으며 설교원고를 쓰고, 묵상글을 쓴다. 말씀으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새삼 확신한다. 이에,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하나님은 이를 알리시는 데 있어 다른 무엇으로 비교할 수도 대신할 수도 없어 스스로를 걸고 맹세하셨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23).” 우리는 번번이 세상 것에 현혹되어 한 눈 팔기 일쑤이지만 결과적으로 ‘애굽의 생산물들과 구스의 무역한 것과 스바의 장대한 족속들이 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속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소득과 구스가 무역한 것과 스바의 장대한 남자들이 네게로 건너와서 네게 속할 것이요 그들이 너를 따를 것이라 사슬에 매여 건너와서 네게 굴복하고 간구하기를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 하리라 하시니라(14).”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그날이 오면 세상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만이 세워질 것이다. 그때에는 헛된 우상을 만드는 자들과 이를 따르며 섬겼던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원한 구원으로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시요, 모든 우상들은 헛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4:8).

 

이를 맛보아 알면 알수록 주를 더욱 바라게 될 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그러므로 오늘도 주의하고 또 단조로운 생각과 일과로 주와 함께 하는 것에 우선하는 것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 아니면 나라고 별 수 있겠나? 언제 어느 순간에 훅, 하고 쓸려갈 수 있는 것을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8-9).”

 

점점 더 득세하는 이단과 우상과 온갖 허탄한 진리들이 간질거리듯 나의 이런저런 어려움을 가지고 속닥거린다. 누구도 그러고 사는데, 다들 그런 거지 뭐, 하는 속삭임은 마치 ‘나무로 깎은 우상’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처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어 내가 택하고 취하여도 옳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다. 하여 이사야서에서는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사 45:24-25).”

 

내가 주의 자녀로서 주를 자랑하는 삶으로 이어지기를. 그리하여,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하여 오늘도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서 주께 간구하기를,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그러므로 주께 구하여,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150:1-2).

 

어느덧 또 5개월, 얼추 반년이 지나고 시편의 마지막 장을 묵상한다.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시편을 항상 같이 묵상하는 것은 시편으로 시편을 살고자함이다. 시편을 산다는 것은 항상 기도하고 항상 찬송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으로 오늘을 살고 싶다. 나 같은 자를 오늘까지 함께 하시는 데 있어 나보다 더 은혜를 받은 자로 살 수 있었을까? 나는 문득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다 감격한다. 어린 게 참 서러웠겠다, 하고 생각하다가도 그러한 기억들이 오늘 나의 '나팔'이 되고 '비피와 수금'이 되어 주를 찬양하게 하는 악기가 되어줄 줄이야!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3-5).

 

그리하여 부디 나의 사는 날 동안 좌고우면하지 않고,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