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왕하 15:34-35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
마치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처럼 죄에서 죄악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다가 다시 용서와 회복이 반복되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열왕기서에는 해피엔딩이 없다. 다윗과 솔로몬 시절에 누렸던 찬란한 영광이 점차 몰락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방인들의 손에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자 하는 내용도 아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화려했던 과거에 대한 향수도 아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모두 각각의 왕들이 통치하는 면면을 기술하면서 빠지지 않는 부분은 그 왕의 업적을 소개하는 내용도 아니다. 다만 ‘여호와 보시기에 그 행실이 어떠했느냐?’ 하는 것에 늘 초점을 맞춘다. 그것으로 거의 대부분이 악을 행하였고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다.
오늘 본문에서도 “아사랴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3-4).” 그나마 남유다는 좀 낫다. 북이스라엘은 배반과 반역으로 얼룩져 왕권의 계승이 뒤죽박죽이다. “유다의 왕 아사랴의 제삼십팔년에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가 사마리아에서 여섯 달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그의 조상들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8-9).”
이처럼 ‘조상들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하거나,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그를 반역하여 백성 앞에서 쳐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디르사에서부터 사마리아로 올라가서 야베스의 아들 살룸을 거기에서 쳐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0, 14).” 이와 같이 이스라엘 왕들에 대한 평가는 거의 반복되는 내용으로 죄악이 결국 왕국의 혼란과 반역을 되풀이하였다. 그렇게 열네 번째 왕인 스가랴는 집권 기간이 6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도 열다섯 번째 왕이 되는 살룸에 의해 척살 당했다. 그것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을 당했다.
이는 한 마디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까닭이다. 저들은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하고 성경은 정리한다(18). 열왕기서는 이러한 평가를 반복해서 기술하고, 하나님 없이 세워지는 왕국의 최후를 가감 없이 서술한다.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부터 다들 ‘자신의 열심’으로 왕국을 세우고자 했다. 그 열심이 결국 자신들을 삼켰다.
결국 앗수르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하고, 므나헴은 은 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 자기를 도와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였다. 그 돈은 부유한 백성들에게 강탈하듯 거두었고,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거둬서 앗수르 왕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강탈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되돌아가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20).”
앗수르 왕 불은 흔히 디글랏 빌레셀로 알려져 있다. 앗수르는 이 디글랏 빌레셀 때에 근동지방의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디글랏 빌레셀의 군사가 쳐들어오자 므나헴은 자신의 손으로 왕국을 굳게 세우고자 했다. 그 방식은 조공을 바치는 것이다. 그 조공의 액수는 부유한 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조달했다. 므나헴은 왕위에 오를 때도 그러했지만 왕위에 오른 후에도 백성의 삶은 전혀 안중에 없었다. 므나헴을 향한 호세아 선지자의 경고가 있었다.
“그들이 여러 나라에게 값을 주었을지라도 이제 내가 그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지도자의 임금이 지워 준 짐으로 말미암아 쇠하기 시작하리라(호 8:10).” 결국 므나헴은 자신의 왕국을 세운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손으로 왕국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두 일곱 명의 왕과 그들의 통치 행적이 서술되었다. 남유다에서 두 명의 왕이고, 북이스라엘에 다섯 명의 왕이다. 남유다의 10대 왕인 아사랴와 북이스라엘 14대 왕인 예후 왕조의 마지막 왕 스가랴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남유다의 10대 왕 아사랴의 다른 이름은 웃시야이다. 13절부터는 아사랴를 웃시야로 언급하며, 본장에서 두 이름을 혼용하여 기록하였다. 참고로, 역대하 26장에서는 아사랴라는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웃시야로만 기록하고 있다.
웃시야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힘’이다. 아사랴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도우셨다’이다. 오늘 본문 1절은 아사랴가 왕이 될 때 북이스라엘 왕의 통치 연수를 밝힌다.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27년에 유다 왕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되었다.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13대 왕이다. 북이스라엘 초대 왕 여로보암과 동명이인이기에 후대 사람들은 여로보암 2세라고 구분하여 부르기도 했다. 여로보암 2세는 예후 왕조에 속한 왕이다. 정확히는 예후의 3대손이다.
아사랴가 남유다를 통치하게 된 시점이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의 통치 시점보다 27년 늦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사랴가 남유다를 통치하기 시작한 시점은 그의 나이 16세부터이며, 아버지와 공동으로 통치를 시작한 시점으로 보면 아사랴의 통치기간을 52년이다. 1절의 표현은 부왕 아마샤가 죽었던 해, 아사랴가 아버지 없이 단독으로 통치를 시작한 시점에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이 27년째 통치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보면 아마샤가 부친과 공동으로 통치한 기간까지 포함해서 52년의 통치한 것이다. 역대 사울과 다윗의 통치 기간보다 길다. 남유다를 통치한 20명의 왕들 중에 14대 왕 므낫세 다음으로 길다. 아마샤 어머니의 이름 여골리야의 뜻은 ‘여호와는 능력이 있다.’ 더하여 악명 높은 므낫세는 12세에 왕위에 올라 55년을 통치했다.
오늘 아사랴는 다른 왕들에 비해 비교적 선한 통치를 했다. “아사랴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3).” 즉 ‘행하였으나’ 하고 덧붙는 부정평가는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를 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아사랴 역시 그의 아버지의 전철을 밟은 까닭이다. 아사랴는 아버지 아마샤의 종교 정책과 동일선상에 있었다. 중앙 성소 중심의 신앙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당시 산당 제사가 북이스라엘의 관습이었다. 훗날 산당을 제거한 왕은 남유다의 13대 왕 히스기야이다. 곧 중앙 성소 제사가 정착된 때는 16대 왕 요시야 때이다. 오늘 본문은 그리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하고 그 뒤에 따른 산당 제사를 지적하고 있다. 아사랴의 통치에서 전반기는 나름 정직하였다가 후반기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그의 악행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가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왕궁을 다스리며 그 땅의 백성을 치리하였더라(5).”
결국 하나님께서 아사랴 왕을 치셨다. 그는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로 별궁에 거하였다. 역대하 26장에서 아사랴의 징벌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원인을 증거한다. 아사랴의 악행은 예전부터 내려온 산당 제사 허용만이 아니었다. 그는 교만함으로 제사를 직접 집례하려 했다. 그러다보니 아사랴는 통치 초기에는 아버지와 공동으로 통치하였고, 말년에는 아들 요담과 공동으로 통치하였다. 아들과 공동으로 통치한 기간은 약 10년이다. 그 기간을 아사랴는 나병환자로 별궁에 거했다. 그 기간 남유다의 실제 통치는 아들 요담이 한 셈이다.
이렇듯 남유다 왕 아사랴의 통치기간에 북이스라엘의 14대 왕이자 예후 왕조의 마지막 왕 스가랴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이러하다. “그의 조상들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9).” 그리하여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그를 반역하여 백성 앞에서 쳐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0).” 이렇게 북이스라엘 예후 왕조 마지막 왕인 스가랴는 6개월만 왕위에 있었다. 이렇게 짧은 통치 이유는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 자손이 사 대 동안 이스라엘 왕위에 있으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과연 그렇게 되니라(12).”
스가랴가 왕으로서 단명한 이유는 북이스라엘의 다른 왕들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언급된 여로보암은 스가랴의 아버지 여로보암 2세가 아닌 북이스라엘 초대왕 여로보암이다. 그의 대표적인 죄는 ‘송아지 우상 숭배’이다. 그러한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았다. 스가랴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불신앙의 유산을 답습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 스가랴는 반역자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불명예스럽게 죽었다. 반역은 보통 은밀한 장소에서 살해당하는 것이지만 스가랴가 그만큼 악행을 저질렀고, 이스라엘의 정세가 지극히 혼란스러웠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나마 예후가 왕이 되고 그의 후손이 왕으로서 4대까지 간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후가 아합을 죽이고 그의 자녀들을 죽이고, 바알에 속한 사람들을 심판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일이었다. 그러나 예후는 전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예후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19명의 왕들은 모두 전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예후가 통치하며 그나마 초기에 우상과 관련된 것을 제거하였기는 했어도 오래 지속된 것은 아니다. 북이스라엘은 왕조가 엎치락뒤치락하였는데, 그나마 9왕조 가운데 예후 왕조가 4대로 가장 오래 통치한 셈이다.
나머지 중 7왕조는 왕조라고 말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당대에나 1대손에서 그쳤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을 때’, 그들을 도우셔서 구원해 주셨다. 우상을 버리고 오직 창조주이시며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그들에게 무한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남유다도 북이스라엘도 깨닫기를 원하셨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사 2:22, 렘 17:7).”
하여 하나님은 끊임없이 돌아오라, 하고 부르시고 찾고 기다리신다.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호 11:7).” 그러나 제발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4).”
오늘도 이러한 본문을 읽으면서 마음이 어려운 것은 우리의 지긋지긋한 죄악 때문이다. 하여 바울은 그처럼 처절하게 절규한 것일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것은 우리의 죄성이 그러하여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그러므로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나 저들 왕조들의 반복되는 죄의 굴레에 대해 뭐라 하겠나?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
때로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구애가 눈물겹다. 우리의 죄성은 그만큼 집요하고 끈질기다. 그러하다 해도 이사야는 증거하기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55:7).” 그리하여 오늘 우리는 이에 따른 사명으로,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2).”
하고 선포해야 한다. 날마다 자신에게 먼저 말씀으로 선포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안에 죄성은 우리 안에서 교만의 고개를 든다. 그러므로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25:5).” 이와 같은 말씀으로 오늘의 본문을 새삼 슬픈 눈으로 보았다. 부디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호 14:1).” 하실 때에,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욜 2:12).”
혹시 오늘 아사랴가 초심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였다면, 그가 교만함에 빠져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제사 집례를 자기가 하겠다고 우기지 않았다면… 하는 식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이러한 심정으로 나는 오늘 다시 한 번 시편으로 돌아간다. 첫 장을 펼치며,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
결국은 말씀으로다. 이를 즐거워하고 주야 묵상할 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3).
나의 남은 날들을 주 앞에 내려놓고 예전의 나는 악인들과 다를 게 없었고, 주를 멀리하여 세상을 따라 살기를 바랐는데,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하시는 말씀 앞에서 감격한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나는 그러하였고, 그러므로 일찍이 죽어 마땅하였을 죄인인데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오늘 나로 주 앞에 세우셨음을 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