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왕하 16:10-1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시 2:1
악은 악으로 물든다. 열왕기서를 읽다보면 오히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놀란다. 어쩜 이렇게까지 죄가 죄로 이어지는데, 이를 참고 또 기다리시며 인자하심을 굽히지 않으실까? 우리의 그러한 죄악의 끝은 없는가? 하는데서 그럼에도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에 대해’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참고 또 사랑하시는 데서 놀란다.
오늘 본문은 “르말랴의 아들 베가 제십칠년에 유다의 왕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었다는 국면에서 시작한다(1). 아하스는 20세에 왕위에 올라 16년을 치리하였다. 그는 36세의 이른 나이에 죽었다. 이어 그의 후계자로 세움 받는 히스기야가 25세에 왕위에 올랐다고 하는데, 그럼 아하스가 열한 살 때에 히스기야(B. C. 728-687)를 낳았다는 소리다. “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요 스가리야의 딸이더라(18:2).”
히스기야가 14년 통치하고 있을 때인 주전 701년에 산헤드립이 유다를 쳐들어 왔다. 그렇게 되면 아하스는 주전 716년에 죽은 셈이 되고, 그때 나이가 40세가 된다. 당시 남자는 12, 13세에 여자가 10, 11세에 결혼하는 것이 흔하였다. 어쨌든 이와 같은 왕의 사적은 기록되었다.
솔로몬 후에 르호보암과 그의 아들 아비얌은 부정적으로 기록되었고(왕상 11:4, 15:3), 아사와 요시야는 다소 긍정적으로 기록되었다(15:11, 왕하 22:1-2). 이때마다 다윗의 행적에 비교되었다. 아마샤는 다윗과 같지 않았으나 나름은 상당 부분 칭찬을 받았다.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오직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14:3-4).”
그렇듯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며 저들의 행적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다. 이와 유사한 평을 받은 유다 왕은 여호람이다.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가서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왕하 8:18).” 오늘 본문에서도 아하스가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였다는 것은 그렇듯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왕들의 행적은 참으로 기가 막힌다.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대하 28:2-4).” 결국 ‘이스라엘 열왕의 길’은 ‘우상을 부어 만들고 이를 섬기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만 골라서 하는 셈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역대기에서 ‘부어 만들고’라는 표현을 첨가시킴으로 ‘그들이 숭배한 우상’이 바알이든지 아세라상이든지, 저들이 고안하였던 아론의 때에 만든 금송아지였든지 그 후에 이스라엘은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왕상 12:28).” 백성들을 현혹하였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0:29).”
그러니 보면 죄는 마치 지문 같아서 각자는 저마다의 죄성으로 사는 것 같다. “이제 너희가 또 다윗 자손의 손으로 다스리는 여호와의 나라를 대적하려 하는도다 너희는 큰 무리요 또 여로보암이 너희를 위하여 신으로 만든 금송아지들이 너희와 함께 있도다(대하 13:8).” 하시는 말씀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죄가 늘 반복적으로 곁에 있었다. 아하스가 아합과 아하시야와 같은 악한 행위를 했고, 베니게인들의 우상을 재도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산당들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3-4).”
이에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대 왕들 가운데서 이와 같이 이방 종교와 섞인 혼합주의를 범한 것이 아합이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왕상 16:30-33).”
그렇게 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하스도 하나님을 거역하여 이방의 우상 숭배를 혼합하는 죄를 범하였다. “아사가 여호와의 성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남은 은금을 모두 가져다가 그 신하의 손에 넘겨 다메섹에 거주하고 있는 아람의 왕 헤시온의 손자 다브림몬의 아들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왕하 16:18).”
오늘 날 우리 교회들을 위협하는 것도 이와 같은 혼합주의다.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섬기면서 다른 여타 종교와의 화합을 도모하며 저들의 ‘좋은 문화나 관습’을 따라 나름의 ‘성경적 허용’을 인위적으로 끌어다 해석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한둘이 아닌 듯하다. 이러한 사실로 미뤄볼 때 아하스가 행한 우상 숭배는 금송아지를 우상화한 것뿐만 아니라, 이방 종교를 영입하였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이전에도 그곳에 유행했던 풍습이다. 심지어 자기 아들을 산 채로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다. 아하스 왕이 이러한 길로 행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하스 역시 예루살렘에 세워진 제단 위에서 자기 자식을 희생 번제물로 바쳤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3).” 이것은 인신제사로 우상 숭배 행위에서 벌어지는 예식의 일부분이다. 당시의 풍조이기도 하였다. 성경은 이미 충분히 명령하셨다.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신 18:10-11).”
그러니 오늘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한다’는 표현은 이와 같은 우상 숭배의 인신 제사가 버젓이 성전에서 자행되었음을 알린다. 또한 이러한 인신 제사는 아하스 뿐만 아니라 므낫세 때도 거듭되었다. “또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일으켰으며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성전에 세웠더라둘지라(21:6).”
그러니 참 이와 같은 본문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다. 오늘은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에는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여러 종교의식들 가운데 로마 가톨릭에서 가져온 것이니 타 종교의 행위를 그대로 모방하는 것들도 여럿이다. 가령 성화나 벽화, 모형 등을 만들어서 이를 숭상하는 일에서부터 사실 크리스마스 때 트리를 세우는 것도 실은 이교도의 우상 숭배의 잔해물이다. 이때는 바벨론의 여왕의 아들 생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지키는 것이나, 많은 사람들이 로마인의 미트라 곧 태양신을 숭상하듯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님롯을 상징하기 위해 전나무를 꾸며 기념한 데서 유래하였다.
이렇듯 야자수는 바알타말이라는 이집트의 이교도 메시아를 상징하고, 전나무는 바알브릿이라는 이교도의 메시아를 상징한다. 태양의 신이며 중보의 신인 아도니스의 어머니를 나무로 바꾸어 그 나무의 상태에서 아기를 낳았다고 해서 이를 기념하기도 한다.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교회 강단에 푸른 나무들로 꾸미는 게 유행처럼 번지기도 하는데 실은 단지 보기 좋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강단의 푸른 나무는 ‘아세라’를 연상하게 하는 가증한 의미이다. 아세라는 목상으로 기둥이나 나무를 가져가다 제단에 심거나 두어서 기념하기도 하였다.
뭘 꼭 이렇게까지 의미를 두고 따지는가 할 테지만 비근한 예로 성탄절이면 교회에서도 찬미하지만 거리마다 온갖 트리와 장식들이 한데 어우러져 안 믿는 자들이 더 흥청망청하며 이 날을 기념한다. 또한 부활절 달걀을 삶아서 나눠 먹는 유래도 한 번쯤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마치 껍질을 깨고 나오듯 예수께서 탄생하셨다는 것인데, 달걀이 본래 사순절 금욕과 금식의 절제를 끝내면서 먹었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인식에 달걀을 생명의 기원으로 여겨 이를 나누며 새 생명의 의미를 되새겼다고 한다. 심지어 우주의 기원으로 단단하고 둥근 지구를 뜻하면서 이집트의 벽화에도 황금알을 그려서 영생을 염원하는 데서 유래한다.
이를 사소하다고 보기에는 오늘 본문에서 버젓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인신 제물로 자식을 불 위로 걷게 하는 식의 행위는 몰록의 인신 제사를 그대로 답습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버젓이 우상 숭배가 거행된 것이나 오늘 날 교회도 마치 상징처럼 트리를 세우고, 강단에 푸른 나무를 심고, 달걀을 나눠 먹고 하는 행위가 그저 전통이나 가벼운 의식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찾아보면 이러한 이교도적인 행위가 너무 많다. 분명히 말씀에서는,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신 12:2-3).”
이를 사소하게 여기거나 심지어는 너무 지나치게 예민한 것처럼 생각하고 ‘좋은 게 좋은’ 식으로 받아들인 결과가 오늘 본문의 우상 숭배와 다를 게 없다. 저들도 산당에 금송아지를 두고 저를 여호와 하나님이라 부르며 섬겼다. 아론은 몽매한 백성들에게 그리 선포하며 금 신상 앞에 절하게 하였다. 물론 백성들이 조급하게 굴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1).”
오늘 날도 성도들이 교회로 모여 나름의 어떤 확신과 증표를 구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2).” 하듯이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4).” 그렇게 예배 형식이나 방식도, 그 절차나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추어 시각적이고 보다 생동감 있게 하는 게 옳을까? 설마 그러한 형식이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이교도들 사이에서는 없었을까?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3-4).”
소심한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래서도 성탄절 트리나 그 날짜나 부활절 달걀 등 이벤트를 될 수 있으면 삼간다. 그때 오히려 성찬예식을 거행함으로 주님을 기념하려 한다. 이교도적인 우상 숭배와 우리의 예배 의식이 모르면 모를까, 저들의 의식을 답습하여 내려온 것이라면 삼가는 게 낫지 않겠나? “이는 그들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음이라(왕상 14:23).”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러한 의식과 의도적인 행위는 그 안에 미신적인 의미도 따라온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일체 몸에 문신을 하지 말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얼마나 되풀이하듯 ‘행음’하듯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며 신앙을 가지고 사는지,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렘 2:20).” 그러므로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배역한 이스라엘이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3:6).”
이렇게 고대 근동의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의 예배 대상인 우상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산에서 또한 산을 옮겨 모형으로라도 종교 의식을 거행했다. 오늘도 같지 않나? 또한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의식을 더욱 엄숙하고 신비하게 하려고 꾸미고 덧대어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도, 나는 교회 안의 다양한 조명들이 현대판 ‘무성한 나무 숲 아래서의 제사’ 같다. 결국은 좋은 의도에서였다고 하나 “그 때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아직 건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며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왕상 3:2-3).”
그러던 산당 제사가 성전이 있는데도 버젓이 더 성행하여, 더 나아가 “이는 그들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음이라(왕상 14:23).” 그러니 참 뭘 어찌 하라, 하지 마라, 하기가 어렵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는 진실한 증인으로 세우심을 받았다.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잠 14:25).” 모르면 모를까, 알면서도 이단 기업의 물건을 사용하는 것이나 요가를 단지 운동이라고 여기면서 같이 고개를 조아릴 필요가 있을까?
이에 오늘 시편이 일갈하시는 것 같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시 2:1-3).
서로가 좋으면 됐다는 식으로 누가 말하길, ‘부처님은 자비하고 예수님은 사랑하니 서로가 같다’고 하는 말에 뭐라 어찌 말해주어야 하는 것인지… 요가는 그저 운동일 뿐인데 뭘 그렇게까지 뭐라 하냐며 그래서 교회가 싫다는 어느 아이의 말이 가슴 아프게 남아있다. 과연 그러한가? 오늘 본문이 이를 되묻는 것 같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4-6).
분명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