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전봉석 2025. 6. 25. 17:16

 

유다의 아들은 에르와 오난과 셀라니 이 세 사람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이 유다에게 낳아 준 자요 유다의 맏아들 에르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셨고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유다에게 베레스와 세라를 낳아 주었으니 유다의 아들이 모두 다섯이더라

대상 2:3-4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 13:5

 

 

하나님은 약하고 천한 자로 위대한 일을 이루신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생겨나게 되는 야곱의 열두 아들과 그 후손을 소개하고 있다. 가나안 땅에서 일개 유랑 족속으로 그 숫자도 미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저들은 70인 정도에 불과했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출 1:5).”

 

게다가 도덕적으로도 흠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가령 야곱의 장자 르우벤은 아비의 후처였던 빌하와 간통하였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창 49:3-4).”

 

또한 나머지 형제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노예로 팔아버렸다. 그 야곱의 아들들 절반은 레아와 라헬의 몸종에게서 낳은 자식들이었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볼 때도 저들은 ‘콩가루 집안’으로 형제들의 족보도 뒤죽박죽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럼에도 저들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삼으셨다. 천하고 약하고 세속적인 자들인데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를 바울의 논조로 풀어본다면,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곧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의인으로 삼으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외쳤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8-9).” 즉 우리가 남다르고 잘난 게 있어서 믿음의 후손들이 된 게 아니다. 오히려 그럴 거면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삼으시는 게 더 나았다. 곧 하나님은 이와 같이 약한 자로 강하게, 가난한 자로 부하게, 악한 자로 선하게 삼으셨다.

 

이에 바울은 설교하기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그러므로 개인적으로도 고백할 때,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렇게 오늘 본문은 앞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모두 소개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아들은 이러하니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과 단과 요셉과 베냐민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더라(대상 2:1-2).” 이는 앞으로 저들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어서 ‘유다의 아들들’에 대해 언급한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 가운데서 ‘유다의 족보’를 먼저 소개하고 있다. 유다의 족보는 여기서부터 4장 23절까지 이어진다.

 

이와 같이 유다 지파의 족보에 치중하고 있는 까닭이 있다. 그것은 우선 이 글이 유다왕국의 유다 백성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유다 지파가 메시아의 출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마 1:1-16). 유다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유다의 세 아들, 에르와 오난과 셀라에 대해 창세기 38장을 근거하여 소개되고 있다. 에르는 유다의 장남으로 다말의 남편이었다. 저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셨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창 38:7).”

 

따라서 그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그의 아우 오난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여서 여호와께서 죽이셨다.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9-10).” 그런 가운데 셋째 셀라의 족보는 뒤에 역대상 4장(21-23절)에나 가서 소개된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첫째 아들 에르의 아내였던 다말이다.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인 유다로 말미암아 쌍둥이를 낳았다. 그 관계가 며느리로서 부정한 관계로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은 것인데,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창 38:26).” 즉 다말은 창기로 분장하고 유다에게 접근하여 잉태하였다. 이렇게 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으며, 베레스의 혈통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셨다. 이렇게 볼 때 유다 지파를 통하여 메시야가 나심은 유다 지파의 어떠한 의나 선에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와 선택과 은혜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시아버지와 불륜의 관계를 맺은 다말의 계대에서 뜻밖에도 예수님이 탄생하셨다. 곧 다말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마 1:3).”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이 죄인의 구주가 되기 위해 오셨음을 시사한다. 곧 죄인의 친구로 말이다. “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1:19).”

 

곧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와 허물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섭리로 구원 사역을 이루셨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천상의 모형인 에덴이 훼손될 것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곧 저들은 ‘그 땅의 흙으로 지음 받았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왜 앞서 그 땅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가운데 처했는지 알 수 없다. 앞서 하나님을 거역한 천사장이 사탄이 되어 이 땅의 권세 잡음으로 그리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까지도 감안하시고 그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저들이 생령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6-28).”

 

곧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을 다스리고 정복했어야 한다. 그러기위해 생육하고 번성했어야 한다. 어쨌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유다와 다말 그 둘의 관계를 계대로 하여서도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어떻게 유다가 다른 형제들에 비해 이와 같은 영광의 계보를 이을 수 있었은지는 알 수 없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마치 오늘의 나 같은 자가 어떻게 말씀을 전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그 자격과 기준을 나는 알 수 없는 것으로, 다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과 같다.

 

이에,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시 115:1).

 

하는 것은 우리 삶의 기본적인 찬송이 된다. 하여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계 7:9-12).”

 

하여,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최종적인 날에는 그리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하심과 같이 오늘 유다를 택하시고 저들로 예수님의 계대를 이어오게 하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누누이 밝히셨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6-7).” 그러니까 왜 택하시고 어째서 그렇듯 기뻐하셨는지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이 은혜를 입은 자로서는 뭐라 달리 설명이 어렵다.

 

오전에 일찍 아이와 줌으로 성경공부를 할 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아이는 이 구절에 대해 듣고 싶어 했고, 베드로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1).” 하고 먼저 자신을 ‘장로 된 자’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 ‘영광에 참여할 자’로 설명하고 있는 데 주목하였다.

 

여기에 답이 있다. 어떻게 우리가 그런 막중한 사명으로 특별한 자가 될 수 있었는지, 불가항력적인 주의 은혜가 아니면 답이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우리 곁의 모든 이들, 하나님의 양무리를 대할 때에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해야 하고, 자원함으로 해야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 이는 그렇게 값없이 받은 자로서의 마땅한 자세이다.

 

이를 감당하는 데 있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곧 이를 도치법으로 바꿔 보면 우리가 먼저 돌보심을 받았으므로 염려할 것 없이 주께 맡길 때 가능한 일이다. 그리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오늘의 나의 나 된 것이 증거가 되었다. 아이는 중학교 1학년 때 글방 선생으로서의 나를 만나서 이제 서른 살이 되어 어엿한 직장인으로서 목사가 된 나와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출근 전에 줌으로나마 멀리서 함께 말씀을 묵상한다. 아이에게 나는 그 자체로 증거가 된다. 나 같은 게 어찌, 하고 내가 백날 얘기하는 것보다 저 아이는 나의 허물도 약함도 모두 곁에서 보고 자랐다.

 

즉 오늘 본문으로 묵상함은 12명의 형제 가운데 유다가 왜 하필? 그 많은 경건한 사람들 중에 왜 하필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12지파를 이루면서 주의 특별한 사랑으로 선민이 되었는지? …. 이에 감읍하여 송구하고 민망한 마음이라면, 나 역시도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하신 말씀으로 고개를 숙인다. 그러므로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하시는 말씀 앞에서 아멘, 하게 된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값을 추구하며 돈벌이로 이 일을 수행할 수 있겠나? 그러므로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곧 오늘의 우리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이에,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13:1).

 

어렵고 힘들 때 또한 동시에 주 앞에 담대함으로 엎드린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2).

 

이러한 어려움을 주께 아니면 누구에게 토로할 수 있을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3-4).

 

그러나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