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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전봉석 2016. 11. 6. 06:55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이것이 너를 지켜 악한 여인에게, 이방 여인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잠언 6:23-24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편 63:1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어떻게 주를 앙모하는 마음이 저처럼 간절하여서 아름다울 수 있을까? 유다 광야에 쫓겨 있는 동안에 저로서는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하는 고백이 곧 힘이었고 의지였겠다. 양을 치기 위해 광야를 떠돌던 때도, 사울에게 쫓겨 혹은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광야로 내몰리던 시절에도, 숱한 전쟁의 현장에서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2).” 하는, 바로 그 자리가 성소였다. 이는 단지 마음의 위로를 더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3).” 내 생명보다 주의 인자하심이 더 낫다는 찬송의 자리다. 이는 욥이 마주하였던 아름다운 고백의 위치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내가 주를 신뢰합니다, 하는.

 

이러한 고백이 내 것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는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닐 거였다. 주어진 현실이 온통 고통뿐이라 해도, 정작 하나님은 선하심으로 그와 같은 고통을 허용하시는 까닭은 따로 있었다.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시 64:4).” 아! 고통의 참 의도는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손을 드는 것’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하신 말씀도 이에 응한다.

 

어디가 아프고 무엇 때문에 힘들어 마음에 낙심이 찾아올 때면, 감히 이와 같은 말씀을 묵상함으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구한다. ‘감히’라는 표현을 쓰는 까닭은 내게 두시는 괴로움이 저들의 것과 비교할 때 매우 무난하여서 말이다. 죄란 그런 것이어서 좋을 땐 어쩜 그렇게 모를 수 있을까? 기어이 힘에 부치고 절망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게 참혹하다. 것도 그러므로 주 앞에 순복하거나 기어이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까지 이르거나… 그 끝을 나는 알지 못한다. 결국은 누가 하나님의 자녀일지 끝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을지.

 

보면 다들 제 목소리를 내고 그 말에 겨워 고집을 꺾지 못하는 것 같다. 흔히 안 믿는다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지만, 믿는다고 하는 이의 행보가 자못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믿음이 거짓될 수 있는 것은 지복에 겨워 안주하려는 거짓된 자기신조가 판을 치기 때문이다. 불쑥 내 안에 이는 두려움도 혹여 이와 같은 믿음이 나의 의로 드러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왜 바울 사도는 날마다 죽었는지… 왜 저는 그래서 자신을 쳐 복종시켰는지… 그의 ‘경건한 두려움’이 사는 날 동안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에 오늘 잠언은 그 방법을 분명히 한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서로 사랑하라, 깨어 있어라,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는 말씀들과 같이 명령은 내가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 등불이 되어준다. 주의 말씀이 곧 법이 되어 먼 길을 밝히신다. 이에 고통은 훈계의 책망이 되어 생명의 길이다. “이것이 너를 지켜 악한 여인에게, 이방 여인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상대적으로 여인은 유혹에 넘어갔고 남자는 알면서도 이를 거절하지 못했다. ‘청함과 거절의 도’가 무너진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유혹은 밀어내기 어려운 ‘청함’이다. 누군가 무엇으로 청할 때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감정이 일어난다. 순식간에 ‘가지고 싶은 욕심’이 탐심이다. 정도에서 지나친 욕구가 욕심이다. 욕심은 욕망의 구체적인 마음이다. 주신 것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이다. 이를 못 참고 좇아 일어나는 행동이 욕망이다. 하나님을 못 기다리겠다는 것으로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해보겠다는 마음의 절정이다.

 

그래서 바울은 강조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탐심이 무서운 건 순식간에 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본즉’ 느닷없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전혀 새로운 가치와 기준이 생겨나는 것이다. 유혹은 거절할 수 없는 청함이다. ‘혀로 호리는 말’로서 이방 여인의 간드러지는 청함은 잔인할 정도로 매혹적이다. 매혹은 남의 마음을 호리는 사로잡음이다. 잠언에는 이를 엄히 경고하는 말씀이 많다.

 

한순간이다. 말 그대로 훅, 하고 간다.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이를 경계하는 것이 광야다. 다윗에게 숱한 광야가 없었다면 과연 다윗일 수 있었을까? 고통을 좋아라할 수는 없지만 달콤한 유혹의 덫을 피하는 데는 제격이다. 어디가 아프고 무엇 때문에 마음이 힘들다가도,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하는 이와 같은 고백이 나올 수 있는 자리가 여기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내가 간절히 주를 찾’을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새벽에 눈을 떠서 이처럼 말씀 앞에 앉을 수 있는 것도,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과연 무엇을 소원하며 살 것인가!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하는 이와 같은 고백이 드려질 수 있음으로 이미 복되었다.

 

낮에 아내가 나와 함께 로마서 3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성경공부를 하였다. 그러게. 믿지 않는 게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나? 그럴 수 없다. 오히려 이 땅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그 의미를 여러 차례 되새기고, 늦은 점심으로 국수를 먹었다. 그래도 아이가 오고 뒤미처 늙으신 장모가 왔다. 모시고 나가 곰탕을 한 그릇 대접하여 배웅하고 오는데, 족히 두 달째 시험 준비 때문에 오지 못하던 아이가 전화를 주었다. 1, 2차 필기시험을 모두 합격하여 면접만 남았다는 것이다. 이번 주일에는 오려고 했는데, 면접이 또 돌아오는 수요일이라 오지 못하게 됐다고…. 나는 이제 바보가 다 된 것인가. 아이와 통화를 하다 울먹거렸던 것은 반가움인지, 고마움인지, 다행스러운 것인지 알 수 없는 위로와 감사 때문이었다. 어떤 억눌렸던 감정이 쑥, 내려가는 듯한 시원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 새벽, 아이를 생각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데. 최종적으로 합격하기를 바라야 하는지, 떨어지기를 바라야 하는지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렇게 바라던 대로 한국은행에 취직을 하는 것이 나은 건지, 떨어져서 실의에 빠져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게 나은 건지. 어느 것이 더 아이의 믿음과 신앙을 지키는 데 나은 것인지 알 수 없어서 나의 기도는 주저한다. 이제는 무엇을 바라는 데 있어 어느 것이 유익인지, 그 기준이 주를 바라는 데 있었다. 물론 잘 되기를 바라고, 평안하기를 바라고, 그 꿈을 이루기를 바라지만 행여 그것으로 주를 거역하는 자리에 들지 않을까 하여….

 

“칼을 피한 자들이여 멈추지 말고 걸어가라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렘 51:50).”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말씀으로 대신한다. 이는 나를 향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믿는다는 건, ‘칼’의 중의적인 의미를 모두 내포한다. 우선은 내가 그토록 우선하던 것들이 칼에 의해 떨어져나가는 고통이 있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던 것이 이제는 고통이 되어 다가온다. 쉽게 접하고 누리고 즐기던 것들이 이젠 에이고 쓰려 감당이 안 된다. 우리 아이 가운데, 그래서 교회를 더는 다니지 않겠다고 했던 그 절규가 그래서다.

 

다른 의미는 궁극적으로 ‘칼의 멸망’을 피한 자로서의 복됨이다. 하나님은 그 자녀가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게 두느니 차라리 먼저 죽여서라도 구하신다. 곧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11:32).” 그리하여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그러니까 살리시기 위해 죽이시는 주의 사랑을 어떻게 말로다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알 수 없어 더더욱 주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구한다. 아이를 두고 바라는 마음은 그러므로 주를 떠나는 자리에 들지 않기를. 합격을 하든 떨어지든, 그것으로 주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에 함께 할 수 있기를. 부디 나는 바라고 구할 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는 주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수밖에. 칼을 피한 자들로서 멈추지 말고 걸어갈 수 있기를. 행여 곁길로 들지 않고, 먼 길을 돌지 않음으로 주께서 귀히 쓰시는 자로 일찍이 사무엘과 같이 묵묵히 제 길을 갔으면. 내 아이를 두고 생각함으로 기도하는 제목도 그것이다.

 

전에는 그저 승승장구하기를 바랐다면 이제는 모든 게 주를 향하는 길이었으면, 하고 구한다. 말씀은 결코 헛되지 않고, 그 말씀을 아이의 마음에 두셨다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확신한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0-11).”

 

어지러운 세상에서 부디 갈 길을 잃지 않게 하시기를.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시 63:7).” 이로써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8-10).” 결국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11).”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