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전봉석 2018. 8. 26. 07:23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로새서 4:2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편 114:7-8

 

 

앞서 걱정을 일삼는 일은 불안장애의 가장 흔한 증거다. 예기불안이라 하여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온 신경이 집중되는 것이다. 알면서도 그런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도 어디를 향해 가다 막히는 길에서 겁을 먹고 돌아서왔다. 예전에 자주 가던 마트에 들러 장을 보다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순간 두려움에 휩싸여 도망치듯 돌아왔다. 이번에 기도 제목은 자동차를 가지고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막연하지만 그럴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한다.

 

찾아가고 만났으면 하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그러게 그러니까 여의치가 않아서 말이다. 가령 동기 목사가 암 투병을 하고 있는 데 문병을 좀 갔으면 하고, 또 누가 이사를 하여 심방을 와주었으면 할 때. 남들은 그냥 하면 될 일이 내겐 왜 이처럼 어려운지 모르겠다. 중3 아이가 와서 글을 쓰고 갔다. 가족들은 모두 부산으로 여행을 갔다는데, 의기소침한 아이를 어찌 위로할까. 성경공부를 오는 스물두 살 아이를 데리고 여기 가까운 낚시에라도 다녀왔으면 하고. 마음은 종종 그러해서, 주께 아뢰고는 한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계속하는 일과 깨어 있으라는 표현이 서로 보완한다. 이에 힘이 되는 것이 감사다. 감사함으로 깨어 있을 수 있고 깨어 있음으로 계속할 수 있다. 다음 주엔 조금 더 멀리 가보자고 아내는 넌지시 아쉬움을 그리 돌려서 말했다. 특히 아무렇지도 않다가 마트에서 노랗게 질려 도망치듯 빠져나올 때는 왜 그러는가, 나에게도 설명이 어려운 일이어서. 한데 기도하기를 어디를, 누구를, 왜, 주의 일에 쓰임 받기를 바란다고 하니.

 

더위가 급격히 물러나면서 사람을 좀 당황스럽게 하는 것 같다. 하루 사이에 춥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걸 보면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는 일이지 않겠나? 이래저래 사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꼭 필요한 것이라 하나 그러자니 그 값이 무거울 따름이다. 혼자 들어앉아 있을 때는 그것조차 개의치 않는 듯 독야청청하였는데, 조금만 움직이고 어딜 좀 나다니려고 하면 그게 다 값을 물어야 하는 일이어서. 비운다고 비우는데도 품을 팔아야 산다. 마트에서 쉴 새 없이 상품을 권하고 설명을 되뇌는 사람들을 보다 눈물겨웠다.

 

허겁지겁 도망치듯 빠져나와서 딸애를 만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는 동안 살기 위해 살아서 억척스러워야 하는 현실에 대해 잠깐 생각하였다. 장바구니를 만들고 서둘고 있을 때 한 나이든 중년의 여자가 다가와 그 마트와 연계된 카드를 권하는 것이었다. 그 권유가 얼마나 끈덕지던지 아내는 민망해서도 가던 길을 멈추고 설명을 들어주는데 나는 더욱 애가 타고 조바심이 났던 거라. 두 번 세 번을 사양하고 돌아서서 잠깐 뜸을 들이면 또다시 다가와 했던 말을 되풀이 하는 거였다. 그때는 그 일이 귀찮기만 하였는데.

 

구원을 이루어가는 데 있어 나는 얼마나 안이한가. 중3 아이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혼자 집에 있으니 주일 날 와서 같이 예배드리고 점심 먹자는 말을 무심히 던지고 말았던 일이 생각났다. 오든 말든. 그러든 말든. 아무런 간절함도 없이, 더는 상관도 없다는 태도로 그리하였던 것이다. 마트에서 상품을 권하던 이들의 태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세라. 시식하는 만두를 권하고 덤으로 몇 개를 더 얹어 기어이 장바구니에 담아내게 하던. 쭈뼛거리고 떡집에 서 있자 얼른 다가와 더는 피해갈 수 없게 하던 떡집에서나.

 

문득 이 아침 나의 안이함에 대하여 뒤돌아보게 하신다.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시 114:7-8).” 되도 않을 것 같은 일을 결국은 이루어내시는 이가 하나님이시었다.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돌을 쳐 못물이 되고,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시는 이 앞에 나는 과연 얼마나 더 주저하며 서 있어야 하는 것일까? 전부터 동기 전도사 내외가 안산으로 집을 옮긴 뒤 초대하여 예배를 드렸으면 하였던 생각도 난다.

 

물론 열심을 다한다고 해서 이뤄질 일은 아니겠으나 주어진 데 따른 막힘은 없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은 든다. 기도로써 기도를 부탁하는 일이어서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골 4:3).” 어쩌면 요즘 들어 내 안에 종종 드는 마음이었다.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4).” 그러니 원래 심리적인 요인은 또 심리적인 조바심으로 더욱 깊어질 따름이다.

 

입을 빼물고 시무룩하다가도 또한 그리 두시는 가운데서 아이들을 대하고 맡기신 날을 완주하는 것이었으니, 오늘은 이만큼 나와 본 것도 큰 일 했네! 하는 아내의 우스갯소리가 그저 웃자고 하는 말만은 아닌 거였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믿는다는 일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어서, 산다는 데 따른 그 값이 그만큼 무거운데 하물며 구원을 이루어가는 일에서도 그렇지 아니하겠나?

 

내 입의 고백이 삶의 실천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엄연한 고통이 따르는 일이었다. 저들은 또 내가 지나가고 난 뒤 수많은 사람들에게 또 같은 말을 되풀이 하고 또 같은 설명을 하며 친절을 다하지 않겠나? 그냥 그러려니 하는 인식으로 그칠 문제는 분명 아니었겠다.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5).” 오늘 골로새서에서 말씀은 이를 일깨운다. 세월을 아끼라. 어느새 중년을 지나 노년의 시간으로 성큼성큼 내딛고 있는 세월에서, 외인에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라는 말씀이 무겁게 다가온다.

 

아닌 건 아닌 거고 긴 건 긴 거고, 쓸데없는 데서 질척거릴 시간이 없다. 문득 들려지는 말씀이 공연한 데 마음 두고 씨름할 일도 아니지만, 더욱 마음을 기울여 했던 말을 수 골백번을 더한다 해도 거듭 또 해야 하는 일도 있는 것이다. 그런다 해도 아이는 꿈쩍도 않을 것 같으면 어느새 나의 마음을 돌이키실 테고, 나로 하여금 또 기도하게 하시는 일도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나의 그릇된 바람을 바로잡게 하려 하시는 게 아니겠나.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

 

그래도 얼마나 감사한지. 토요일 수업을 일부러 10시로 당겨 좀 더 부지런하게 하려는 것인데 아이는 정확하게 그 시간을 맞추었다. 것도 새벽 세 시에 글을 올려서 못 오거나 아주 늦거나 할 거라 짐작하고 있었는데, 나의 판단과는 달리 아이가 변하고 있었다. 교회로 권하고 예배를 원하지만 번번이 사양하는 아이에게 싫증도 날만한데 그럼에도 또 마음을 다하게 하시는 일이라 어쩌겠나? 결국 손님이 발길을 멈추고 저의 설명을 듣고 물건을 장바구니에 옮겨 담기까지 저이들의 수고가 내게는 큰 교훈이 되는 날이었다.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욥 29:2).” 조금은 담대하게 어디 심방도 가고, 특히 우리 어린성도들을 데리고 수련회도 갈 수 있다면. 한참 필요할 나이에 같이 움직일 수 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기는 할 터인데. 혼자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그저 헛된 것일까? 예전에 다니던 은광원 같은 델 아이들을 데이고 같이 또 봉사를 다닐 수 있다면,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어울려 같이 놀 수 있다면, 우리 아이들에게도 큰 역할이 되기는 할 텐데.

 

그저 혼자 생각처럼 주께 아뢴다. 자신도 없고 심지어 어떤 두려움이 앞서는 일이어서, 그러나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필요하다면 주가 하게 하실 것이다. 저는 반석에서 못물을 내시고 차돌로 샘물을 만드시는 이시다. 그러므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6).” 주 앞에 기도와 용기로 꿈꾼다. 이내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시 114:3-4).”

 

주가 이루실 일에 대하여 나는 조바심도 내고 조급함으로 몸살을 앓기도 하면서 그렇듯 다음엔 좀 더 멀리까지 갈 수 있을 거야, 하는 아내의 귀띔처럼 이미 내 앞에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5-6).” 하나님을 경외함이란 주 앞에 불가능한 일을 들어 사용하시는 일이었으니.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7).” 곧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