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창세기 26:25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시편 63:3-4
사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찮다. 누구나 그 사연이 구구하다. 같은 실수가 반복되고 그 근원에는 두려움이 있다. 인생에 흉년이 들면 우리는 살 궁리를 위해 같은 허물을 되풀이하는 것 같다.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창 26:6-7).”
누구만이 그런 게 아니라 저마다가 다 그런가보다. 이를 통해서도 다져지는 신앙이었으니,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셨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우리는 여전히 같은데 이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오늘 말씀은 제시하고 있다.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창 26:25).” 말씀하시는 곳에, 제단을 쌓는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 거기서 산다. 우물을 판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건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이기 때문이다. 고로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시 63:3-4).” 그래서 주의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일보다 낫다. 내가 죽는다 해도 주를 찬양할 것이다. 남은 평생에 주를 송축하고 주의 이름으로 손을 든다. 영광을 올리는 것이다. 말씀이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게 신비롭다.
아이는 일기를 쓰고 나는 전날에 초안을 가졌던 설교 원고를 다듬었다. 다시 읽으면 전에 읽었던 의미와 다른 울림이 전해졌다. 몇 번의 새로움이 그때마다 있다. 처음 본문을 정하여 관련 성구를 찾을 때, 이를 풀어가며 그 의미를 정리하듯 초안을 작성할 때, 설교 원고를 고르고 다질 때, 설교할 때, 끝났을 때, 이처럼 혼자 되새기며 그 의미를 묵상할 때, 각각은 같은 의미이면서 전혀 다른 시각으로 이끄신다. 주도하심이 주께 있다는 데 놀란다. 목사로 사는 가장 귀한 즐거움인 것 같다.
가령 서원하는 일에 대해서도 의미가 또렷해졌다. 이를 하나님 앞에서 은혜 가운데 말로써 드려지는 기도이면 서원이지만, 사람에게 보이려고 저들의 확신을 더하려고 하는 말로써의 것이면 맹세이다. 주님은 이를 구분하셨다. 이를 야고보는 이렇게 정리하였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약 5:12).”
서원은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절박함이다. 각오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날마다 하는 기도의 기틀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용서해주세요. 했던 것을 우린 또 번번이 이루지 못한다. 못했으니 더는 구하면 안 될까? 나는 어제 설교 원고를 작성하다 우리의 ‘은혜의 고백’이 서원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혜 받은 자는 주께 드려지기를 바라고 이를 약속드리는데, 또한 불완전한 사람이라 돌아서면 번복하기 일쑤다. 언제 그랬냐는 듯 또 같은 실수와 허물을 범한다.
그때마다 주께서 막으시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서원한 것을 갚으려고 하는 그 중심을 주께서 받으신다. 서원함으로 그 중심에 더욱 더 하나님을 모실 수 있다면, 한나처럼 그 서원은 값지고 소중할 따름이다. 그 속을 아무도 모른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삼상 1:13).” 누구에게 들려주는 약속이 아니다. 주 앞에 드려지는 다짐인 것이다.
그러할 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18).” 이는 단지 엘리 제사장을 보고 한 게 아니라 저를 세우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서원은 은혜를 바라는 마음의 정도로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데 기여한다. 이는 우리가 실행하기를 유의할 문제이다.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신 23:23).” 그런 거 보면 우리의 모든 기도가 서원이지 않겠나?
어떻게 살게 해주세요, 하면서 무엇 무엇을 안 하겠습니다, 할 때의 각오와 다짐은 필연적일 테니까 말이다. 물론 이를 가벼이 여기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릇된 서원을 방지할 수 있다. 이를 내세워 남에게 들리는 일은 과하다. 하나님과 나의 내밀한 고백이 된다. 또 못하고 이루지 못할 게 빤하다고 해서 이와 같은 고백을 꺼리거나 해서는 안 될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만큼 더 신중하고 진실해야 하는 게 서원인 것이다.
혼자 이 같은 생각을 여러 번 하였다. 퇴고를 하면서 문득 어느 지점에서 나의 인생은 굽이마다 주 앞에 서원을 하였던 게 생각났다. 어릴 때, 세례를 받으면서도 뭘 안다고 그처럼 간절하게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던 것일까? 대학 시험을 치를 때,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떤 다급한 심경으로 주께 드렸던 서원의 대부분은 주의 뜻을 잘 따르겠다는 거였다. 그런데 그때마다 나는 번복하였고, 그 세월은 얼추 십년씩 훅훅 지나간 것이었다.
이제 더는 서원을 하고 말고가 아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다윗에 유다 광야에서 드려지는 서원이었다. 그리고 어땠는지, 잘 지켰는지 못 지켰는지의 의미가 아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2).” 그러므로 나 역시 오늘의 나로 두신 곳에서 제단을 쌓는다.
비로소 아는 것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3).” 아무리 어떠니 해도 주를 사모함으로 사는 게 가장 귀한 복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게 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보다 낫다. 성전에 있는 게 성전 밖에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4).”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를 상기시킨다.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창 26:25).” 주께서 두신 곳에서 제단을 쌓는다. 그 곳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산다. 장막을 쳤다. 그리고 거기에서 일상을 산다. 더는 곁길로 가지 않겠다는, 주를 중심에 모시고 살겠다는 우리의 결연함이 날마다 드려지는 우리의 서원이지 않을까? 이는 갚았는지 못 갚았는지, 이루고 못 이루고의 문제가 아니다. 즉 그 값, 속죄제의 제물로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신, 우리는 은혜의 사람들이다. 은혜의 말로 우리가 올려드릴 수 있는 게 날마다 서원밖에 없다.
그래서 나의 유치한 기도 가운데 하나가, 이처럼 아침에 묵상을 글로 써서 기록한 것만큼만 살게 하소서. 이 다짐과 각오를 잃지 않고 이 정도만이라도 살게 하소서. 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묵상이다. 왜냐하면 단 그 하루 중에서도 이를 온전히 갚을 길 없어 다시 또 서원이다. 우스갯말처럼 ‘작심 삼 일’이면 삼 일마다 작심을 하면 될 일이다. 나는 그 정도밖에 못 되어서도 서원이 끊이지 않는다. 곧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시 141:2).”
이는 곧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63:3-4).” 하는 오늘 아침 말씀과도 이어진다. 서원은 단지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능멸의 언어가 아니다. 그럼에도 다시 또 주 앞에 그리 되뇔 수밖에 없는 것이 그야말로 은혜의 언어이다. 사람을 현혹시키기 위한 게 아니라면, 나는 늘 주 앞에 어린아이가 되어 약속하고 다짐하고 그러면서 또 어기고 넘어지면서 용서를 빌고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하면서 자라가는 것이다.
이는 곧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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