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전봉석 2019. 6. 22. 07:27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사사기 11:34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시편 107:42-43

 

 

가끔 CCM을 귀에 꼽고 걷다보면 섬뜩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을, ‘나를 보내시라는 둥 나를 세상에 내어주겠다는 둥 뜯기고 찢겨 먹이가 되겠다는 둥 무슨 제목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내용이 감미로운 멜로디에 포장되어 아무 생각 없이 좋다고 여긴다. 나는 종종 주기도를 외울 때도 선뜻 고백하기가 쉽지 않다. 누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사하여 주옵시고할 때의 무게감은 두렵기까지 하다. 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할 때의 주기도는 나의 헛된 바람과 소망을 일거에 죽인다. 그러니까 <나의 나라와 나의 권세와 나의 영광>이 전복되는 것이다. 함부로 뇌까릴 찬양이나 기도는 없다!

 

성경은 그래서 기도는 성령 안에서만 할 것을 주의 주신다. 이를 위해 깨어 있어야 하는 것과 항상 힘써야 할 일은 물론이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6:18).” 오늘 본문은 그 이야기가 보다 직접적으로 서술된 대목이다. 입다가 서원을 했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11:30).” 다급하니 하는 소리였겠으나,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31).” 그런데 결국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올 때,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34).”

 

나는 전날에 선생의 제안으로 어려운 마음에 있기보다 정중히 거절의 내용을 담아 카톡을 보냈다. 뭘 그리 정색을 하고 답을 하나싶었지만 그냥 지나가는 말로 듣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그러려니 나 몰라라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뭐라 한들. 나야말로 지나가는 말처럼 내 것에 대해 나의 소유권을 모두 양도함으로 홀가분하였다. 일찍이 시신, 장기 기증을 하여서 행여나 죽음 뒤에 누가 나에 대해 아무 것도 기념하지 않기를. 그저 나는 지금의 나의 남은 생이 이 한 영혼으로벅차고, ‘이 한 몸으로기력을 다하는 것이면 되었다. 돈벌이나 밥벌이를 위해 살아야 하는 시달림에서 놓여난 것으로 족하다. 그러니 내 할 일은 이처럼 말씀 묵상과 한 주일 설교 원고 하나 작성하는 것으로도 다른 글을 쓸 여력이 안 되는 것이다. 솔직히 여느 책도 읽지 못한다.

 

뭘 하든, 그러자면 기력을 다해야 하는데 그러느라 발품, 말품을 팔아 애쓰고 수고해야 하는 일에 대하여, 나는 포기하였다. 안 그러고 싶었다. 이런 소리를 어찌 전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썼다 지웠다를 여러 번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선생의 말 중에 본인은 죽음을 앞두면 사라질 거야! 하는 소리에 기겁을 했다. 여전히 낭만을 꿈꾸시는가. 그때 되면 그리 되는 건 없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몸이 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다. 엄청난 준거다. 괜한 오늘은 없다. 암 선고를 받고 고상하게 죽겠다던 누구의 각오가 금세 무색해졌던 일처럼, 사람은 신뢰할 수 없다. 자신을 믿는 것보다 어리석은 사람도 없다.

 

하긴 귀가 가려운 세상이다. 듣기는 들어도 들을 귀 없는 세대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예전에도 그랬고 오늘 날도 그렇다. 그런데도 서로 괜찮다며 죄를 병으로 진단하고 죄악을 장애로 취급하면서 좋아질 거라 말한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8:11).” 아닌 건 아닌 거다. 산림청에서 주체한 무슨 글짓기 대회가 있다. 상금이 엄청나다. 누군 자꾸 써보라고, 그러자니 그 일에 팔려야 할 발품과 말품이 장난 아니다. 핑계 같고 변명 같아도 그래서 나는 선생의 제안도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느라 드는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

 

말씀을 일반화시키면 자신은 남는 게 없다. 내가 선생의 논리에 더는 수긍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친구가 나를 멀리하고 더는 말을 섞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다. 더는 서 있는 자리가 다른 것이다. 이쪽과 저쪽은 엄연한 차이다. 옳고 그름을 내가 논할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더욱 말씀 곁에 서길 원한다. 그러자면 친구도 선생도 더는 가까이 할 수 없다. 저들이 서운하게 들을지 모르겠으나 실은 사람과 사람 사이란 그리 대단한 게 없었다. 누가 말하길 당신은 사회성이 결여되어 그렇다고 하면, 나는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 2:10).” 분명 우리 곁에는 미혹하는 역사가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1-12).”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과 어울리고 싶다. 저를 사랑한다. 죽으나 사나 말씀으로만 답이 있다. 무서운 일이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3-6).” 괴로운 말이지만 나의 선생과 친구가 그렇듯 주의 강림의 약속을 조롱한다. 그러는 것을 편협하고 어리석은 광신도의 발작으로 취급한다.

 

나는 목사이지만 저들과 변론할 여력이 없다. 듣지 않고 자기들도 다 안다고 여긴다. 평강을 말하지만, 죽음을 앞두면 사라질 것이라니! 그것까지도 자신이 자신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소린데. 내내 되새길수록 마음이 아팠다. 새벽에 잠을 설치고 말똥말똥 천장을 보고 누워 선생과 친구를 생각하며 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저들을 어쩌면 좋을까? 내가 좋아하고 사랑한 만큼 마음이 어렵고 괴로웠다. “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침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뿐이로다(8:15).” 친구는 모든 근심이 돈이다. 돈으로 인해 울고 웃기를 어쩌면 평생을 그러고 산다. 기어이 속상해서 도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고 하니. 뭐라 내가 말로는 당해낼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검을 바란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10:34).” 감히 나는 저들의 하는 일이, 건강이, 사업이 잘 되기를 기도할 수 없다. 차라리 망하고 병들고 고통 중에 주를 찾기를 바란다. 끔찍한 소리다. 그만큼 안타까운 것이다.

 

예전의 나도 다를 게 없었다는 데서 이제 치를 떤다. 죽어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다시 어울릴 수 없다. 저들과 주를 조롱하는 자리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싶지 않다. 눈물의 근원은 엄연한 것이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9:1).” 예레미야 선지자의 애통한 심정을 알겠다. 왜 주님이 검을 주실 수밖에 없는지, 그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저들과 말하다보면 나도 아프다. “그들의 혀는 죽이는 화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해를 꾸미는도다(8).” 세상이 그런 거였다. 죄란 그런 것이고 이는 근본적인 문제이지 자신의 각오나 다짐으로 맺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입다의 서원을 나는 단지 경솔하였다고 보지 않는다. 우리 안에 뿌리 깊은 교만이었다. 그 근원은 아담에게서 뻗어 나왔다. 하나님 같이 될 줄 안다.

 

더는 저기 안 있고 여기에 있는 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여전히 거기에 있는 나의 사랑하는 친구와 선생을 생각하며 애통하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나는 기도의 부채를 안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8).” 나도 다를 바 없었으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9).” 부디 회개와 용서의 영을 부어주시기를.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10).” 모처럼 몸이 아프지 않고 좋은 날이었는데 마음이 어려웠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107:19-20).” 나의 기도가 주의 바람이신 것을. 고로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