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사사기 14:4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귀가 가려운 세대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농담처럼 점괘를 보고 버젓이 이를 방송에서도 오락처럼 즐긴다. 영혼이 피폐하여 사는 날이 고달파서 그런다. “이 악한 민족의 남아 있는 자, 무릇 내게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8:3).” 교회 같은 층에 타로점술학원이 생겼다. 나란히 미용학원이 있고 실용음악학원이 있다. 저녁이면 나이어린 학생들이 와글와글한다. 공부는 하기 싫고 흥미로운 돈벌이를 위한 직업을 꿈으로 삼았다. 우리 중2 여자아이도 미용학원을 다니기 위해 그 부모와 다투는 중이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하는 말씀 앞에서 나는 두렵다. 훗날 어디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이를 마음에 새겨 두려울 줄 아는 게 복이겠다. 애고 어른이고 사는 게 다들 척박하여 소비되는 생으로 즐길 따름이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49).” 여실히 그때를 엿볼 수 있다. 등굣길에 아이를 마주쳤다. 고등학교에 올라간 아이는 분명히 나를 봤을 텐데 멀리 돌아서 지나갔다. 꿈이 뭐니? 하고 물었을 때 짜증을 내던 아이가 생각났다. 그래도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다행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었던 때가 있었다. 주일에도 두 번 나왔었는데. 지나간 시간이면서 아련하여 마음이 쓰였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 2:11-12).”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데는 별 수 없는 노릇인가. 그러면서 손금을 보고 찻잔으로 점술을 읊고 카드로 운세를 따져 혹시나 하고 귀를 기울이는 꼴이라니. 베너까지 세워 궁금한 걸 물어보는데 5천원, 운세를 알려주는데 5만원. 수강생모집. 나는 그 앞에서 주춤하였다. 하긴 옆 사무실 사장도 하도 일이 안 풀려서 장난삼아 5만원 내고 운세를 봤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미혹의 역사’ 앞에 당해낼 재간이 없다. 뭐라 하면 정색을 하여 민망해진다. 저들은 급히도 따라간다. “에워싸인 가운데에 앉은 자여 네 짐 꾸러미를 이 땅에서 꾸리라(렘 10:17).” 성경은 경고하였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땅에 사는 자를 이번에는 내던질 것이라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하셨느니라(18).” 곧 저마다 주어지는 징계는 저들의 죄를 찾으려는 게 아니라 온전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를 개를 훈련하여 순하게 하는 방식이 아니다. 괴로움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게 우리 의지다. 참여가 필요하다. 그러려니 하고 웃어주면 좋다고 하는데 조금만 정색을 하면 금세 멀리한다. 감정이 상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아이들도 그렇다. 고등학교에 올라간 아이는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세계에 산다. 인사는커녕 외면하고 모르는 사이로 둔갑했다. 자신이 들려주었던 자기 이야기가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가. 그럴 것이라 주의를 주었는데 별 소용이 없었던가보다.
하긴 참 희한한 게 글방이면 쉬운데 교회는 싫다. 선생일 땐 편한데 목사로는 어렵다. 하나님이 싫은 것이다. 선을 원하지 않는다. ‘이 땅에 사는 자를 이번에는 내던질 것이라.’ 하는 말씀 앞에서 나는 마음이 무겁다. 공연히 아이에게 본이 되지 못하여 나 때문인가, 하는 죄의식도 있다. 말씀을 증거하는 일보다 말씀으로 사는 것이 더 어렵다. 성경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보다 되새겨 삶으로 나타내는 일이 어렵다. 때론 순종이 제일 쉽다. 믿음이 제일 쉬운 것이다. 그런데 말씀대로 사는 순종이 어려운 까닭은 복종이 안 되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나 내 가치가 나를 찌른다. 한 발 내딛는 게 안 된다. 요단강이 마르기를 바라며, 주춤거리는 시간 속에서 괴로워한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순종이 가장 쉽다. 하필 그럴 때가 제일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해 보인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수 3:15).”
그럼에도 덥석, 한 발을 내딛고 보는 게 순종이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17).” 늘 같은 맥락의 삶인 것 같다. 내 맘 같지 않다. 저마다 자기 고집이 있고 자기 생각이 있다. 난들 다르지 않다. 그러니 어쩐다? 별 수 있나? 깨질 때까지 괴로움 중에 살아야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 나는 누구 이야기를 하다 내 이야기가 되어 주의 긍휼하심 앞에 아뢴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은 악한 음모를 꾸미더니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려느냐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그 때에 네가 기뻐하겠느냐(렘 11:15).”
다만 주의 인도하심을 구할 따름이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10:23).” 자꾸 누구 이야기로 소진할 거 없다. 저마다 자기 이야기로 주를 맞이한다. 이내 우리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는 아침에 아이가 나를 모른 체하고 일부러 멀리 돌아서 가버리는 모습을 보며 서글펐다. 미안하고 송구하다가 속상하였다. 말도 안 되는 나의 이야기지만 나는 주의 음성에 귀 기울인다. 그러면 하나님은 전우주적으로 나를 도우신다. 시간과 공간과 우연과 필연을 동원하신다. 그러므로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1-12).”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거룩함을 경멸할 때 보응은 따른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은 악한 음모를 꾸미더니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려느냐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그 때에 네가 기뻐하겠느냐(렘 11:15).” 오직 주만 바라자. 말씀만 붙들자. 사람보지 말자. 기대도 하지 말자. 내가 나도 신뢰할 수 없는데 하물며 누굴 믿으랴. “여호와께서는 그의 이름을 일컬어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16).” 본질적으로 악한 것에 대하여, 설득하고 꾸짖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결국은 살아서 사는 동안 괴로움으로 일깨우시는 일이었으니,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셨느니라(17).” 재앙은 온전케 하시기 위한 것이다. 죗값이 아니다.
나로 말씀 앞에 두심이 은혜이다. “내가 그들을 뽑아 낸 후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각 사람을 그들의 기업으로, 각 사람을 그 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12:15).” 주의 긍휼하심의 하나가 재앙이다. 징계다. 우리로 이 땅과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죽여서라도 살리시겠다는 소리다. 하나님의 작정이다. 나는 하나님의 소유일 때 가장 복되다. “내 소유가 내게 대하여는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매들이 그것을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렘 12:9).” 결국 하나님을 떠나서는 세상의 먹잇감일 뿐이다. 종종 나는 누구에게 정색을 하고 무슨 말을 하려다가 주춤한다. 그래봐야 소용없는 일에 서로 감정만 상해 이내 다른 세계를 살게 될게 빤한데.
신기하지? 하나님은 멀리 있으면 뜨겁고 가까이 있으면 보호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슥 2:5).” 그래, 나나 잘 하자. 누구 탓하고 뭐라 할 거 없이 나 하나 바로 건사하며 살자. 주 앞에 온전하기를. 더는 쓸 수 없게 된 띠에 대해서는 미련을 두지 말자.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가져오니 띠가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었더라(렘 13:7).” 곧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13:10).” 그런 세상에서 나 하나 바로 세워 주의 말씀 앞에 두는 일이 큰일이다. 누가 어떠니 할 것 없다. 들을 귀도 주셔야 할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은 없다. 저들이 택한 것이다. 우리의 교만이 우리를 썩게 한다.
그러니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확언하셨느니라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신 26:18-19).” 이를 붙드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렘 13:17).” 그리하여 나는 애통함으로 위로를 받는 일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불의한 것 같으나 그 중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숨겨져 있다. 오늘 말씀은 이를 돌아보게 하신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삿 14:4).” 주가 이루실 것이다. 삼손의 막돼먹은 행실로도 하나님은 선하심을 드러내신다. 오늘 시인은 이를 신뢰하며 주를 찬양한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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