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전봉석 2021. 4. 7. 06:09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도행전 9:20-2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편 15:1

 

 

‘즉시로’ 다른 사람으로 산다. 주저하거나 생각해보고 실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처음과 끝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중간이 있다면 헛된 우리의 여러 쓸데없는 시도들이다. 나름의 중간기는 스스로들 짊어지고 헛되이 봉하는 자기주장과 고집일 뿐이다. 즉시로 사울의 때는 사라지고 바울이 되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전하였다. 그렇듯 주의 장막에 머물 자가 누구인가? 갑론을박하고 여러 생각으로 신중하지 않다. 다만 저는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한다.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한다(시 15:2-3). 또한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한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다. 시편에서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하고 주 앞에 확신한다(4-5). 연관 지어서 보면 실제적인 ‘즉시’로 사는 사람이다.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그 이상의 일에 대하여는 주께서 시작하셨고 주께서 끝내신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주저하심이 없다. 누구와 의논하고 선회하지도 않으셨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다. 지난날이 어떠했든지 이제 우리는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로 사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주를 어찌 보일까? 요한은 일러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생명은 볼 수 없다. 빛은 모든 것을 밝힌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매우 선명하고 구체적인 일이지 막연하고 추상적인 관념의 일이 아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에는 사울이 바울 되는 과정을 소개한다. 저로서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다. 생각해볼 시간을 주신 게 아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중심으로 스스로에 대한 권리 행사다. 주권을 바라고 이를 놓지 않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에서도 그렇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내 주장, 나의 권리를 내세우느라 주저하고 지체하기 일쑤다. 뭉개고 미적거린다. 오늘 본문은 그런 우리에게 ‘즉시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목격하게 한다. 실제 우리 삶에서 빛은 즉시로 어둠을 드러나게 하였다. 그럴 때 우리의 죄란 극구 그 빛으로부터 의도적으로 숨기는 것, 하나님으로 승복할 수 없어 온 힘으로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죄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7:14).” 옳다 여기게 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그 죄는 자신이 옳다 하고 여기는 범주의 자신감이다.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신 25:16).” 사울과 바울의 대조적인 변모를 살피면 이해가 쉽다.

 

중간은 없다. 빛으로거나 어둠으로다. 요즘 나는 새삼 어려운 난제에 봉착했다면 나의 주장을 죽이는 일이다. 가령 아들이 충치 치료를 하다 병원 측 과실로 마취주사가 신경을 건드려 그 부위 잇몸이 괴사했다. 몇 주째 충치 치료를 중단하고 잇몸이 재생되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어제는 아내가 치과로 전화를 하여 그러한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아들은 그러는 것을 참견으로 여기는지 뭐라 말도 않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병원 측으로부터 그런 설명을 들었나? 물었더니 그런 것 같다며 성의 없이 툭, 대답하고 만다. 성가시다는 듯 인상을 쓰며 입을 다무는데 나는 마음이 또 상한다. 아내는 계속 했던 말을 또 하며 설명에 설명을 더하니 순간 사실과 상관없이 서로들 짜증이 올라왔다. 그러니 다들 알아서 하겠다는데 애들도 아니고 뭐라 하겠나? 얼른 가정예배를 드리고 들어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듯 나는 자꾸 마음이 상한다.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 나를 위축시킨다. 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그냥 그대로 내버려둬야 할지… 혼자 애태우다 올라오는 화를 눌러버린다. 우리의 자기고집은 저마다 엄청나다. 이를 이제 나서서 내가 뭐라 한다고 될 것도 아니고, 각자 저의 하나님과의 일이다. 기어이 살아서 사는 동안에 겪어야 하는 모진 경험으로다 지나야 하는 ‘다메섹’이다.

 

평소 왜 안정제 먹는 게 줄지 않는가 생각해보면 대충 이해가 간다. 그 또한 내 몫의 안달과 기질과 애태우는 심보다. 어쩌겠나? 맡기지 못하는 만큼은 스스로 짊어지고 버텨야 한다. 고집하는 만큼 고달플 따름이다. 알면서도 안 되는 게 죄악이다. 그때마다 용서를 구하고 긍휼하심을 바란다. 특히 가족 간의 관계란 마음에 두고 살아야 사는 몫이 크다.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스스로 볶는 일이 분이 겨워 안정제를 의존하면서 견뎌내는 것이다. 것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내버려두고 뭐라 하지 않는 만큼 내가 속을 끓여야 하고, 그러는 동안 마음은 상하고 그때마다 당하는 상처로 안달복달 견딜 수가 없지만… 죄의 본질은 이와 같이 자기주장과 자기 권리에 대한 의도적인 항변이다. 하나님께 대한 거역이다. 맡길 수 없는 만큼의 무게다. 죄는 행위가 아니다. 그 자체의 본성이다. 이는 용서 받는 일이 아니라 주의 긍휼하심으로 전적인 수용밖에는 길이 없다. 그리하여 우리의 구원은 내 의지와 노력과는 상관없이 주를 영접함으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여전한 것은 그 본성으로 인한 죄악이다. 불안과 불평과 불만이 툭, 불거져 나와 혈기가 되어 자신을 못 살게 굴고 상대를 공격한다. 죄악으로 인해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실감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나는 나의 어쩔 수 없음이 크면 클수록 주의 도우심과 긍휼하심을 바라고 또 바란다. 이는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의 약함이 나로 하여금 주를 바라게 한다. 어찌 다 설명할 길 없는 나의 불안과 마음의 불만이 이처럼 아침마다 주 앞에 끌어다 앉힌다. 주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아들을 아내를 나는 어찌할 수 없다. 저들도 저들 자신으로 어쩔 수 없는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이 씨름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온전히 주께 승복하든가, 끝까지 자기고집을 견지하든가! 그러는 동안 고달픈 인생살이는 어쩌겠나? 스스로가 자처하는 일인 것을. 누가 뭐라 한들? 자식이라고 내 맘 같겠나? 하나님도 우리를 강제하지 않으셨다. 내버려두심으로 알 때까지 그냥 두신다. 그냥 두심으로 고단한 세월을 살아야 한다. 이를 가지고 주를 원망할 수는 없다. 이미 충분히 모든 것을 다 이루시었다.

 

이어 말씀하시기를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이는 하나님을 위한 게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이다. 그러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은 조금도 차질이 없으시다. 죄와 죄악은 그 차이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죄는 상태이지 실상은 죄악 됨이다. 내 안에 욱, 하고 치밀어 오르는 화이고, 이를 참지 못해 저지르는 말이며 행동으로 참담함을 느낄 때 내가 죄인인 것을 실감한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는 자신이 죄인인 것도 부인한다. 살인을 한 것도 아니고 누구처럼 강도질을 저지른 것도 아니라며 스스로를 낫게 여긴다. 그러는 동안에는 애써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게 없다. 죄 씻음 받기를 원할 게 없다. 뭘 그리 잘못한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더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과 견주어서도 스스로를 괜찮다고 여긴다. 이를 부인하라는 것. 우리가 주를 따른다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일과 같다.

 

그러므로 사울에서 바울 되는 ‘즉시로’의 은혜가 귀한 거였다. 나도 나를 주장하지 않는다. 내 권리는 없다.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니다. 하물며 내 자식, 내 아내에 대한 나의 감정들까지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느라 여전한 죄의 본성은 이를 힘겨워 힘에 부치니까 안정제도 먹고, 속이 볶여 늘 소화불량에 불안으로 인한 허리 통증도 예사로운 게 아니다. 단지 신체적인 문제만이 아닌 것이다. 심리적으로도 이를 분간할 수 있다. 나의 나 됨이 어쩔 수 없어 오직 주만을 바라게 하시려고.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를 받아들임으로 날마다 마치 제자리걸음이나 하듯이 그래도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보내시고 저의 우려에도 살피고 돌보는 손길로 두신다. 그런 우리는 다만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행 9:20).” 강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22).” 오늘 우리가 주의 장막에 머문다는 일은 이처럼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으나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나는 하루에서다.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 같은 날이나 그러는 동안 주가 이루어 가시는 나와 내 영혼의 일로도 알 게 하신다. 그러면서 자라간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 6:1-2).” 그렇게 우리가 거듭난다는 것은 점점 더 확실하고 선명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그렇게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무던히 나는 나의 주권을 주께 내어놓는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