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게 구하라

전봉석 2022. 1. 24. 05:24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민 13:30-31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시 2:8-9

 

 

기대가 어려운 걸까? 단념이 어려운 걸까? 기대도 단념도 어쩌면 주의 일을 하는 데 내 몫이 아닌지도 모른다. 누가 하려할 때, 새로 무엇을 전하고 이를 기대한다. 제법 그럴 듯하게 하려하고 따라한다. 그럼 내 안에는 나도 모르게 기대가 싹 트고 어떤 즐거움이 생겨난다. 그러다 어느 시점이 되면 처음과 달리 시큰둥하다. 어르고 달래며 이끌어보지만 처음만 같지 않다. 그러다 어느 순간, 멈춤. 다시 제동을 걸고 하게 하려하며 갖은 애를 써도 처음에 가졌던 열심은 사라지고, 무슨 벼슬인 것처럼 격려하고 재촉하는 나의 마음은 무시당한다. 꾸준하고 무던한 사람을 만나기는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인 것 같다. 나는 좌절한다.

 

어제는 종일 누구의 글을 기다렸다. 그렇게 하루 이틀 쉬면 다시 이어가기가 쉽지 않을 텐데 싶어 말을 걸까하다 그것이 참견이 될 것 같아 기다렸다. 나 혼자 안달이 나는 것. 가끔 사역이란 짝사랑 같다. 마음은 저 혼자 들썽거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만 태운다. 오늘 말씀에서 문득 나는 주의 마음을 그리 느낀다.

 

비로소 주의 백성들이 가데스 바란 광야에 당도하였다. 저만치 약속의 땅이 보인다. 출애굽하여 성인 걸음으로 이십여 일이면 될 길을 육십만 이상의 식속들을 이끌고 일 년이 걸려 당도하였다. 여호와께서 사람을 보내어 가나안을 정타하게 하신다. 그러자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을 보낸다. 그 가운데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불러다 모세가 이른다.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18).” 하고 열두 명을 보낸다. “탐지하라 담대하라(20).” 저들이 올라가 본 약속의 땅은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27).” 하고 아름다운 실과를 보인다. 바란 광야 가데스에 모인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이를 보고 놀라워한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28).” 하는 부정적인 보고가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자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30).” 하고 장담한다.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31).” 자신들과 비교하여 당할 수 없음을 알린다.

 

보고는 십대 이로 부정적인 것이 우세하였다. 백성들은 요동치고 결국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를 거절한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14:1).” 결국 저들의 선택은 광야 40년을 배회하다 광야에서 죽는 길을 택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나는 턱을 괴고 앉아 가늠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정을 상상한다.

 

오늘 시편은 이럴 때 우리의 자세를 교정하는 내용이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시 2:8-9).

 

모든 성경의 이야기는 별개인 것 같으나 하나이고, 그 하나의 이야기는 서로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말씀은 또 각각의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 이야기와 연관이 있다. 즉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생각을 아시고 계신 듯 맞춤하다. 내가 할 일에 대하여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4-26).” 어찌해야 할 것을 알리신다.

 

사람을 보면 부정적이다. 저의 처한 상황이나 성격, 그 기질도 다르지 않다. 하나마나한 일 같아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민 14:2).” 하는 원망이 저절로 나온다. 얼추 일 년의 시간을 광야 생활도 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셨는가도 경험으로 안다. 주의 종 모세는 저들을 설득한다. “그 땅의 열매를 손에 가지고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우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 하였느니라(신 1:25).” 그런데 어떤가? 저들은 원망하고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하고 저들은 하나님을 향해 말도 안 되는 소릴 일삼는다. 답답한 노릇이다.

 

모세가 눈물어린 호소를 한다. “우리가 어디로 가랴(28).” 저들이 낙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앎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29-30).” 하고 애원하듯 설득한다.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하나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32).”

 

그 결과는 고스란히 살면서 삶으로 이고 지고 살아야 한다. 예배 전에 일찍 온 아이에게 나는 엄마는 안녕하신가? 주일 예배를 드리러 가셨는가? 하고 물었다. 어쩌자고 저이는 아이를 자신이 짊어지려고 하는 것인지. 결국은 자신이 못 다하면 그 형제에게 아이를 떠넘기고 갈 것인지. 도대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무슨 수로 저 아이를 감당하려 하는 것인지. 얼마 전부터 나는 나 혼자 애를 태운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어서 부디 우리가 같이 주 앞에 의뢰하고 아이를 더욱 신앙으로 양육하면 좋으련만… 사느라, 사는 데 급급하여 아이를 장래를 저들은 어쩔 수 없음에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몇 마디 묻다 아이와는 대화가 어려워서 입을 다물었다. 더욱이 엄마 이야기에는 아이도 본능적으로 방어적이다.

 

같은 광야를 지나 당도한 곳인데 저마다 느끼는 하나님이 다르다. 애굽에서 하나님이 어찌 구하고 인도하셨는가를, 여기까지 어떻게 하나님이 인도하셨는가를, 모세는 마치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고 설명하고 설득하고 애원하나 저들에게 그 하나님은 그저 인색하였던가보다. 결국은 어쩌겠나? 저들이 믿음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더라면 어땠을까? 굳이 광야 40년을 돌지 않았어도 될 것인데… 불순종이란 결국 나만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다. 내 아이와 나의 후손의 일로까지 남겨진다. 그때의 나의 선택으로 먼 길을 돌게 하였다.

 

공교롭게도 어제 나는 설교 중에 이와 같은 나의 어리석었던 날을 후회하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며 부디 나와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지 않기를 바라였다. 우리 주님은 일러,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주의 자녀다. 변치 않는 약속으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이는 불가항력적인 일이다. 우리의 거절과 거부도 소용이 없다. 그럴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이내 곁길로 든다면 징계와 꾸지람이 당연하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아이에게 물을 때 엄마는 홈쇼핑을 보고 있거나 청소를 하거나 어제는 무슨 만화를 보고 있더란다. 나의 안타까움은 아이가 그러니 더욱 더 엄마라도 아이 앞에서 주를 바라고 같이 주를 의뢰하는 법을 가르쳐야 할 터인데…. (나는 이제 저이가 이 글을 읽기를 바란다. 그리고 감정이 상하고 마음이 아파 나와 싸우자고 연락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나는 아이를 생각하면 찬송가 <나의 사랑하는 책>이 저절로 마음을 울린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 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니가 들려 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중략)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니가 들려 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하다못해 글방에 오는 아이들에게조차 예배와 성경을 기본으로 먼저는 아이가 나아가서는 그 가정이 예배가 회복되고 교회로 다시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건처럼 그리 일한다. 한데 하물며… 저이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이 앞에서 주일을 어기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교회를 안 다니는 모습으로 기억되며 살고 있을까? 엄마는 교회에 가셨니? 예배는 드리시니? 하고 물으면 아이는 강박적으로 예민하게 반응을 한다. 그걸 왜 자기에게 묻는가 하고 의이해하는 표정이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그야말로 약물에 의존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도 경계의 대상인 정신병을 가지고 있는 아이를 두고… 차라리 안 믿는 엄마라면 기도는 단순하고 마음은 복잡할 게 없겠다. 물론 이런저런 사정으로 ‘코로나 때문에’ 직접 교회에 나가지는 못한다면, 하다못해 아이 앞에서 시늉이라도! 그래서 아이의 기억에 엄마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였다는 기억이 없이 아이를 남겨두고 떠날 때 어쩔 셈인가? (부디 이 글을 읽고 감정 상해 자존심 때문에도 싸우자고 덤볐으면 좋겠다!) 그렇게 애태워하느니 자기가 그럼 먼저 전화를 해! 하고 아내는 종종 말하는데….

 

모세도 하나님이 강제할 수 없어 저들을 강제하지 않으셨겠나? 이런저런 우려와 염려, 사정과 절망으로 돌아가자 할 때 이를 붙드실 수 없어서 저들을 내버려두셨겠나? 결국은 같이 남겨질 그 형 아이의 몫이다! 어쩌겠나? 엄마가 정신 차리지 못하고 하다못해 시늉이라도 연기로라도(!) 아이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이를 경외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 몫의 결과로 저들이 걸어야 할 광야 40년의 길이 남아 있는 것일 텐데! 어제는 아이와 20여 분 이런 이야기를 하다 속상해서 괜히 나 혼자 답답해서, 이 아침에도 혼자 또 이런다. 가끔은 이 글을 본다니까, 행여 볼 텐데… 하는 우려도 하면서. 이런 데 싫어서 함께 하지 않는 것도 안다. 큰 교회를 배회하듯 뒷자리에서 타인으로 앉았다 오는 신앙으로 떠도는 이유도 안다. 이럴까봐 작은 교회를 꺼리는 것도 안다. 자신의 문제로도 정신과 약을 먹어야 할 정도인 것도 안다. 그래서? 그러니?

 

당도한 약속의 땅 가나안 앞에서 저들이 원망하고 우려하고 걱정하며 좌절하는 이유도 안다. 그러나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던가? 결국은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잘못된 선택을 선으로 바꾸실 것을 믿는다. 모든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2-23).”

 

어쩌겠나? 그러는 동안 아이의 마음에는 반항과 반목이 쌓이고, 뭐라 대화를 시도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를 두고, 그저 좋다 오냐오냐 하며 그럭저럭 지내는 게 옳은 일인지. 나는 혼자 속앓이를 하듯 끙끙 앓다 또 만다. 먼저 연락을 하자니, 그렇다고 저이가 모르는 소리도 아니고 스스로도 다 알고 누구보다 잘 믿고 하나님을 백 배 천 배 사랑한다는데. 나는 이도저도 할 수 없어 전화기만 만지작거리다 그만둔다. 혹시 아이가 돌아가 엄마에게 아침에 나누었던 말이라도 전했을까 하고 기대하다 걱정하다 혼자 애를 태우다 만다. 그리고 말씀에서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사 46:10).

 

주께서 행하실 것을 믿는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저들을 보내시든지 결국은 다른 길로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실는지…. 그러니 돌아야 할 수밖에 없는 광야 40년 길이라면 그래야지, 별 수 있겠나? 어제 나는 말씀을 전하며 나의 가족들과 오래된 나의 제자에게 일렀다. 미안하고 또 미안한 일이었으나 부디 나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를. 우리 앞에는 항상 두 길이 놓인다.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으로 갈 것인지, 안 되겠으니 돌아갈 것인지. 하나님은 강제하지 않으신다. 기어이 동생 요셉을 애굽에 팔 것인지 아니면 용서하고 사랑할 것인지. 이내 다윗은 성적인 충동으로 밧세바를 끌어다 범할 것인지 얼른 얼굴을 돌려 죄악된 마음을 물리칠 것인지… 숱하게 우린 많은 갈림길에 선다. 물론 결론은 하나님은 선하시다. 이 모든 것들에서도 우리의 잘못된 선택마저 선으로 바꾸신다. 주의 사역은 그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우린 그 과정을 다 알 수 없다.

 

다만 그 일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모진 가뭄에서 가족들을 살렸고,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 광야 40년의 모진 생활로 괴로운 삶이었으나 섞여 나온 무리들이 모두 죽었다. 곧 우리 안의 ‘섞여 사는’ 죄성들이 죽기까지의 광야 40년은 필연이기는 하겠다. 여하튼 그리하여 솔로몬이라는 지혜의 인물을 얻은 것이 복이라면 복일 테지만 저로 인하여 후대에 이스라엘은 분단국가가 되어 싸움이 끝이 없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죽음의 가뭄을 모면하였으나 그로 인해 무려 420년의 애굽 생활로 저들은 뜻하지 않은 노예살이를 하였다. 나는 나의 지나온 시간을 두고 후회를 또 한탄을 하다가도 비로소 주의 은혜를 뜨겁게 사모하게 되었으니 감사하다. 그러나 그로 인한 아내와 아이들의 모진 생활에 대하여는 가만히 돌아볼 때마다 눈물로 용서를 구한다.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신다. 그러는 동안 자신들이 안고 살아야 하는 삶의 질고는 전적으로 자신들의 몫이다. 이는 선택 불선택, 천국 지옥, 옳고 그름의 일보다 원론적이다. 여호수아는 훗날 지긋지긋한 저들의 불순종에 질려서 결연하게 외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내가 나의 나 된 것도 지겨울 때가 있는데 하물며 저들도 저들 스스로 어쩔 수 없는 것이겠거니 생각하지만 어쨌든 각자의 선택이다. 살아서 사는 동안 선택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이면 자녀여서 더 고통스럽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불신자이면 불신자여서 마땅하다.

 

그럼에도 참 큰 은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다. 이 모두를 선으로 바꾸신다는 것.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그러니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도 그냥 살던 대로 살던가. 살아서 사는 날 동안 골 깊은 세월을 보낸 후에야 빛을 발견하고 뒤늦은 후회와 또 회개로 나의 날들처럼 송구하던가. 어쩌겠나? 스스로 자기 고집을 자기가 못 이기는 것을! 아,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시 2:1, 4).

 

오늘 말씀은 이에 응답하시는 것이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5-6).

 

부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