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수 15:18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 74:16-17
제비 뽑아 유다 자손의 경계가 에돔에서 신광야를 거쳐 대해에 이르렀다. 저들이 차지한 땅은 평지와 산지와 광야 모두 115개 이상이 된다. 갈렙은 옷니엘을 통해 드빌을 점령하고 그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었다. 이는 모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가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유다 자손 중에서 분깃으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주었으니 아르바는 아낙의 아버지였더라(수 15:13).” 저들을 모두 몰아내고 갈렙은 그 산지를 차지하였다.
갈렙은 하나님께 충성하였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셨다. 갈렙을 통해 이어진 복은 그의 자녀들에게 전가되었고, 그의 사위가 된 옷니엘은 드빌을 차지하고 훗날 사사가 되었다. 갈렙과 같이 그의 딸 악사도 자기 몫의 복을 요구하였고 당당히 윗샘과 아랫샘을 받아 네겝을 풍요롭게 하였다. 악사의 땅의 근원이 되는 샘물을 요구하였고 아버지 갈렙은 이에 기꺼이 윗샘도 아랫샘도 저에게 주었다.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18).”
우리로도 성령을 구하라 하셨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누구와의 대화에서 나는 뭐라 하다 울음이 올라왔다. 저나 나나 우리의 연약함을 두고는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성령을 구하자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로 능치 못함이 없게 하신다고 하였으니… 일련의 확진과 양성으로 고통을 당하고도 여전히 미적거리며 도로 살만해지니 게임을 하거나 늘어져 있다는 말에 어떤 슬픔이 내 안에 먼저 들어찬 것 같았다.
우리 스스로 자신의 연약함을 알면 알수록 주밖에 의지하고 의뢰할 이가 어디 있겠나? 언제까지 똑같은 소리와 일상과 그 늘어지는 영적 게으름에 놀아날 것인지. 뭐라 이르다 그 말에 내가 아파서 속울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2).” 우리 마음에 주신 성령이 분명하다면-그와 같은 대화를 나누게 하시는 자체가 나는 그러하다고 믿었다. 어찌 주의 영이 우리 안에서 할 일을 못 찾고 좌정도 하지 못하게 하실 터인지.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갈 3:5).”
특히 나는 그 와중에 저들이 성경을 자판으로 필사한다는 소리에 기가 찼다. 것도 손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아무 생각없이도 수동적으로 할 수 있는 그 정도로 뭔가 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꾸미고 하나님을 속이려는 것 같아 화가 났던 모양이다. 주의 부르심을 받아 목사로 세우심을 받았다면 고작 그 정도밖에는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소린지? 그걸 왜 타이핑을 해? 하고 묻다 놀랐다. 나는 아픈 아이에게 그걸 시킨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그거라도’ 하라고 한다. 결코 성경을 옮겨 적는 일을 두고 뭐라 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좀 더 깊이 알고자 하면 손으로 또박또박 그 의미와 뜻을 헤아리며 쓰던가. 것도 아니면 단 한 구절을 여러 번 되새겨 그 뜻을 곱씹으며 그 입에 머금던가.
나는 ‘아픈 아이’에게 일기도 써보게 하고, 묵상글도 써보게 하고, 손으로도 성경을 필사하게 하다 ‘어쩔 수 없이’ 자판으로 성경을 치게 하였다. 엄연히 컴퓨터로 자판을 치는 것은 쓴다고 하지 않고 친다고 해야 한다. 친다는 익숙한 손놀림으로도 충분하여 얼마든지 건성으로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자판 치는 실력이 너무 빨라서 늘 잔소리처럼 천천히, 또박또박! 하고 뭐라 나무란다. 한 장에 3분, 5분도 안 걸리니 읽는 것보다도 빠르다. 그래도 아이는 하루 대여섯 장씩 벌써 두 번째 세 번째 성경을 친다! 저들도 어디가 아픈가? 아이큐 60에 지능이 떨어지는가? 앞뒤 맥락을 읽고 이해할 능력이 안 돼 대학원까지 공부를 마칠 수 있었나? 어이가 없었다.
사고력이 부족한 사람들도 아니고(병적인 부분이 있기는 하나), 어디 사지육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도 아니고… 왜 말씀을 치나? 그 삶이 왜 늘 수동적인가? 이래저래 안 되겠으니 하는 소리가 다시 어디 전임은 구하던가, 파트로라도 알아볼까? 한다고 하니, 할 마음이 있기는 한 것인지. 나는 그 소리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스스로 딛고 일어서기가 그처럼 어려운가? 아니면 싫은가? 확신이 들지 못하는 것인가? 주를 못 믿겠어서 그런가? 우리에게 성령이 거하신다면, 믿음으로가 아니면 이 길을 어찌 가겠누? 예전에 문예창작을 공부할 때였다. 돼도 않을 작가가 되려하기보다 먼저 바른 독자가 돼야 한다고 최인훈 선생은 가르쳤다. 나는 그의 말이 인상적으로 남았다. 왜냐하면 어줍게도 나는 작가를 시늉을 내고, 시인이 되려 억지로 글을 주워섬기는 게 아닌가 하는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리가 주의 길을 간다는 것,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둘인가? 신학을 공부하면 끝인가? 이제는 살아야지! 말씀으로 사는 훈련을 연마해야지. 그러느라 자빠지고 깨지고 부서져야지. 그래야 그런 이들을 위하고 손을 내밀 것 아니겠나? 주님은 요구하셨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말이 되나? 자기를 부인하고 좇으라니. 것도 자기 십자가를 지라니! 한 마디로 죽으란 소리가 아닌가? 이어 하시는 말씀은 충격적이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5).” 죽으란 소리네! 죽을 생각으로 따르라고 하시네! 스스로 살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인데, 이를 따르지도 못하면서 누굴 이끈다는 것인지.
이끌 생각이 없이 어찌 목사랍시고 감투를 쓰고 버티고 있는지? 그렇게 자기 곁에 두신 한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자식으로 주신 아이 앞에서도 복음을 증거하지 못하면서 대체 어찌 다른 한 영혼 한 영혼을 두고 씨름하겠다는 소린지?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없다! 십자가는 짐이 아니다. 곧 죽음이다. 죽으라는 말씀이시다. 그 위에서 죽을 생각이 없는데 그걸 무슨 수로 이고 지고 따르겠다고 나서나 나서길? 겁먹자. 부디 좀 두려운 줄을 알자. 하고 뭐라 이르다, 나도 그만 울컥 하고 깊은 속에서 나도 알 수 없는 뜨거운 무엇이, 속상함인 것 같기도 하고 안타까움인 것 같기도 하고, 부끄러움인 것 같기한 것이 한탄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울음으로 툭, 하고 터졌던 것이다.
어쩌자고 이 길을 가겠다고 나선 것일까? 내 안의 갈망 어떤 확신이 없다면 단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길이다. 이는 혼자 일이 아니라 가까이는 그 자녀에게 나아가서는 그 곁에 두시는 잠재적인 주의 자녀들을 모두 망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기껏 교회를 다니던 친정부모와 형제들이 이제는 교회를 떠나 하나님을 등지고 산다는데 글 태평한가? 세상으로는 병적으로 염려와 근심이 누구보다 깊은 사람이 그 영혼들을 두고는 아무 걱정도 안 되나? 훗날 저들이 불구덩이에서 평생도 아닌 영원히 고통당할 것을 알면서도 그리 어영부영 지낼 수가 있겠나? 언제까지 신랑 탓만 할 것인가? 자신에게 주신 사역과 그 부르심은 그저 장난이었나?
친정은 물론 시댁 부모도 하나님을 떠나고 온전하지 못하면 주의 사명을 맡은 자로 귀감이 돼야 할 터…. 목사가 돼서 사는 그 꼬라지를 보아하니 아니 믿는만 못한 것일 테니 뭐라고 저들에게 하나님을 전할 것인가? 전할 마음이 있기는 한 것인가? 그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나 부모고 형제로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던가? 오히려 저들 모습에서 교회와 주의 말씀에 더 환멸을 느낀다면 그 책무를 어찌 할 셈인지?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 18:7)." 또한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먹 9:42)." 겁내라. 제발 두려워해라. 지금 그리 한가할 때인가? 그럴 바엔 차라리 관두고 각자 가까운 교회에서 자기 신앙이나마 근근이 지키기라도 하던가. 아,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시 3:5-6).
부디 그 영혼이 깨어나길. 정신 차리고 주의 길을 똑바로 걷길. 뭐라 이르다 와락, 내가 먼저 울음이 난 것은 나 역시 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 그러했을까?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사 30:15-16).” 주를 온전히 바라고 신뢰하지 못하면 별 수 없다. 한다고 하면서 다른 길로 냅다 도망가는 꼴이다. 그러니 주의 본보기가 있어야 할 것인가?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 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17).” 왜 겁들이 없어? 왜 두려운 줄을 몰라? 하고 다그치다, 그 말이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 37:7).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다. 스스로에 대한 인내와 내 곁의 누군가를 위한 인내이며 나아가 한 영혼 한 영혼 주가 맡기시려 하는 영혼들을 위한 인내이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라 하심은 그래서 할 일 없어 게임이나 하고, 아침인데 도로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으라는 소리가 아니다. 또는 노느니 장독 깬다고, 성경이라고 자판으로 치고, 가정 예배를 드린 듯 만 듯 삐쭉 드린 것으로 마치 제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여기고서는 안 된다. 아,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오늘 우리를 가로막는 경제적인 어려움, 교회를 이루려 하는 데 드는 비용으로 끼치는 막막함, 누가 오겠나? 싶은 막연함, 저러다 또 괜한 돈만 허비하는 게 아닌가? 싶은 걱정들… 왜 그런 걸 자신들이 논하고 걱정하고 그 핑계로 드러누워 세월아 네월아 하며 시간만 죽이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을 그 정도로도 모르나? 못 믿겠나? 그럼 차라리 훈장 떼고 남들처럼이나마 자신들의 생애에 충실하던가? 그게 다 먹고 살만하고 적당하니 그렇다. 돈이 없네, 없네 하면서도 등비빌 데가 있으니 그 모양이다. 당장 쫓겨날 판이고 자식 새끼 입에 물린 밥이 없어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부디 인내하라는 것이다. 곧 이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확신이다. 불가능하겠나?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아직도 그런 확신이 없다면, 그만 둬야지! 자신들도 자신들이지만 누굴 죽이려고?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악으로 덮어두지 마시기를. 내 곁의 가족들에게 본이 돼야 할 것이고 이는 안 믿는 자들도 최소한 지 마누라 지 자식들은 끔찍이 위한다. 하물며! 주의 살아계심이 우리 삶에 함께 하심을 모르겠다면 내 곁의 한 영혼에게도 희망이 없다. 살아서 사는 것으로 다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그 살아가는 모습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야 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 곁에서 멀리서나 드러나야 한다. 저들로 알게 하는 생활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더욱 더 성실하고 규칙적이고 바른 자세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킴은 당연하였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내가 주의 자녀인 것을 저들로 알게 해야 한다. 보여주어야 한다. 증거가 돼야 한다. 이에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16).” 내가 꾸며 나를 속이고 하나님의 눈을 가리려는 것보다 겁대가리 없는 삶이 또 있을까? 차라리 안 믿는 자에게 더 소망이 있겠다.
누가 말하길 교회를 떠난 어떤 이가, 난 널 보면 굳이 교회를 계속 다녀도 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소릴 들었다고 하며 슬퍼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통회와 자복이 없이 어찌 이 길을 갈 수 있을까?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몸서리 쳐져야 마땅하지 않겠나?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데? 시늉만 그리스도인이고 감투만 목사이면 뭘 하나? 교인이면 교인다운, 성도이면 성도다운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것. 그래서 나는 애타는 심정으로 성령을 구하라고 당부하였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
부디 누구에게 한 말이 그저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듣기 싫고 찌르는 말로만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이 두렵고 떨리는 말씀을 차라리 열 번 백 번 쓰고 또 쓰며 자신을 쳐 복종시키기를. 아들은 이번 시험이 어찌 되었는지, 나는 묻지 않았지만 저 혼자 머리를 쥐 잡은 듯 밀고 밥상에 앉았는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심정이 교차하였다. 아내는 눈치도 없이 맹구 같다며 낄낄거렸는데 나는 차마 울 수도 없었다. 하다못해 이 땅에서의 공부도 마음 같지 않아서 그 속상함을 머리를 자기 손으로 자르며 마음을 다지는데… 하물며 영생을 두고 주의 부르심을 받았다면서 언제까지 안일한 마음으로 뒹굴고만 있을 것인지.
그 영혼을 위한다면 야구방망이를 들고 들어가서 그 컴퓨터를 부셔! 그의 게임용 자판을 두드려 깨고, 애지중지하는 건담이나 로봇이니 하는 것을 깨뜨려! 당최 목사가 무엇을 애지중지하고 무엇에 정신이 팔려 저러고 있는 것인지… 이에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그리 읽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이 말씀 한 구절을 붙들고 세계 각지 선교지를 찾아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달려간 주의 종들이 얼마나 많은가? 저들에 의해 조선에 복음이 들어왔고 구한말을 거쳐 숱한 이들이 초개와 같이 자기 목숨을 잃으며 남의 나라, 이 작은 땅에서 이슬과 같이 죽어갔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지우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죽을 각오로 나서는 길이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34).”
어제는 이 말씀에 붙들렸고, 오전에 누구에게 뭐라 한 말이 얹힌 듯 명치끝이 아픈 하루였다. 두통은 가시지 않았고 눈두덩이가 아파서 연신 눈을 짓누르기도 하였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성령으로가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들? 요란하고 거창하게 사역자입네 하고 거들먹거리며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 산다고 한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 성령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은 잔인하고 때론 가혹하여서 지존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그 독생자의 생명도 가차 없이 내어주신 바 되는 사랑이다.
하다못해 이 땅에서도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데 하물며 주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자기 십자가도 마다한다면 무슨 수로 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4-15).” 이를 붙들고 갈렙은 당당히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고 주 앞에 요구하였고,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수 14:12).”
그의 딸 악사는 그의 아버지 갈렙에게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15:18).” 하물며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성령도 주시지 않으시겠나?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구하자. 그리고 받은 줄로 알고 당당히 말씀 붙들고 나아가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부디 나의 사랑하는 동기, 주의 길을 가는 동역자들이 주 앞에 온전하여 말씀 가지고 그 길을 나서기를. 지금 이 시대가 어떠한가?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시 74:18).
이를 보고도 아무렇지가 않다면. 식구들조차 교회를 떠나고 더는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데도 태평하게 사는 데 급급하여 살고자만 하면, 우리에게 맡기신 주의 말씀은 어쩌려는 것일까? 우리는 울부짖어야 한다. 주 앞에 요구하고 원통함을 아뢰어야 한다. 영원한 죽음으로 끌려가고 있는 그 부모와 자식을 위해 호소해야 한다. 그 일을 대적하고 무찌르고자 죽기를 각오하고 주께 바라야 한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8).” 부디,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주의 대적들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께 항거하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
(22-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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