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삿 13:17-18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시 96:9
블레셋에 의해 40년째 압제를 당하던 때였다. 삼손을 사사로 세우시기에 앞서 그의 부모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시는 부분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예비하신다. 그런데 상식 밖이다. 특히 부친 마노아의 행실을 미뤄 짐작하면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주의 사자가 저의 아내에게 나타나셨다(3). 일러 앞으로 일어날 것에 대해 알리신다(4-5). 이를 여인은 남편 마노아에게 알리지만 저는 알아듣지 못한다. 주의 사자의 말에 주목할 영성도, 아내의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헤아릴 정서도 안 된다(6-7). 그래도 저는,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께서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오게 하사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하니(8).” 기도하였고,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9).” 하나님은 그런 자의 기도도 들으셨다.
그런데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였으나 그의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9).” 두 번째로 주의 사자가 임하셨을 때도 마노아는 거기에 없었다! 미뤄 짐작컨대 저는 미심쩍었고, 자신이 드린 기도에 대해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저의 아내가 저를 데려오고 저는 뒤늦게 와서도 주의 사자를 알아보지 못한다. 다만 흥미로운지 같이 식사에 초대한다(12-16). 그러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16).” 저의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처사에도 주의 긍휼하심은 이어진다.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17-18).”
이에 제단을 쌓을 때에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20).” 그러하니 “마노아가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21-23).” 이어지는 말과 행실과 생각으로 어찌 저런 자에게 주의 사자가 임하실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주의 구원은 이루어진다는 것,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는 우리의 됨됨이나 그 자격에 의한 게 아니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그럼에도 죄의 반복으로 우리 영혼은 무뎌져 회개의 기회를 잃을 수 있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그 영혼이 총명을 잃고 어두워져 굳어짐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떠날 수도 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18).” 곧 우리의 잃어버린 감각에 대해 마노아의 상태를 보아 알 수가 있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19-20).”
우린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렘 7:13).” 그럴 여유가 없다. 틈을 내지 못하는 것은 당장에 사는 일이 너무 급급해서이다. 한데 성경은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그리하여 그 마음이 완고하여지지 않기를….
거의 몇 년 만에 친구와 낚시를 했다. 하루 휴가를 내고 일부러 온 것인데 그 와중에도 계속 전화가 들어오고 현장에,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대고 응대하느라 바빴다. 설계 건축 일을 하는 일에서 감리에 따른 것으로, 곁에서 듣는데도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결국 목이 다 쉴 정도 여러 통의 전화를 하고도 결국은 미진한지, 오후에는 서둘러 돌아갔다. 마치 어떤 한 장면을 보고 느끼고 돌아온 듯한, 그야말로 그럴 수밖에 없는 바쁜 현실에 따른 모습을 직접 목격한 것 같은. 스스로 그럴 수밖에 없다지만, 직함은 상무이나 건축 일에서 그 업무는 늘 일에 치여 사는 꼴이라…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롬 13:13-14).” 그럴 수밖에 없고, 그게 왜 나빠? 하고 물으면 뭐라 말하기 어려우나… 그러느라 또 사람들고 만나야 하고, 업무의 연장으로 술자리도 마다할 수 없고, 속된 말로 공사판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저도 어쩔 수 없다는 말에, 주일은 지키는가? 하고 물었을 때 그나마 ‘그럼!’ 하고 요즘은 대면예배로 직접 나아가 참여한다는 말과 다음 주부터는 일대일로 성경공부도 다시 시작한다는 말에 안도해야 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4-5).”
물론 신앙은 이상론도 추상적인 의미도 아니다. 지극히 부대끼는 현실적인 일이다. 한데 우리 스스로 구별된 자로 살려하지 않으면 영적인 감각은 무뎌져 더는 사용할 수 없이 완고해지고, 사느라 그저 사는 동안의 일에 절어서 사는 게 곧 지옥이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 12:2).” 그렇다고 현실을 부정하고 저마다 은둔의 삶을 살라는 게 아니지만,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시 135:4).
이를 망각할 때 우리의 존재는 스스로에 의해 부정된다. 어제 친구와의 시간에서 들던 어떤 안타까움을 오늘 말씀은 삼손의 부친 마노아의 행적을 두고 다시금 묵상하게 하신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는 친구의 말에 나는 가슴이 아팠던가? 일상적인 이야기 외에 주를 향한 마음이나 기림은 찾을 수 없고, 일에 쫓겨 마음은 바쁘고 ‘사는 게 다 그런’ 삶으로 채워가는 날들이 여전하니…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말도 안 되는 소리 같겠지만, 나는 이제 주의 종으로 말씀 가운데 살 수 있게 하심이 무엇보다 은총이란 생각을 하였다.
오늘 시편도 이를 비추어 주시는가? 나의 구속자로 주가 아니시면 살 수가 없는, 주의 경륜과 섭리를 찬양한다. 곧 우리가 성도이면 우리의 사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을,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시 96:1).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우리는 얼마나 주를 기뻐하며 사는지.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신 32:43).” 주가 아니시면 단 한 시도 살 수가 없음을 두고,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삼상 25:26).”
사는 게 지옥 같아서 사는 내내 원수를 상대하는 것처럼 사는 일이라니, 스스로 믿음을 지키고 그 신앙을 이어간다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이고 축복인지. 안 믿는 형 병원에서 아내가 일을 하면서, 거반 알코올 중독인 형과 술자리를 같이 할 때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친구는 덩달아 술을 마시고 늘 같은 소리에 취해, 말(言)이 말을 삼키는 형국이라. 의사로 그 아름다운 재능으로 주를 바로 알았더라면, 그처럼 술로 남는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을 텐데, 두 누이는 목회자의 아내로 살다 모두들 그 상대가 목회 일을 상실한 터라, 누구는 대장암으로 시달리고 누구는 이혼과 더불어 딸애의 신경증으로 고통중이다. 이 또한 친구나 저의 형의 눈에는 가소로운 일이라, 주를 믿고 주가 행하시는 일이라는 게 그저 여느 사는 일 중의 하나보다 못한 처지일 뿐이니, 저들과 ‘손절’하고 산지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뭐라 무슨 말로 저에게 주의 살아계심을 알릴까?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2).
아쉬웠는지 다음 달에는 대부도 어디 저수지로, 밤낚시로 가자고 하니 그때 다시 저와의 깊은 대화가 가능할는지.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7-18).” 돌아오는 길로 서로의 길이 갈리자 친구는 전화를 하여 조심히 잘 들어가라고 하는데, 나는 괜히 마음이 다 울적했다. 안 됐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형편으로야 저는 이제 건물주로 4, 5층짜리 다세대주택을 보유하고 살면서도 그게 다 돈이라, 사느라 바동거릴 뿐인 게 나는 하나도 부럽지가 않았다. 아,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 중1 때 같은 반이었으니, 서로 같이 늙어오는 셈이다. 그래서도 마음이 짠하였던 것일까? 연이은 전화로 목이 다 쉴 정도로 ‘조심히 들어가!’ 하던 전화 저편의 저의 목소리가 내내 마음을 울렸다. 소래포구를 지나오는데 저만치 석양에 물든 개펄과 그 너머의 대단위아파트들이 나는 공연히 서럽기만 했다.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3).
우리가 사명을 잃으면 무엇으로 주 앞에 설까? 저가 건축하는 성북구 일대의 가구 숫자로 말할 수 있을까? 당장의 일이 아니라 애매한가. 별로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 이야기에 대하여,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전 8:11-13).” 악과 선이 혼재되고 악이 더 선 같고 선이 되레 궁상맞은 현실에서, 저는 오히려 내가 안쓰러울까? 하나님의 참으심이 우리 영혼으로 안이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4-5).
바울은 절규한다. 애통하는 심정으로 설교한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우리가 주를 믿고 주의 자녀로, 성도로, 백성된 자로 산다는 것은 주를 경외하고 주가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를 감찰하고 계심을 의식하는 일에서이다.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6-7).
시인의 간곡한 찬송이 귓가를 맴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39:1-4).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눈물이 고이고 마음이 어려운 것은, 나도 나지만 내 곁에 함께 하시는 이들의 삶을 두고 주를 생각하게 하려 하심인데… 주의 마음을 헤아리다보면 자꾸만 눈물이 고인다. 우리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눈물밖에는 주 앞에 내어드릴 게 없다. 친구에게 뭐라 말을 했어야 하나? 어떤 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 사느라 사는 게 고단하다고 말하는 저에게 나는 무엇으로 살고 있는지를….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8-9).
오늘 시편이 나를 찌르시는 듯하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사 1:3)” 대체 주를 믿고 주의 자녀로 산다고 하며, 주의 부르심에 그 소명으로 붙들렸다 하면서도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주일예배는 가주는 것이고, 골프 접대(?)는 갈 수밖에 없는 일이니 때론 주일이 무색하고 너무 소홀히 여김을 당한다. 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친구는 새벽 네 시에 오면서 언제 묵상을 하고 글을 쓰고 그것을 정리하여 보냈는가, 하고 물어서 너와의 만남을 위해 한 시에 일어났다고 하자 그러는 나를 이해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서로가 서로를 안타까워하는 것일 텐데…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서로를 그렇다고 하는 문제일 테니 뭐라 할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10-13).
이를 알면 우리가 더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물음은 가치가 없어진다. 밭도 알고 나무도 알고 바다도 알고 땅들도 모두 아는 일을 두고, 어찌 사람만이 이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 49:12).
마치 앞으로 몇 년 혹은 수십 년은 더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도 벌어두고 모아두어야 자식들에게도 남겨줄 것도 있는 과업인 것처럼 계획을 세우지만, 그 모든 게 주의 은혜였음을. 언제든지 오라 하시면 가야 하는 게 세상인데,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모르겠다, 나는 자꾸. 내가 무얼 할 수 있겠으며 무얼 한다고 나아질 것인지도. 오직,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그의 날’은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부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주의 말씀으로 오늘도 위로를 얻고 새 힘을 얻으며, 주의 사랑하심이 아니면 단 한 시도 살 수가 없음을 고백하면서.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모르겠다, 나는. 말씀만 붙들면서,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121: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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