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전봉석 2022. 5. 2. 05:29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17:6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 100:5

 

 

사사시대에 저들이 왕이 없어 자기들 좋을 대로 그러함이 그려진다. 시간적인 구조로도 초기에 발생한 두 사건으로 이해된다. 이는 우리의 도덕적인 타락과 함께 영적인 무능함이 어떠한가를 드러낸다.

 

오늘 본문, 미가와 단 지파의 우상숭배 사건은 미가가 모친의 돈 일천일백을 훔치면서 시작된다. 이에 그 모친의 저주가 이어지고, 양심에 찔린 미가가 이 돈을 돌려주면서 은장색의 신상을 만든다. 물론 자신이 모르고 저주한 것이 아들의 소행으로 밝혀지면서 이 액운을 막으려는 처사에서, 제사장들이 입는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아들을 임의로 제사장을 세우고, 은 신상을 세우고 본격적인 우상숭배에 들어간다. 여기에는 함축하는 바가 많다. 당장은 아이의 이런저런 일로 부모로서 뭔 짓을 못하겠나? 누구는 우선 돈이라, 어떻게든 돈을 모아야 자신이 행여 떠나더라도 애가 살 게 아닌가 싶어 주일을 저버린 지 오래다. 누구는 어찌하든 가르쳐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게 하는 게 목적인데 그 마음은 가상하나 이 모두가 우상이다.

 

어제는 부모님이 오시고 아버지가 말씀을 전하시는 주일이었다.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올라와 식사를 하면서 어찌 그 어려운 상황에서 자식들 넷을 키울 수 있었는가 물었다. 특히 우리 어머니의 모진 모성애는 한석봉의 모친을 뺨친다. 하나님 앞에 맡긴다는 게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이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쓰실 놈이면 살리시고 쓰실 놈이 아니면 데려가라 하셨다니, 말이 쉽지 그럴 때의 어미로서의 심정은 오죽하셨겠나? 그게 결코 사람의 의지로는 할 수 없다. 특히 나에 대해서는 무슨 이야기 끝에 내가 고등학교 때 가출했던 이야기가 나왔는데 들을 때마다 어머니의 강심장은 가히 성령의 것이 틀림없다.

 

아무튼 오늘 본문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혼미한 것은 ‘혼합종교’에 빠질 때인 것을 확실히 한다.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때이다. 여기서 왕은 통치하는 사람을 일컫기보다 ‘왕이신 우리 하나님’을 연상하는 것이 와닿는다. 저들은 왕 되신 하나님을 저버렸다. 그 삶에 모시기 싫어할 때 영락없이 우리 곁의 귀한 게 우선 우상이 된다. 이를 숭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걸 위해 돈을 벌고, 그것으로 기뻐하고, 그것으로 웃음 짓는, 사는 게 다 그렇다는 데야 뭐라 한들. 결국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난 것은 우상이다. 자기들이 좋을 대로 결정하고 판단한다. 이를 신적으로 여기며 사는 것을 보여준다.

 

지혜자는 간곡하게 말한다.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잠 24:21).” 성경은 우리에게 수차례 우상숭배인지, 하나님인지를 분명히 하라고 이른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신 30:15-18).” 이는 오늘 우리 신앙의 가장 기초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가, 어쩌는가.

 

미가와 그 어미도 나름은 하나님을 모시고 살았다. 더불어 자기들 좋을 대로 결정하면서 말이다. 어찌 그런가? 말씀이 없어서다. 성경이 중심을 잡지 못할 때 그 마음은 요동하게 돼 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11).

 

말씀이 아니면 우리는 늘 좌고우면 한다. 그때마다 자신들 좋을 대로 행한다.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대하 24:18).” 오늘에도 이런저런 어려움이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평소 자신의 소행을 살피라는 ‘하나님의 확성기’이지 급한 불부터 끄라는 신호가 아니다.

 

실은 어제 오후에 누구의 소식을 듣고 마음이 어려웠다. 저의 사연은 늘 겹치고 겹치는 것마다 어찌 말로 다 표현하기가 어렵다. 또 무슨 일로 이번에는 회사에서 시달림을 당하다 급기야 폭행을 당한 모양이다. 고소를 하고 병원에 입원했던 게 회사 차원에서는 문제라, 저로 고소를 취하하라 종용하고, 저는 사직당할까 두려워 그 말을 따랐다가 이도저도 아닌 상태가 된 모양이다. 자세한 내용이야 더는 묻지 않았지만, 늘 그에게는 상대가 있고, 그때마다 어려움을 겪는데… 나는 차마 그 일의 근본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왕의 통치를 받기 싫어하는 삶이 원인이지 않겠나, 말해주지 못했다. 늘 기도를 부탁하지만 나의 기도는 항상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바라고 주 앞에 바로 세워지기를 빈다. 저는 일처리가 잘 되기를 바라나 나는 저의 영혼이 잘 되기를 바란다.

 

이에 대한 엄연한 사실 하나,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그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다. 늘 부탁하는 기도와 나의 기도 내용이 다르다. 물론 이 땅을 살면서 우리에게는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있다. 이를 두고, 이에 어려움을 호소하다보면 주의 뜻을 알게 돼야 한다. 하지만 이 일만 아뢰면 그것은 우상숭배가 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한다.’ 이는 문제 해결이 우선이지 하나님 사랑하기는 나중이다. 회사에 다니는 일, 돈 버는 일, 집이 잘 팔리고 잘 사고, 어떤 문제가 잘 풀리고 형통하기를 두고 감사의 조건을 삼으면 이것이 우상이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나 이는 천지신명과 온갖 잡신을 섞어 혼합하는 것과 같다. 문제 해결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다보니 우상이 난무하다.

 

우리가 숭배하는 우상은 실제 너무 필연적이어서 어떤 이에게는 건강과 안전이, 어떤 이에게는 사업에 따른 성과나 일의 성공여부가 기도하게 하고, 교회를 다니게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요인인데…… 이는 엄연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 할 수 없다. 자기 필요를 위한 구함과 바람은 모두 우상숭배이다. 자식이 우상이고, 가정의 화목이 우상이고, 자기 자신의 일신상의 평탄함이 우상숭배이다.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 일신상의 여타 문제가 우선이면 모두가 우상이다. 그 부르는 이름 ‘하나님’도 우상이다. 죄란 말씀의 통제를 벗어난 모든 것이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 119:11).

 

이를 마음에 새겨야 하는 이유다. 오늘처럼 많은 성도들의 시대가 있을까? 보면 진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닌다. 그런데 분명히 예수님은 일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이것이 성도의 길이다. 한데 죄다 성도란다. 보면 내 주위엔 목회자나 그 지망생도 많다. 찾는 자가 적을 것이란 말씀이 잘못 됐나? 이는 우리 안의 누룩과 같아서 ‘작은 소망’ 하나가 삽시간에 부풀려진 것 같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6-7).”

 

정신 차리지 않으면 믿는다고 믿으면서 미가 엄마 꼴 난다. 돈을 잃고 저주를 퍼붓다, 그 돈을 가져간 게 아들 미가인 것을 알고 행여 자신의 저주가 아들에게 돌아갈까 하며 자기 좋을 대로 ‘하나님을 섬겨대는 것’이다. 참 극성인 신자들은 열에 아홉은 영락없다. 그럴 수 있지, 하고 허용한 작은 일이 더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영혼을 뒤덮었다. 죄질에 나쁘고 좋고는 없다. 죄는 무조건 나쁘다. 성경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을 때, 더는 말할 게 없다.

 

오늘 본문의 미가와 그 모친의 작태는 우리 생활을 그대로 비춘다.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 본래 사람이 그렇다.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심지어 주의 일을 하면서도 전적으로 주께 맡기기란 불가능하다. 당연히 우리 의지로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좋을 대로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희한하지? 잘 믿는데 잘 살고도 싶다. 남부럽지 않게! 그러니 육신의 일은 하나님을 대적한다.

 

이름값도 못하고 사는 꼴이라니! 미가란 이름은,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있더니(삿 17:1).”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신가!’ 하는 것으로 찬송이 담긴 뜻이다. 믿는 가정이면 저마다 아이들 이름을 성경적인,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는 의미를 담아 짓는다. 성도라는 의미도 그렇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엡 4:1).” 한데 그게 어디 그러한가?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살전 2:12).”

 

하나님과 나 사이에 우상-하나님보다 우선하는 모든 것-을 두면 그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삶 속에서 느끼기가 어렵다. 하나님은, 너무, 느리다. 넉넉하지 않으신 것 같다. 살 수가 없다. 그러느니 한 방이 필요하다! 이에 “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삼상 12:21).” 그러니 우리에겐 아닌 건 죽어도 아닌 것이다. ‘죽을까 하노라’ 할 때 이미 처음 사람은 끝난 이야기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는 것을 가장 싫어하신다. 그런데 이도 좋고 저도 좋다고 하는 이유는 마치 어느 것 하나 걸려 자신이 좋은 것으로 하나님이라 하면 그게 우상이다! 특히 돈이 최고일 때다. 앞뒤 가리지 못하게 한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시 52:7).

 

예외가 없다. 목회자라도 다를 것이 없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돈은 우리로 영적 무지, 무능자로 만든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한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 4:22).”

 

미가와 그 모친의 일도 모두가 실은 돈 때문이었다. 누구의 이번 일도 실은 돈 때문이다. 돈이 버무려져 혼합종교, 혼합신앙을 형성한다. 주님은 엄히 이르시되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결국 바울의 설교에서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오늘 본문 레위인도 제 길을 찾아가다, 돈에 팔려 미가에게로 간다. 영적으로 혼탁한 시대다. 그때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말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16:17-18).” 물론 살면서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생활은 없다. 그러나 주가 채우시고 입히시고 먹이시는 데는 양이 안 찬다. 더 좋은 세상을 뿌리칠 수가 없다.

 

특히 부르심을 받은 자로 사는 데 있어 돈은 가장 매혹적인 유혹이다. 연연하다 미끄러진다. 엉뚱한 자로 세워져 여럿을 그릇되이 가게 한다. 레위인이 미가의 집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는 내용은 가히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다(7-9). 이를 두고 바울의 설교를 되새기면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전 9:11).” 참 바른 길로 간다는 게 너무 유혹이 많다.

 

그럼에도 어김없는 것은, 쓸모없으면 버림당한다는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5-6).” 주와 함께 하지 못하면 그 말로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이를 두려워할 줄 모르면 우선 목회는 접어야 한다.

 

성경은 수차례 경고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나는 무섭다. 두려운 일이다.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가 없다. 이에 더 필사적으로 이처럼 말씀 앞에 앉힌다. 타락은 순간이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누구라도 재주 없다. 우리 육신이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하다못해 어떤 이와 무슨 내용의 이야기를 나누느냐에 따라 하루가 뒤숭숭할 때가 많다. 이런저런 일로 아내는 요즘 마음이 무겁다. 공부방에 아이들이 더 오고 덜 오고에 따라 어쨌든 수입에 영향이 있으니까, 늘 내게 기도를 채근하는데 나는 민망하다.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벧후 2:10-11).” 그릇된 신앙은 축복이라고 빌지만 우리 삶에 저주가 되어 돌아올 때가 더 많다.

 

성경은 자주 일러, 분별하라 하시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사 44:18).” 그러기까지 우리 영혼은 또 얼마나 육에 시달리며 끌려 다니고 있는지.

 

오늘 시편은 이에 따른 처방전 같다. 감사로밖에는 이 난국을 헤쳐 나갈 방도가 없다. 설령 이러저러한 형편이라 해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어떠하며, 오늘까지의 삶이 또한 얼마나 많은 감사로 채워졌는가를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가장 귀하고 가장 큰 예배가 무엇인지, 이는 감사뿐이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시 100:1-2).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간다. 우리의 갈 길은 아직 남았다. 이를 시편은 기억하고 노래하는 것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3).

 

이를 안다면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눅 12:27).” 하다못해 들에 피어나는 들꽃도 하나님이 이처럼 훌륭하게 자라게 하시는데 하물며 우리일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지금 우리 입에 머금은 말이 현실이 된다. 감사로 그 입술을 적시고 사는지, 염려와 근심으로 그 입에 가득한지,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4).

 

별 수 없다. 누구의 당면한 일도, 우리의 이런저런 일도, 이 모두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왕을 모시고 사는 일, 왕 없이 자신들 좋을 대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끼워 맞추듯 혼합하여 사는 일, 어느 길을 택할 것인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이에 나는 누가 물으면 억지로라도 나를 복종시키는 것은 내가 어떠한지를 내가 잘 알기 때문이다. 분명히 성경은 일러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한데 자칫 문화니 화합이니 하며 덩달아 덩실덩실 좋다고 은 신상 앞에 넙죽 엎드리는 신자라니! 뒤섞인 세상에 끌려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꼴이 가관이다. 부디 그렇지 않기 위하여도, 부디 말씀으로 중심을 잡고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내 안에 모시고,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5).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0) 2022.05.04
아침마다 내가  (0) 2022.05.03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0) 2022.05.01
새 노래  (0) 2022.04.30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0) 2022.04.29